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피카소가 후원한 최승희
보석 휘감은 '보살춤' 인기…美·유럽 공연 500회 넘어
해방 후 월북…말년에 숙청

개인 발표회 먼저 한 조택원
피아노 반주로 승무 창작춤…최승희 제자와 같이 공연도
韓-日 문화외교에 큰 역할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한국 신무용은 일제 식민지 강점기에 태어났다. 춤으로 사상을 표현할 수 있다고 깨달은 지식층 젊은이들이 서양식 테크닉에 조선의 문화를 접목해 신무용이라 했다. 가장 암울한 시대에 태어난 한국춤인 만큼 신무용은 억압받는 조선인들에게 즐거움은 물론 긍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조선의 춤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 일본과 중국 관객들에게, 세계 2차대전의 포연 속에서 이 춤을 본 바다 건너 서구 관객들에게도 황홀함과 감동을 선사했다.

◆ 함흥군수의 아들과 양반가의 딸

한국 신무용의 대표적인 인물이 최승희(1911~1967)와 조택원(1907~1976)이다. 이 두 사람은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학과성적도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예체능과 글재주 등 다방면에 출중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기대와 촉망을 한몸에 받았다.

함흥군수인 조부와 대한제국 군인 부친을 둔 조택원은 소학교 시절부터 러시아 혁명에 쫓겨 함경북도 타국까지 피난 온 러시아인들을 가까이서 접했다. 비운의 현실 속에서도 밤만 되면 자신들의 민족 춤을 추며 시름을 달래는 러시아인들을 보고 춤에 대한 꿈을 품기 시작했다.

정승판서 가문에, 아버지는 진사에 합격한 양반가 출신 최승희는 열여섯 살 되던 1926년, 경성의 공회당에서 처음으로 춤 공연을 보게 됐다. 당시 조선에 처음으로 공연 온 일본의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춤을 관람했는데, 조국의 현실을 생각나게 한 ‘사로잡힌 사람’이 그를 매료시켰다. 공연이 끝나고 최승희는 무대 뒤에서 이시이 바쿠를 만나 춤을 배울 결심을 했다.

네 살 위의 조택원이 춤을 먼저 알았지만, 본격적 수련은 최승희가 먼저 시작한 셈이다. 최승희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도망치듯 춤을 배우러 일본으로 간 지 1년 만에 인기를 얻었다. 조택원은 이시이 바쿠의 두 번째 조선 공연에서 역시 ‘사로잡힌 사람’을 보고 그의 문하생이 됐다.

◆ 같은 스승…불교 소재로 춤 창작

최승희와 조택원은 같은 스승 아래에 있는 동료로서 함께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조택원은 1933년 독립해 첫 번째 개인 발표회를 가졌다. 그중 하나가 승무를 소재로 만든 창작춤 ‘승무의 인상 (1933)’이다. 이 춤 제목은 1943년 시인 정지용에 의해 ‘가사호접’으로 바뀌었다. 전통적 고깔과 장삼을 입고 춤을 추되 국악기가 아닌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를 반주로 하는 ‘가사호접’의 춤과 제목은 조택원을 대표하는 상징작이 됐다.

같은 해 개인 발표회를 연 최승희도 한국적 창작춤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여기서 공연한 ‘에헤라 노아라’라는 한량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최승희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최승희를 대표하는 작품은 맨몸에 보석을 휘감은 채 손으로만 표현하는 ‘보살춤 (1937)’이다. 둘 다 불교적 소재로 자신의 대표작을 만든 것이 공통점이다. 훗날 조택원이 미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그를 후원해준 미국의 신무용가 루스 세인트 데니스 역시 ‘보살춤’과 아주 흡사한 ‘콴인’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 해외에서 더 유명했던 조선 무용가

최승희가 미국의 흥행사 휴록의 기획으로 세계 공연을 떠났을 때, 조택원은 국내에서 개인 공연을 위해 같이 춤을 출 여자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최승희는 대부분 혼자서 춤을 췄지만 여자치고는 기골이 장대해서 남녀듀엣이 필요한 경우, 최승희가 남자역을 도맡아서 했기 때문에 남자 무용수가 필요없었다.


남자인 조택원의 경우는 달랐다. 그때 생각해 낸 것이 최승희의 제자 김민자였다. 그녀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토슈즈를 신을 줄 알았던 실력 있는 무용수였지만 최승희의 그늘에 가려 빛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최승희가 해외 장기 공연을 떠나버려 기약없이 몇 년간 스승의 집안일만 돌봐야 했던 차에 조택원의 러브콜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 이상이었을 것. 김민자는 선뜻 요청을 수락했고 해외에서 이 사실을 들은 최승희는 불같이 화를 내며 국제전화를 걸어 조택원과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

자기 허락도 없이 외간남자(?)와 춤 파트너가 된것도 모자라 단독 공연까지 감행한 제자의 당돌한 행위는 당시의 정서로는 용납이 안 되는 배신행위나 다름없었다. 이 일로 김민자는 근신조치를 받게 됐고, 결혼을 핑계로 스승의 곁을 떠났다. 소유욕과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최승희가 자기의 제자를 데려간 조택원을 좋게 보았을 리는 없었겠다는 추측이다.

조택원은 1937년 프랑스로 건너가 공연을 시도했다. 해방 직후엔 미국에 머무르면서 현대 무용사의 거장 루스 세인트 데니스의 후원 아래 미국 순회공연을 했다. 조선춤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각각 500여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예술적 감각은 물론 조선의 춤이 얼마나 경쟁력 있는 것이었는지 새삼 일깨워준다.

뛰어난 외모를 겸비한 이들은 영화에도 출연했다. 최승희는 자전적 영화 ‘반도의 무희’와 ‘대금강산보’에 출연하고 ‘이태리 정원’ 앨범을 취입했는데, 지금은 음반밖에 남지 않았다.

조택원은 영화 ‘미몽:죽음의 자장가(1936)’에서 바람난 유부녀 애순(문예봉)이 사모하는 무용가로 출연했다. 이 필름은 현존 조선의 유성영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문화재에 등재됐다. 시중에서도 구할 수 있어 젊은 조택원의 춤과 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국경을 초월해 그들을 아끼는 유명 후원인들도 있었다. 최승희에게는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테일러나 피카소 등이 있었고, 조택원에게는 펄벅 여사가 있었다.

◆ 해방 직후 남과 북으로 갈린 운명

이들의 운명은 해방 이후 희비가 엇갈렸다. 문화말살정책 속에서도 당당히 ‘코리안’을 표기하며 조선춤만으로 활동했던 최승희는 막바지에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는 비난으로 남한에서 버티지 못한 채 해방 직후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했다. 조택원은 위문공연을 피해 미국으로 갔지만 친일색이 짙은 무용시 ‘부여회상곡(1942)’을 올렸다는 이유와 미국에서 이승만 정권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정부 수립 이후에도 한동안 귀국하지 못하는 풍운을 겪었다.

사랑 없는 결혼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결혼과 이혼을 거듭했던 ‘모던보이’ 조택원은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반면 ‘신여성’ 최승희는 가족에게만큼은 ‘여필종부’였다. 결국 한 사람은 남에서, 한 사람은 북에서 조선의 춤을 발전시키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월북한 최승희는 김일성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탄탄대로를 달렸다. 지금의 옥류관을 무용연구소로 하사받았고, 총천연색 춤 영화 제작까지 지원받았다. 조택원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입국금지를 받아 오랜 방랑 끝에 1960년 13년의 타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이듬해부터 그는 한국 무용협회 고문이 되며 문화훈장을 받는 등 일생 동안 한국춤 발전을 위해 활동했다.

최승희는 많은 후원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사회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며 험난한 길을 자처했다. 주체사상이 도입되면서부터 남편이 먼저 숙청되고 자신의 모든 관직도 박탈당했다. 심지어 딸 안성희가 대중 앞에서 자신을 공개 비판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안정적인 말년을 살았던 조택원은 후세 사람들에게 최승희만큼의 강렬함은 남기지 못했다. 그의 뒤를 이을 제자를 키우거나 자신의 춤을 계승할 이론을 많이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승희의 매니저를 자처한 남편은 그녀를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포장해 스타마케팅에 성공했다. 조택원은 그럴만한 매니저를 두지 못했지만, 세련된 매너와 사교성으로 독자적인 외교를 펼쳐나가 문화예술계는 물론 일본의 정·관계 인사들까지 인맥을 형성해 대한민국 외교사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결국 최승희는 1967년께 반동으로 몰려 숙청당해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조택원은 예술인들의 애도 속에 1976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남과 북으로 상징될 수 있는 조택원과 최승희의 일생은 한국 근대사의 슬픈 단면이기도 하다.

[무용평론가 이 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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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무용의 대표적인 인물 - 최승희와 조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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