• 최종편집 2024-04-18(목)
 

▲ 어린 시절의 안숙선(사진 오른쪽) 명창

 

남원의 '아기명창'에서 한국 '최고명창'으로


안숙선 명창은 이 시대 최고의 소리꾼이다. 어려서 '아기 명창'으로 소질을 발휘한 안 명창은 마흔 무렵의 나이에 판소리 다섯 바탕을 완창했고, 40대 후반에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국제무대에서 우리 전통문화 선양에 앞장서왔다. 소리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60주년이 된 2017년을 보내면서 지나온 삶을 함께 더듬어보고 새해 소망도 들어봤다.


안숙선 프로필 

 

"높은 봉 상상봉이 평지가 되거든 오시려오 / 사해 너른 바다 육지가 되거든 오시려오"

 

한양 낭군을 향한 옥중 춘향의 그리움이 통절했다. 변학도의 수청 명령을 당당히 거역하고 정절을 꿋꿋이 지켜내는 춘향. 시련을 견디고 끝까지 수절하는 천하절색의 기개가 관객의 마음을 뭉클하게 울렸다.

 

고진감래인가? 상황의 극적 반전! 암행어사가 돼 돌아온 이도령과 옥중 시련을 이겨낸 춘향이 향단, 방자, 월매 등과 함께 손에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췄다. 그리고 재회의 기쁨을 신명 나게 노래했다. 이어지는 '사랑가'의 열창! 130석 규모의 공연장을 뜨거운 열기로 채우는 절정의 대단원이었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 이히이히 내 사랑이로다"

 

지난 12월 8일 저녁 서울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펼쳐진 작은창극 '그네를 탄 춘향' 공연 현장. 하얀 치마·저고리 차림에 부채를 들고 무대에 선 도창(導唱) 안숙선(安淑善·69) 명창은 울림 큰 소리와 원숙한 연기로 무대를 감명 깊게 이끌어나갔다.

 

그 며칠 뒤 인터뷰를 위해 서울 강남구 헌릉로 자택을 찾았다. 안 명창은 나지막한 산자락에 아늑하게 앉아 있는 자택의 연습실에서 수수한 차림과 얼굴로 기자를 반가이 맞았다. 때 이른 한파가 몰아친 날이었지만 가야금과 북, 십폭(十幅)병풍이 놓인 연습실에는 안온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한 해의 끝자락이어서일까? 안 명창은 한 해를 보내는 소회와 함께 새해에 대한 다짐을 차분한 어조로 조곤조곤 들려줬다.

 

"칠십 나이가 눈앞에 다가와서 더 그런가요?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이 실감 나는 요즘입니다. '하루하루를 좀 더 꽉꽉 채우며 살걸'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그러면서도 후학들에게 도움되는 밀알이 돼야겠다는 다짐으로 저 자신을 위안해본답니다."

 

◇ 국악 집안에서 자라난 '아기 명창'

 

안 명창의 60년 경력은 놀랍다 싶을 만큼 화려하다. 1957년 여덟 살의 나이에 국악을 만난 안 명창은 1979년 국립창극단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기량을 맘껏 발휘해 남원 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1986년),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 지정(1997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1998~2005년), 옥관문화훈장(199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2000~2013년), 프랑스 문화훈장과 대한민국 문화훈장(2011년) 등의 경력을 잇달아 쌓아가며 국악 발전과 선양을 국내외에서 이끌었다. 현재는 춘향제전위원회 위원장직을 8년째 맡고 있다.

 

안 명창과 국악의 만남에는 외가의 영향이 컸다. 이모(강순영)는 가야금을, 외당숙(강백천)은 대금을 연주했고 외사촌(강도근)은 판소리의 명인이었다. 외가를 드나들며 국악의 묘미를 자연스레 몸에 익혔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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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아기 명창'에서 한국 '최고 명창'으로 - 국악인생 60년 '안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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