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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국악한마당 방송안내] 2월 6일 (土) 오후 12시 10분 (이춘희,김혜란,이호연,최정아,김혜영 등)
    ● 민요 <매화타령> 이춘희 김혜란 이호연 반주/ 이음회 ♛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보유자 이춘희 ● 민요 <긴아리랑, 구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아리랑> 이춘희 최정아 이미리 반주/ 이음회 ♛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전승교육사 이호연 ● 민요 <금강산타령, 정선아리랑, 한오백년> 이호연 홍주연 노수현 반주/ 이음회 ♛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전승교육사 김혜란 ● 김혜란 구성 <덕담굿> 김혜란 김혜영 ● 민요 <어랑타령, 창부타령> 이춘희 김혜란 이호연 김혜영 최정아 이미리 노수현 반주/ 이음회 ◾ 꿈나무한마당 ● <진도북춤> 박하현 (서울거여초 3학년) ● 이서윤 안무 <단취선> 團聚扇 이서윤 이창순 장소영 반주/ 이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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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2
  • [祝] 2020 제47회 대한민국 춘향국악대전 명창부 대통령상 '강길원' 씨 수상
    제47회 대한민국 춘향국악대전에서 강길원(38,전남 진도)씨가 세 번의 도전 끝에 판소리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 강길원 프로필 10월 21일부터 22일까지 열린 ‘제47회 대한민국 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부 경연에서 강씨는 판소리 적벽가 중 ‘동남풍 비는 대목’을 열창해 심사위원으로부터 합계 495점을 받아, 대통령상을 받았다. 강씨는 제 45회 때부터 대회에 출전, 그 해 우수상을 입상하고, 46회 대전에서 최우수상을 입상한 데 이어 이번 대전에서 마침내 대통령상을 거머쥐었다. 남원 출신이기도 한 강씨는 부모님의 권유로 7살 나이로 소리에 입문했으며, 성창순, 김일구, 김영자, 박양덕, 전인삼 명창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강 씨는 한국종합예술에서 전통예술원 음악과를 다니다 중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로 소리에 더 매진, 현재는 국립남도국악원 소속으로 왕성한 국악 활동을 하고 있으며, 전주국악방송 온고을 상사디야에서 진행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왕기석 심사위원장은 강 명창에 대해 “일단 공력이 너무 좋고, 남자 소리꾼답게 소리에 힘이 있다” 면서 “발림, 너름새 목도 좋고, 광대가 소리꾼이 갖춰야할 조건을 다 갖췄다”고 평가했다. < 춘향국악대전 일반부 부문별 수상자> ◇ 판소리(명창부) △ 대상 강길원(대통령상) △ 최우수상 양혜인(국회의장상) △ 우수상 정승희(전라북도지사상) △ 장려상 유태겸(남원시장상) ◇ 판소리(일반부) △ 대상 박세미(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 최우수상 이성현(전라북도지사상) △ 우수상 전도연(남원시장상) △ 장려상 이유빈(춘향제전위원장상) ◇ 민요(일반부) △ 대상 김정애(전라북도지사상) △ 최우수상 윤정화(국립민속국악원장상) △ 우수상 한원태(춘향제전위원장상) △ 장려상 도상호(춘향국악대전 대회장상) ◇ 무용(일반부) △ 대상 박선영(국무총리상) △ 최우수상 이창순(남원시장상) △ 우수상 이수지(춘향제전위원장상) △ 장려상 문서희(춘향국악대전 대회장상) ◇ 기악관악(일반부) △ 대상 한지윤(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 최우수상 위민영(국립민속국악원장상) △ 우수상 유하은(춘향제전위원장상) △ 장려상 이광현(춘향국악대전 대회장상) ◇ 현악병창(일반부) △ 대상 양주희(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 최우수상 윤송(남원시의회 의장상) △ 우수상 임은비(춘향제전위원장상) △ 장려상 윤예원(춘향국악대전 대회장상) < 춘향국악대전 학생부 부문별 수상자 > ◇판소리 학생(고등부) △ 대상 박은채(교육부장관상) △ 최우수상 김승국(남원시장상) △ 우수상 허은혜(남원교육지원청교육장상) △ 장려상 조소영,유지민, 김선우, 최보길, 구동희(춘향제전위원장상) △ 특별상 한예령, 안세희, 박도을, 김주원, 박진명(춘향국악대전 대회장상) ◇ 판소리 학생(중등부) △ 대상 윤연서(교육부장관상) △ 최우수상 정우연(남원시의회의장상) △ 우수상 김민결(남원교육지원청교육장상) △ 장려상 김은재, 장무영, 윤연서, 김명서, 박보은(춘향제전위원장상) △ 특별상 손세빈(춘향국악대전 대회장상) ◇판소리 학생(초등부) △ 대상 이예은(교육부장관상) △ 최우수상 허정운(국립민속국악원장상) △ 우수상 오우석(남원교육지원청교육장상) △ 장려상 김사랑, 황현일, 장예정, 김수아, 최은우(춘향제전위원장상) △ 특별상 남규민, 모지후, 강민슬, 김서하, 노규리(춘향국악대전 대회장상) ◇무용(학생부) △ 대상 조아현(전라북도교육감상) △ 최우수상 최은원(국립민속국악원장상) △ 우수상 강민선(남원교육지원청교육장상) △ 장려상 장나라, 조현채, 이유리(춘향국악대전 대회장상) ◇ 기악관악(학생부) △ 대상 정민정(전라북도교육감상) △ 최우수상 정겸(남원시의회 의장상) △ 우수상 유영(남원교육지원청교육장상) △ 장려상 이호영, 김민지, 강건후(춘향국악대전 대회장상) ◇ 현악·병창(학생부) △ 대상 장아솔(전라북도교육감상) △ 최우수상 최영서(남원시의회 의장상) △ 우수상 서효진(남원교육지원청교육장상) △ 장려상 위은아, 심대윤(춘향국악대전 대회장상) ▶ 해당기사 더보기
    • 국악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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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3
  •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 광복 뒤, 삼화권번에는 천여 명의 기생들이 모여들어
    벽파 이창배의 《가요집성》은 경서도 소리꾼들에게는 교과서가 되었기에 지역마다, 혹은 명창마다 조금씩 다르게 불러온 고어(古語), 또는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사설들은 고쳐졌다는 이야기와 함께 지난주에는 <가무연구회>의 활동, 조선 총독부내에 《조선음악협회》이야기를 하였다. 협회 내에는 일본음악의 방(邦)악부, 서양음악의 양(洋)악부, 그리고 조선악부가 있었는데, 이 조선악부는 <음악단>과 <가무단>이 존재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광복을 앞둔 1940년대 전후는 태평양 전쟁이 긴박해지고 있던 시기여서 강제 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음악단이나 가무단으로 몰려들었다는 이야기, 그러나 실기와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기예증을 받을 수 있었고, 기예증이 있어야 위문공연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위문단은 가는 곳마다 그 인기가 대단해서 입장하지 못한 관객들이 큰 소동을 벌이는 사태까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했다.또 당시《조선악부》책임자로는 함화진, <조선음악단> 단장에는 박헌봉, <조선가무단> 단장에는 최경식이었고 여기에 소속된 연주진용은 심상건, 이충선, 김계선, 김봉업, 임유앵, 박초월, 장채선, 이창순, 경부용, 산타령의 엄태영, 최정식, 정득만 등 기라성 같은 명인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광복이 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한 벽파 이창배 선생이처럼 8.15광복 전야의 국악계는 일본제국주의 통제 아래 주도적인 활동은 거의 할 수 가 없었다. 협회의 활동으로는 각처에 흩어져 있는 일본군을 위문하는 공연이나 참여할 정도로 비참했던 것이다.함화진, 박헌봉, 최경식과 같은 거물들은 물론이고 가야금의 심상건 명인을 비롯하여 피리의 이충선, 대금의 김계선, 소리의 임유행, 박초월, 장채선, 엄태영, 최정식, 정득만 등 그 이름만 들어도 쟁쟁했던 명인명창들이 개인적이고 창의적인 예술활동을 할 수 없었으니 나라 잃은 설음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이 될 것이다. 위문공연이든 흥행공연이든 간에 무대감독이나 사회는 벽파 이창배의 몫이었다.그러다가 광복이 되자 조선악부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음악단>이나 <조선가무단> 등은 자연적으로 해산이 되었고, 개인적으로, 혹은 숨어서 활동하던 국악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국악사(國樂司)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광복이 되면서 종전의 <이왕직아악부>는 <구황국아악부>로 별도의 독립을 하였고, 주로 민속악에 종사해 오던 재야 국악인들은 《국악원》이란 이름으로 1945년, 10월에 서울 다동에 사무실을 차리고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국악원은 48년에 《대한국악원》으로 명칭을 바꾼다. 개원 당시의 책임자는 이사장에 함화진, 부원장은 박헌봉, 그리고 유기룡, 이병성, 김천흥, 최경식, 임서방, 김아부, 남경흥 등이 간부로 활동하였는데 민요담당 부장은 최경식이었고, 이창배가 그를 보필하며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이창배는 대한국악원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경서도 창악인들의 모임이었던 <가무연구회>의 사무도 맡고 있었다. 이 연구회는 광복이 된 이후에도 그대로 존속이 되고 있었으며 오히려 일제강점기 때보다도 회원 수가 훨씬 많이 늘었다고 한다.그 까닭은 해방을 계기로 흩어져 개인적으로 활동하던 소리꾼들이나 또는 가정으로 들어갔던 여류 국악인들이 다시 합세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가무 연구회>에서 벽파 이창배가 주로 하는 일들은 명부를 만들어 회원을 관리하는 일, 각종 사업진행이나 회의록을 작성하는 일, 특히 민요가사를 수정하는 작업이나 신(新)가사의 작사, 그리고 왜곡되었거나 잘못된 가사를 바로잡는 작업 등이었다. ▲ 평양기생학교 수업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국의 해방은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국악을 대하는 태도나 시선도 달라진 것이다. 국악이 우리의 음악임에도 마음대로 부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던 경험을 했던 국민들은 해방이 되면서 국악의 가치, 국악의 존재에 대해 그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이다.뜻있는 인사들이나 가정주부, 애호가들은 좋아하는 음악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대한국악원>으로 배우러 나왔다. 특히 대학생들의 참여가 고무적이었다. 대학생들은 <학생국악동연회>라는 단체까지 조직하였으니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껏 시조며 민요 등의 성악과 기악 등을 배울 수 있었고 1950년 6월 30일 발표회까지 계획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성사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권번도 해방이 되면서 다시 간판을 달았다. 일제강점기에는 강제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맨 처음 간판을 달게 된 <삼화권번>에는 천여 명의 기생들이 모여들 정도였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당시 요리점으로 이름이 나있던 명월관이나 국일관에 전속으로 매어있던 기생들까지 <서울기생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종로 서린동에 사무실을 정하고 권번과 똑같은 행위를 하였다는 것이다.벽파 선생의 회고담이 재미있다.“해방이 되자, 유곽의 유녀들도 풀려 나와 얼굴 고운 여자들은 모두 모여들기 시작하여 어떤 여자가 정말 기생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당국과 협의 끝에 가무(歌舞)에 대한 엄격한 시험을 보아 여기에 합격한 자만이 기생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거의 절반이 떨어져서 명실 공히 가무를 습득한 자만이 추려졌다.그러다가 <삼화권번>과 <서울기생조합>이 병합하여 <예성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발족하였다. 이리하여 예전과 같이 양성소도 다시 생겨 가곡, 가사, 시조는 최상욱이 담당하고, 잡가와 민요는 최정식이 맡았다가 얼마 안 가서 이창배가 담당하게 되었고, 3년 수업을 한 사람에게는 졸업장을 주어 돈을 벌게 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얼마 안 되어 여순 반란 사건으로 인하여 예성사는 폐쇄되었으며, 기생은 제각기 자유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한편, 《대한국악원》 내에 소속된 창극단이 조직되었는데, 여기에는 가야금 병창으로 이름을 남긴 오태석을 비롯하여, 백점봉, 조상선, 정남희, 박동실, 공기남, 강장원, 정광수, 임방울, 김연수 등과 같은 유명 소리꾼들이 입단하여 도처에서 공연할 때마다 그 인기가 대단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경서도창을 위주로 하는 민요 단체로는《국악연예사》가 있었는데, 여기의 대표는 소리와 재담에 뛰어났던 박천복이었고, 정득만을 비롯하여 이은관, 장소팔, 김갑수, 여류로는 이복재, 정봉선, 윤일지홍, 모영월, 김정숙, 한정자, 장국심, 이정애, 김장수 등이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해당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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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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