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보성소리의 원조 정응민(鄭應珉, 1896~1963) 명창이다. 정응민은 1896년 전라남도 순창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소리꾼인 큰아버지 정재근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정응민은 어영대장 윤판서의 사랑채에서 기숙하며 당대의 명창 박유전(朴裕全)과 백부 정재근에게서 소리를 배웠다.

정회석 판소리.jpg

박유전과 정재근의 만남은 임오군란(1882)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오군란이 실패하고 대원군이 청나라로 압송되자, 박유전은 새로 정권을 잡은 민씨 일파에 의해 대원군의 일파로 몰려 남쪽으로 피난가다가 나주 일대에서 소리를 잘한다는 정재근의 집에 머물게 된다. 이때 정재근은 박유전에게서 소리를 배우게 된다.


3~4년후 대원군이 복권되자, 정재근은 조카 정응민을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게 된다. 정응민은 20세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한편 박유전은 힌일합방 이후 “나라를 잃어버린 명창가객이 살아서 뭐 하겠느냐”며 고향에 내려갔다. 서울에 있던 정응민은 대스승인 박유전이 전라도 어디에서 한겨울에 굶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전라남도 보성으로 내려간다. 이때 나이가 21세였다.


보성에서 정응민은 제자들을 받아들여 소리를 가르쳤다. 그는 보성에서 현재 가상 왕성하게 전승되는 보성소리를 확립시켰다. 정응민은 한의사 딸 김대임과 혼인해 아들 하나와 딸 다섯을 낳았다.


정응민은 아들 정권진(鄭權鎭m 1927-1986)에게 소리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소리꾼이 대우도 못 받고 판소리가 천대를 받는 세상에 판소리를 자식에게 물려 주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는 자식들에게 판소리를 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 시켰다.


하지만 핏줄은 속이지 못했다. 아들 정권진은 소리에 빠져서 이곳 저곳을 헤메고 다녔고,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아버지 정응민은 열다섯 아들 정권진에게 비로소 허락한다. 그러나, 정권진은 아버지에게서 소리를 배울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정권진은 아버지의 수제자인 박기채에게서 소리를 배우거나 어깨 너머로 배운 아버지의 소리를 배워 혼자 독공을 했다. 그는 훗날 강산제 심청가 판소리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다. 정권진은 인간문화재, 중요무형문화재가 되어 활동했다.

 

정권진은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 정회천은 전북대 국악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선대가 이루어 놓은 판소리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정회천은 또 중학시절부터 명고수 김명환으로부터 고법을 배워 현재 무형문화재 59호 전수조교로 등록되어 있으며 명인 함동정월로부터 가야금 산조도 배웠다. 가야금을 전공한 그의 부인 안희정씨(서울대 국악과졸)도 전주도립국악원 교수로 있다.


둘째 아들 정희완(전남대 국악과졸)과 부인 최미애(전남대 무용과졸)는 전남도립국악원에서 대금연주자와 한국무용을 각각 맡고 있다.


막내인 정회석(서울대 국악과졸)은 KBS 국악관현악단 해금주자인 그의 부인 정수년(서울대 국악과졸)등과 함께 모두가 부부 국악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에 정권진의 막내아들 정회석이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심청가)’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한편 문화재청은 8세때부터 정권진에게서 심청가, 춘향가를 배운 김영자(金榮子, 69)씨도 ‘판소리(심청가)’ 보유자로 인정했다. 김영자씨는 1987년 판소리(수궁가) 전수교육조교가 되어 전승활동에 힘써왔다.

김영자 판소리.jpg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에는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흥보가, 춘향가, 고법 등 6개의 분야가 있는데, 심청가는 2017년 성창순 전 보유자가 작고한 이후 보유자가 없었다.

 

문화재청은 이번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심청가)’ 보유자 인정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오랫동안 판소리의 계승에 전념해 온 전승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전승 현장에 활력을 불어 넣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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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보성소리 명창집안, 3대째 전승하다, 정응민의 손자 정회석, 판소리 예능보유자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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