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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정보 검색결과

  • 가야금병창 배우고 싶다면 칠곡군으로 오세요
    칠곡군은 2월부터 아마추어 전통문화 예술인과 후학 양성을 위한「향사 가야금병창 아카데미」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 사업은 지역 출신 전통문화예술인 향사 박귀희 명창(중요무형문화제 제23호)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후학양성의 뜻을 잇고자 2011년부터 가야금병창 아카데미를 운영해 오고 있으며, 매년 지역 학생을 비롯한 전국의 가야금 애호가 40여명이 수강중이다.이번 아카데미는 청소년부와 일반부로 나뉘어 2월부터 11월까지 10개월간 주 2회 운영되며 올해부터는 가야금 병창 저변확대를 위해 초급자 위주의 강의와 전문 강사를 초빙해 운영한다.이와 더불어, 향사 박귀희 명창 기념사업회(회장 김덕수, 안숙선)는 관내 초중교육기관 중 한 곳을 향사 학교로 지정해 가야금병창을 전수하는 장소로 만들어 가야금 병창이 지역 출신 학생들의 여가 프로그램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054)979-6744/010-3548-5447 해당기사 더보기 ☞ http://newsgumi.kr/news/service/article/mess_01.asp?P_Index=12789&flag=
    • 국악정보
    • 국악관련뉴스
    2013-01-18
  • 소리꾼 장사익, 뒤늦게 핀 찔레꽃
    ☞ 장사익 프로필선린상고 졸업뒤 보험회사와 낙원동 가요학원 쳇바퀴 돌듯 3년…광주 31사단 문선대 입대후 ‘31사 봄비 아저씨’로 유명세타기도제대후 복직하려던 직장 사라져 월급쟁이·독서실·카센터 등 25년간 자발없이 떠돌다 “딱 3년만 제대로 해보자” 다시 꺼낸 가수의 꿈태평소 잡고 김덕수패 따라다녔지만 정작 사람들 감동시켰던건 뒤풀이 노래 한소절…그때서야 갈팡질팡했던 세월이 거름이었던 사실 깨달아피아니스트 임동창 주선으로 신촌 예극장서 폭발적인 신고식…1995년 45세 나이로 늦깎이 데뷔앨범 발표후‘국민소리꾼’으로 다시 태어나"춥고 더운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많아유. 밤이 어두울수록 별빛은 밝아져유. 열에 아홉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어도 남은 하나의 기쁨 덕분에 살아갈 만하지 않던가유?"부러움의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드는 인생은 더러 있지만, 감동을 주는 인생은 많지 않다. 전자는 대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유리된 무용담을 닮아 있어 헛헛한 뒷맛을 남긴다. 그러나 후자는 소박한 삶이어도 듣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이는 무용담 특유의 과장된 수사 대신, 진정성이 이야기의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소리꾼’ 장사익(63)의 인생사는 후자로 수렴한다.임진년(壬辰年)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세밑 맑고 시린 날, 서울 종로구 홍지동 소재 장사익의 자택을 찾았다. 가파른 골목을 파행하며 거슬러 오르자 ‘장사익’이란 문패를 건 붉은 벽돌집이 보였다. 약속 시간에 맞춰 왔건만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집주인은 묵묵부답이었다. 철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조심스레 철문을 열고 들어와 대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묵묵부답이다. 대문 역시 잠겨 있지 않았다.너른 마당으로 겨울 햇살이 쏟아졌다. 마당 여기저기에 제멋대로 들러붙은 민들레 등 초본(草本)과 이끼에선 계절답지 않은 풋기가 돌았다. 담장 너머로 선명하게 펼쳐지는 인왕산 능선은 이곳의 행정구역이 서울특별시임을 잠시 잊게 만들었다. 베란다 바깥에 매달린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에선 클래식 음악을 다루는 FM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많은 자동차들이 도로를 내달렸지만, 소음은 이곳까지 닿지 않아 고요했다. 서울답지 않은 풍경에 취해 마당을 서성이며 솟대를 바라보던 기자의 머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추운데 뭐하고 계셔유? 오실 줄 알고 미리 문을 다 열어 놓았는데. 어서 올라 오셔유.”2층 베란다에서 장사익은 특유의 사람 좋은 얼굴로 충청도 사투리를 쏟아냈다. 4집 ‘꿈꾸는 세상’(2003) 수록곡 ‘아버지’에서 “얘야, 문 열어라!”라고 외치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장사익은 얼굴 곳곳에 깊게 패인 주름으로 웃었다. 그는 이마와 눈가의 깊은 주름으로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참으로 잘 찾아 왔구나란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미소였다. 현관 바깥으로 내려온 그는 반갑다며 기자의 손을 맞잡았다. 미소만큼이나 따뜻한 손이었다.장사익은 자택 2층 거실로 기자를 이끌었다. 별다른 세간이 보이지 않는 거실은 호젓했다. 젬베(아프리카 전통 타악기) 옆에 놓인 보면대와 클래식 기타는 이곳이 장사익의 연습 공간임을 무언으로 알려줬다. 보면대엔 ‘목포의 눈물’ 기타 코드 악보가 펼쳐져 있었다. 기타의 4번째 줄은 비어 있었다. 장사익은 “늘 그 줄만 끊어져유”라며 멋쩍게 웃었다. 널찍한 통유리에 비친 인왕산은 한 폭의 거대한 수묵화였다. 통유리는 인왕산의 풍경을 사시사철 담아내는 살아 있는 액자로 기능했다. 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잠시 빌려서 즐긴다는 전통 건축의 ‘차경(借景)’ 개념이 이곳 거실에서 구현되고 있었다. 아름다움에 취해 창 밖을 힐끔거리는 기자에게 장사익은 날개를 편 독수리 모양을 한 바위와 부처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설명하며 뿌듯해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사본이 통유리와 가까운 벽에 걸려 있었다. 바짝 마른 나무 두 그루와 판잣집 한 채…. 거실의 정취는 세한도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는 다기(茶器)에 무말랭이를 담아 뜨거운 물에 우려내 잔에 따라냈다. 무말랭이차의 구수한 맛과 향기는 다기처럼 질박했다. ▶일상의 뒤편에 묻어둔 노래의 꿈 보험회사ㆍ무역회사 사원, 가구점 총무, 독서실 사장, 카센터 직원 등 두 손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많은 직업을 자발없이 떠돌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첫 앨범을 낸 장사익의 인생사는 이미 우리 시대의 전설 중 하나다. 인생 후반기를 고민해야 할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열어젖힌 장사익의 인생사는 56세에 종9품 말단 벼슬 능참봉으로 시작해 80세에 정승 반열에 오른 남인(南人)의 거두 미수 허목(許穆ㆍ1595~1682)의 삶만큼이나 극적이다. 이미 많은 기사들이 사골마냥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인생사이지만, 전설은 듣고 또 들어도 흥미로운 법이다. 관련기사 더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6&aid=0000439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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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인소식
    2013-01-15
  • '국민소리꾼' 장사익 씨 "소리 인생 18년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지…"
    15, 16일 이틀간 단독 무대 "시인들에게 빚지며 살죠" ‘어머니 꽃구경 가요/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하략)’ 김형영의 시 ‘따뜻한 봄날’ 전문에 곡을 붙인 노래 ‘꽃구경’. 지난 봄 소리꾼 데뷔 18년 만에 처음 출연한 TV 프로그램 녹화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리꾼 장사익 씨(63)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고려장을 빗대 어머니의 자식 사랑을 담아낸 노랫가락이 슬퍼서만은 아니었다. “아, 저놈 참 행복허게 노래를 부르더구만요. 지가 지 모습을 보는 건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얼매나 삶이 반갑고 고맙고 기쁘던지요.” ‘국민소리꾼’ 장사익 씨가 오는 15~16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두 번째 단독 공연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를 연다. 그의 공연은 수년째 유료 객석 점유율이 97%를 넘는 스테디셀러. 지난달 31일 북악산을 코앞에 둔 서울 홍지동 집에서 그를 만났다. 앞마당의 풍경들은 제법 쌀쌀해진 바람 소리를 담아내고 있었지만 햇살만큼은 눈부시게 따사로웠다. “시월도 마지막날이네유, 가을 드세유.” 그가 건넨 건 빨갛게 잘 익은 홍시. 하나 먹으면 정 없다고 기어이 홍시를 하나 더 건네는 그에게서 구수한 시골의 향이 느껴졌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 삼봉마을에서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가 정식 소리꾼으로 데뷔한 건 마흔여섯이 되던 해. 소문난 장구재비였던 아버지에게서 음악적 기질을 이어받았지만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서울 선린상고에 진학했고, 생명보험회사에 취직했다. 직장생활 3년 후 공병으로 군에 입대,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31사단 문선대에서 근무했다. 제대 후 무역회사, 전자회사 영업사원, 카센터, 노점상을 전전했다. “가수가 열여섯 번째 직업이네요. 그때는 어느 한 곳에도 발을 못 붙이던 힘든 시기였는데 그때 그 인연들까지 노래를 할 수 있는 힘이 됐지요.” 정악 피리와 태평소를 독학으로 익힌 그는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을 따라 전국을 떠돌기 시작한 1993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공주농악’으로 장원에 올랐고,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결성농요’로 대통령상을 탔다. 1994년 11월 주위의 권유로 신촌에서 연 첫 공연이 대성황을 이뤘다. 지금까지 총 7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 장사익 프로필 관련기사 더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5&aid=0002779667
    • 국악정보
    • 국악인소식
    2012-11-05
  • 국악의 미래를 위하여 - 최상일: MBC '한국민요대전' PD
    2011.11.9 국립국악원 설립 6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제가 발언한 내용을 몇 부분으로 나눠 연재합니다. 저는 3부 종합토론의 토론자 5인 중 한 사람이었고, '국악계의 청년 일자리 창출'이 주제였습니다. 저는 국악계의 일자리 창출은 결국 국악의 활성화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아서, 제가 평소에 생각하던 국악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원인과 해결방안을 나름대로 제시하였습니다. 발언했던 내용을 간추려서 올립니다. 최상일----------------------------------------- 국악의 현황 국악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국악의 현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악을 둘러싼 여건은 상당히 좋아지고 있는데 국악은 아직 울타리 안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국내 여건은 많이 좋아졌다 먼저 문화적 수요라는 측면에서 보면, 국민소득이 증대하고 여가가 늘어나면서 문화에 대한 수요도 커지고 있다. 경제위기 등으로 정체와 퇴보의 시기도 있지만, 문화적 욕구의 증대라는 대세는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생존에 급급하던 시대에서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찾는 시대로 이행하는 것이다. 국악에 대한 인식도 갈수록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여러 분야에서 우리의 것, 토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우리의 소리'로 대변되는 국악에 대한 인식도 좋아지고 있다. 식민지시대와 개발시대를 겪은 나이든 세대가 전통문화를 멀리할 수밖에 없는 세대였지만, 오늘날 젊은 세대는 우리 소리에 대한 편견이 없다. 오히려 그동안 먼지 속에 묻혀있던 보물을 발견하듯 국악을 재발견하는 재미에 눈을 뜨고 있다. 제도적 측면을 보아도 우호적이다. 서구 선진국에는 못미치지만, 문화산업에 대한 공공적 지원은 확대되고 있으며, 예술경영 전문인력도 많이 배출되고 있다 국악 전문 방송채널 생겨난지 오래이며, 지역축제 활성화, 지방 국악원 신설 등등, 제도적 여건이 매우 좋아진 것은 분명하다. 국외 여건도 좋아지고 있다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올림픽, 월드컵, 김연아 등으로 잘 알려진 한국의 문화에 대한 세계인의 호기심이 크다. 이것이 이른바 한류 바람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 한류 바람을 엉뚱하게도 외국 모방 조립품이라 할 만한 '케이팝'이 독차지하고 있다. 자본의 힘이 작용하는 것이다. 해외 음악시장을 보면, 정체된 서양 고전음악(클래식음악)이나 획일적인 팝음악의 대안으로 '월드뮤직' 시장이 확대되는 모습이 주목된다. 국악이 진출할 수 있는 해외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국악은 해외 시장에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국악은 국내에서도 다른 음악에 비해 열세다 감상용 음악시장에서는 여전히 서양 고전음악이나 서양팝이 우세하다. 서양 고전음악은 검증된 완성도를 무기로 삼고 있으며, 서양팝은 여기에 대중성을 더했다. 대중음악 시장에서는 대중가요나 K-POP에 비해 국악이 현저한 열세다. 국악은 한정된 시장, 일종의 틈새시장에서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자립 기반이 약해 공공 기금에 의존하는 양상이다 국악계의 인력구조에 포화현상이 뚜렷하다 국악전공자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하고 정체되는 양상.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고 있는 것. 들리는 바에 의하면, 1년에 국악전공 졸업자가 800명씩이나 배출된다고 한다. 학교가 너무 많아진 것이다. 현재 국악계의 인력은 국악단, 국악관현악단 등에 취직하여 월급을 받는 중장년층과 그렇지 못한 청년층으로 양분되는 양상이다. 악단의 인력은 이미 포화되어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자리가 날 뿐이어서, 악단에 들어가기 위한 구직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그러는 한편으로, 악단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일부러 들어가지 않은 청년들이 밴드를 꾸려 새로운 시장을 개쳑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악단에 들어가 월급쟁이가 되는 순간부터 음악가로서의 생명을 잃는다는 생각을 하는 청년들이 있어서, 이들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다. 국악전공자들이 방송직이나, 작가, 기획자 등으로 직업의 다변화를 꾀하는 양상도 주목할 만하며,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렇다면, 음악의 내용으로 보는 국악의 현황은 어떤가? 여건이 어떠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음악 그 자체다. 국악의 내용은 충분히 만족스러운가? 아니다. 전통음악은 그대로 답습되기만 할 뿐, 새로운 창작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여기서 창작이란 기존 장르 안에서의 창작을 말한다. 예컨대, 국악 명곡인 수제천과 비슷한 편성과 분위기로 새로운 악곡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국악 명품 장르인 산조의 틀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새로운 산조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시나위, 풍물, 판소리, 민요, 가곡 등 모든 장르의 예술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창작을 익숙하게 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다. 국악의 여러 장르는 다 존재 이유가 있어서 형성된 것이고, 누대에 걸쳐 검증된 장르다. 기존 장르를 버려야만 새로운 곡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창작국악의 큰 갈래인 국악관현악은 어떠한가? 국악관현악곡은 안타깝게도,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예술적 감동을 거의 주지 못한다. 국악관현악단은 그 탄생에서부터 발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상식이다. 물론, 웅장한 사운드를 위해서 관현악곡을 써야할 수도 있다. 그럴때에도 국악기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해서 곡을 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지금대로라면, 국악관현악에서 국악 발전의 돌파구를 찾기는 어렵다. 현재 많은 인재들이 국악관현악단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국악관현악의 정체가 국악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일 수도 있다. 요즘 가장 활발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 소편성의 창작국악은 어떠한가? 소편성 창작국악은 다양하고 대중적 경쟁력이 있는 효율적인 장르임에도, 국악으로서의 정체성 부재와 완성도 미흡으로 대중의 지지를 충분히 얻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퓨젼국악'이 가장 큰 논쟁거리다. 퓨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화는 어떻게든 서로 섞이게 돼있다.문제는 섞는(섞이는) 방법이다. 오랜 세월동안 자연스럽게 섞인 음악은 오히려 예술성이 높아지지만(중남미 음악의 예), 음악의 원리를 모르고 섣불리 잘못 섞은 음악은 듣는 이에게 괴로움을 준다. 퓨젼이 '국악퓨젼'일 수 있으려면, 어떤 형태로 퓨젼을 하든 국악의 본질을 결코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퓨젼국악이라고 하는 곡들을 들어보면 전혀 국악의 요소가 들어가지 않은 음악들이 많다. 국악기를 썼다고 해서 국악의 요소가 들어간 거라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 음악의 본질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의 본질이 악기에 있지 않다는 것은 상식이다. 만약에 대금으로 뽕짝을 연주하면 그것이 국악인가, 뽕짝인가? 결론적으로, 국악을 둘러싼 제반 여건을 좋아지고 있는데, 국악은 좀처럼 우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형국이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잘못의 원인을 알고 해결방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앞서 국악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여건은 좋아지고 있는데 그것을 좀처럼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국악이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훌륭한 예술이 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 국악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요소가 국악계에는 너무 많다. 교육, 연구, 비평, 인습, 모두가 문제다. 국악교육의 문제 국악과 학생들 중에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부모의 강요로 국악을 전공하게 된 경우가 많다. 억지로 국악을 하게 된 학생들에게 음악에 대한 내적 욕구가 부족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초등학교 음악교육이 서양음악 위주로 돼있는 것도 국악에 소질이 있는 학생을 조기에 발견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중고교 국악교육이 입시 위주의 주입식 실기교육에 쏠려있는 것이 문제다. 이름있는 대학에 붙는 것만을 목표로 해서는 진정한 음악교육이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음악 교육이라면 기본적으로 음악가에게 필요한 철학, 미학, 인문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음악을 왜 하는지,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학생들이 많다. 전통음악에 관한 이론 교육도 부족하다. 악기 연주만 기계적으로 가르칠 뿐, 우리 음악의 원리와 미학, 장르의 특성 등에 대해서는 깊이 가르치지 않는다(못한다). 우리 전통음악의 음계, 선법, 장단, 시김새, 전조, 말붙임새 등에 관한 이론이 정립되어 있지 않고, 교육도 되지 않는다. 우리 토속민요에 관한 연구는 자료가 부족하지 않음에도 아직도 지지부진하다. 민속음악 전반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다. 반면에 서양음악 기초이론은 초등학교때부터 누구나 배우고, 피아노학원 등에서 과외로 더 배운다. 화성이론이 대표적이다. 연주자들의 경우, 창작교육이 전혀 안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연주자들은 악기 연주 외에 창작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음악가가 아닌 연주자만 양성하고 있는 것이다. 연주자도 넓은 의미의 음악가에 속하지만, 본질적으로 음악가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작곡과 연주가 분리된 서양고전음악계에서는 연주자를 음악가(Musican)라 하지 않고 해석자(Interpreter)라 한다고 한다. 예전의 우리 전통음악 명인들은 당연히 스스로 음악을 만들려고 했고, 만들 줄 알았다. 특히 독주곡은 작곡가보다 연주자들이 더 잘 만들 수 있다. 악기의 특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국악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주자들이 창작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는 현실이야말로 국악의 발전이 더딘 가장 큰 요인이다. 음악 감상교육 또한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세상에는 들어봐야 할 좋은 음악이 너무도 많은데, 학생들은 들어볼 기회도 없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학생시절에 음악을 다양하게 많이 들어야 음악에 대한 보편적 감수성이 생겨난다. 특히 우리 전통음악과 비교될 수 있는 타민족의 전통음악에 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다른 음악을 듣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음악의 미학과 원리를 모두 놓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창작을 하려고 하면 어려서부터 듣고 배워 익숙한 서양음악 어법으로 작곡을 하려고 든다. 국악 연구의 미흡 국악교육이 이토록 문제가 많은 것에는 국악이론 연구자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이론 연구가 잘 되어 있어야 학교에서 가르칠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국악 창작에 필요한 이론의 연구가 미흡해 보인다. 그 결과, 국악작곡과에도 국악작곡 기법에 관한 체계적인 커리큘럼이 마련돼 있지 않다. 간혹 연주자들이 작곡 공부를 하려고 할 때는 국악 작곡이론이 아닌 서양 작곡이론을 배우곤 한다. 논쟁을 회피하거나 무시하는 비학문적 풍토가 만연한 것도 문제다. 자신의 이론에 후배가 학술적인 이의를 제기하면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적으로 배척해버린다. 건전한 비판을 받아들여 자신의 이론을 수정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진 학자들을 국악이론계에서는 만나기 어렵다. 타민족 전통음악과의 비교연구도 부족하다. 다른 나라의 민족음악을 함께 연구함으로써 우리 음악에 대한 연구가 훨씬 잘될 수 있다. 외국 유학을 하고 온 학자들이 한국에서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국악 비평의 부재 국악에서 창작국악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국악 비평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국악비평은 '주례사 비평'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좋은 것만 쓰고 미흡하거나 잘못된 것은 지적하지 않는다. 다른 예술분야, 예컨대 문학이나 영화, 연극판에도 주례사비평이 더러 있지만 국악계만큼은 아니다. 비평의 본래 기능은 미흡한 것을 지적해줌으로써 더 좋은 작품을 만들게 하는데 있다. 흔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칭찬이 비판보다 효과가 좋기 때문에 칭찬을 주로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비평의 대상이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 있을 때나 통하는 말이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경우에는 주례사비평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다. 비평가가 비평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고 어울려 공존하려는 태도로는 비평다운 비평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비평이 비평답지 못한 데에는 국악인들이 유난히 비평을 수용하지 못하는 풍토가 있다. 비평에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풍토는 분명 전근대적인 것이다. 스스로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평가가 비평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허망한 일이다. 비평이 제대로 돼야만 작품들의 수준이 올라가고, 그래서 국악이 활성화되고, 그래야 비평가의 영역도 넓어진다. 객관적인 비평이 음악가들에게 분명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국악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비평가들이 노력을 해야 한다. 인습의 폐해 국악계 뿐 아니지만, 인맥의 굴레가 국악의 발전을 상당히 저해하고 있다. 특정 학교 출신이나 특정한 스승의 제자들이 세력을 형성해서 국악계의 변화를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위대한 인류 음악유산의 하나임에 분명한 우리의 산조를 예로 들어보자. 산조를 좋아하는 중견 연주자들에게 '왜 당신의 산조를 만들지 못합니까?"라고 물어보면, "에이~ 선생님들이 알면 무지하게 야단 쳐요. 어디서 건방지게 네 산조를 하냐고..." 이런 선생들 중에는 알고 보면 자기도 산조를 만들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진정한 명인들이라면 제자들에게도 "너 스스로의 산조를 만들어보라"고 용기를 주어야 마땅하다. 교수나 교사의 채용 과정에서도 능력이 아닌 다른 이유가 우선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지, 그밖에 이런저런 인습이 예술가들의 발목을 잡고 있지 않은지, 국악인들 스스로 자문해보아야 한다. 앞서 국악계의 상황과 국악 교육과 연구와 비평의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국악 창작에 촛점을 맞추어 그 문제점을 살펴보겠다. 국악으로서의 정체성 부족 국악계에서 발표되는 모든 음악들은 모두 '국악'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다. 작곡가든 연주가든 국악계에서 활동을 하는 이들이 만드는 음악은 국악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국악으로 발표되는 음악 중에는 국악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않은(또는 갖지 못한) 음악이 많다. 국악으로서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국악의 정체성은 당연히 전통 국악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전통 국악의 음계, 선법, 장단, 시김새, 말붙임새 등의 음악적 요소가 충분히 들어가 있어야 국악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 발표되는 국악계의 창작음악 중에는 이런 요소들이 거의 들어있지 않은 곡들이 많다. 이른바 퓨젼국악이라고 발표되는 곡들 중에도 퓨젼이 아니라 서양음악풍의 곡이 많다. 퓨젼국악이란 국악과 다른 음악이 섞인 것을 말할텐데, 국악이 전혀 섞이지 않았는데도 퓨젼국악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국악기 몇 개를 양악기와 섞어서 연주했다고 해서 퓨젼국악이라고 하는데, 이는 악기가 섞인 것을 음악이 섞인 것으로 혼동하는 것이다. 음악이 섞이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많은 갈래의 음악들이 서로 섞여서 새로운 음악들이 생겨난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발견한다. 우리 전통음악도 아시아 대륙을 비롯한 여러 음악과 섞인 결과물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랜 시간동안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이지, 짧은 시간에 인위적으로 섞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어떤 음악이 다른 음악과 섞이더라도 그 음악 자체의 본질이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들어온 역사적 과정은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었다. 군함과 대포를 앞세운 외세의 강요에 못이겨 억지로 받아들인 문화였고, 그래서 음악도 자연스러운 섞임의 과정이 아니라 외래음악이 전통음악을 밀어내는 형국이 되었다. 전통음악에서 파생된 산조, 판소리, 신민요 등이 음악시장의 한 자락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외래음악에 밀려 쇠퇴하였고 해방 후에는 서양 대중음악(팝음악)의 홍수로 더욱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우리 전통음악의 역사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이상 자세히 논하기는 어렵다. 다음 기회를 기약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전통음악이 외래음악과 좀처럼 쉽게 섞이는 음악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악기나 창법 등에서 외래음악과 많이 섞였다고 주장할 지도 모르겠으나, 음악의 본질을 보기 바란다. 오늘날 한국 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음악의 근원에 대해서도 별도의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다. 국악인들이 국악기로 굳이 연주하기도 쉽지 않은 서양악곡을 연주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국악기는 국악을 연주하는데 맞게 만들어져 있다. 음계도 그렇지만, 우리 음악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시김새(농현)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것이 국악기다. 국악기는 평균율 체계의 서양악곡에 맞지 않고 화음을 내기 어렵기 때문에, 국악기로 서양악곡을 연주하면 듣는 사람이 괴롭다. 서양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서양악기가 훨씬 낫다. 국악은 주로 5음계를 사용하고, 선법이라는 개념이 적용되는 대신 화성 개념은 없다. 반면에 근대 이후의 서양음악은 7음계를 주로 사용하고 화성이 중요한 반면, 선법의 개념은 없다. 결국 음악의 핵심요소인 음조직에 있어서 국악과 서양음악은 크게 다르다. 여기에 국악의 특징인 시김새가 서양음악에는 없어서, 국악과 서양음악은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국악기를 사용했더라도 7음계와 화성을 사용하고 시김새를 구사하지 못하면, 그 곡은 국악이 아니라 서양악곡이 된다. 새로운 국악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일찌기 퓨젼을 시도한 예는 아주 많다. 쉽게 김덕수패가 했던 사물놀이와 재즈의 퓨젼의 결과는 어떠한가? 김덕수패는 풍물 장단을 연주했고, 레드선 그룹은 선율을 담당했다. 그 결과는 이색적인 리듬의 재즈일 뿐이었다. 선율이 리듬에 앞서기 때문이다. 이런 퓨젼은 재즈에 우리 리듬을 빌려준 것일 뿐, 사물놀이 자체의 발전은 아니다. 퓨젼재즈일지언정 퓨젼사물놀이는 아닌 것이다. 사물놀이가 변화를 꾀하려면 전통 장단을 응용한 새로운 장단을 만들어내는 게 옳다. 선율을 넣고 싶다면 미국의 재즈선율이 아니라 우리 전통 태평소가락을 넣으면 된다. 퓨젼을 하더라도 우리 음악에 중심을 두어야지, 남의 음악에 중심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왜 국악인들이 서양음악에 경도되어 자꾸만 서양음악풍의 곡들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교육의 문제점에서 지적했듯, 서양음악이 더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음악을 만들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익숙한 서양음악이 나와버리는 것이다. 교육이나 일상적 음악환경이 그래서 중요하다. 어려서부터 의무적으로 자기네 전통음악을 배우는 나라도 많다. 창작 의욕의 부재 국악의 정체성 혼란보다 더 큰 문제는 작곡가를 제외한 국악인들이 창작을 하려는 생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악 연주자들은 그저 배운 대로 또는 악보 그려준 대로 연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전통음악의 보존이 목적인 국립국악원이라면 모를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다. 이것도 역시 작곡가와 연주자가 구분돼 있는 서양 고전음악계의 관행을 그대로 모방한 결과인 것같다. 하지만 국악에는 원래 작곡가가 따로 없었다. 옛 명인들은 모두 자기 음악을 만들 줄 알았다. 산조는 누가 작곡해준 것이 아니라 연주에 능한 명인들이 스스로 만든 것이다. 물론, 산조는 판소리와 시나위의 선율을 참조하여 독주곡으로 만든 것이지만, 어쨌든 스스로 창작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무슨 악기의 명인이란 소리를 들으려면 자신의 산조 하나쯤은 만들어야 한다. 산조를 싫어한다면 모를까, 자기 산조를 만들지 못한 사람은 결코 명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창작곡을 연주하고자 하는 연주자들이 대부분 작곡가에게 곡을 의뢰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작곡가들이라고 해서 모두 국악곡을 잘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작곡가들도 학교에서 전통음악의 원리와 미학에 대해 별로 배운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작곡가들은 학교에서 전통음악 작곡법보다 화성악 등 서양음악 이론과 작곡법을 더 많이 배운다. 서양작곡법은 체계회되어 있는 반면, 국악작곡법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작곡가들이 연주하는 악기는 피아노나 기타가 대부분이다. 이래저래 서양음악에 익숙한 것이다. 특히, 작곡가들은 국악 독주곡을 거의 만들지 못한다. 독주곡이라 화성을 쉽게 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연주자들이 스스로 독주곡을 만들어 연주해야 하는데, 그럴 생각이 있는 연주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작곡에 대한 오해 국악 창작의 방향을 이해하고 음악을 만들어보려고 해도 중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작곡이라고 해서 작곡가들이 하는 것을 흉내내려고 하다 보니 서양 화성악도 배워야 하고 그러다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특히 독주곡은 전혀 작곡가들을 흉내낼 필요가 없다. 악기 구사능력이 충분하다면 머리에 떠오르는 선율을 즉흥적으로 연주해 보는 것이 창작의 시작일 것이다. 실은 전통음악의 생명력은 즉흥연주에 있다. 우리 옛 명인들은 누구나 즉흥연주의 대가였을 것이다. 시나위는 원래 즉흥연주였고, 산조도 그런 배경에서 생겨나와 점차 일정한 틀을 갖추게 된 것이다. 연주자들이 곡을 만들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의 악기로 즉흥연주를 시도해볼 일이다. 전통음악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도나 페르시아(이란) 등의 전통음악가들은 즉흥연주 능력이 뛰어나다. 관객들도 명인들의 즉흥연주를 공연의 백미로 여기고 숨을 죽이고 즉흥연주를 경청한다. 우리도 옛날에는 그랬다. 그 멋진 전통이 전승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아마추어리즘의 만연 국악계는 일정한 울타리가 형성되어 있다. 넓지 않은 울타리다. 국악인들 스스로가 울타리를 형성하고 있고, 관객들도 울타리 안에서 논다. 그러다 보니 객관적 시각이 부족해지기 쉽다. 자기 만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곡을 만들고 연습을 해서 공연을 할 때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는 느낌이 부족하다.공연이 끝난 후에는 관객들이 어떻게 느꼈는지 크게 궁금해하지 않는다. 자신은 최선을 다 했다 해도 객관적으로 보면 수준에 못미치는 경우가 있는데 말이다. 국악비평가라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잘못된 점을 짚어주기보다는 대강 잘했다고 하고 만다. 그러니 음악가들은 자신들이 만든 음악의 수준이 어떤지, 연주의 수준이 어떤지, 객관적으로 알 수가 없다. 스스로 공연을 되돌아보고 국악 동호인들이 아닌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며 더 좋은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려 고민해야 할텐데, 남의 의견을 열심히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음악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프로 정신이 없으면 대강대강 해도 괜찮은 아마추어나 다름없을 것이다. 국악계 안에서는 그렇게 해도 자기가 최고인지 몰라도, 국악계 밖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국악의 여건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지만, 프로가 여건을 핑계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3회에 걸쳐 국악의 현황과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문제점을 직시한다면 해답은 저절로 나올 것이다. 국악의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국악계 전반에 혁신이 필요하다. 먼저, 국악교육 커리큘럼의 혁신이 필요하다. 악기연주 위주의 교육에서 음악에 대한 이해와 그에 기반한 음악창작 교육으로의 혁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에서의 국악이론 연구 풍토의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탁상에서 하는 학문이 아닌 국악 발전에 필요한 실용적인 학문이 필요하다. 아직도 많은 부분이 규명되지 않은 국악의 본질과 특성에 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수행하고 그 결과물을 기반으로 새로운 국악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어 시행해야 한다. 창작 의욕과 소질을 중시하는 쪽으로 국악 입시제도를 혁신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연주전공 입시에도 일정한 모티브를 주고 즉흥연주를 하게 함으로써 음악적 소질을 테스트할 수 있다. 대학 입시제도 하나만 바꿔도 교육 커리큘럼이 혁신될 것이다. 교수 채용이나 평가제도 역시 실력을 중시하는 객관적 평가방식이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기존 음악의 보존에만 치우친 인간문화재 제도도 개선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새로운 국악곡 생산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국악관현악단은 해체하는 것이 옳다. 대신, 10여 명 안팍의 복수 악단을 구성하여 악단마다 특성있는 새 국악을 만들어 연주하면 된다. 모든 악단은 자체적으로 곡을 만들 수 있어야 하며, 특히 독주곡은 그러하다.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은 즉시 스스로 창작하기를 시작하라. 청년 국악인들에게 권함 모든 사회분야가 그렇듯, 국악의 발전은 청년들에게 달렸다. 청년들이 국악 발전의 돌파구를 열어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권고사항들을 열거한다. 1. 전통음악에 관한 미학과 이론적 지식을 갖추라. 2. 전통음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내공을 쌓아라. 3. 전통에 기반한 새로운 음악 창작에 인생을 걸어라. 4. 음악가로서 철학적 기반과 인문교양을 쌓아라. 책읽기, 글쓰기, 토론에 익숙하라. 5. 인류의 음악유산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가져랴. 특히 아시아 대륙의 전통음악에 대해. 6. 잘못된 인습과 관행의 굴레를 벗어나라. 권위를 강조하는 스승은 좋은 스승이 아니다. 7. 보편적, 객관적 시각을 갖추려고 노력하라. 비평을 고맙게 여겨라. 8. 실용적이고 유연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라. 친구와 동료를 구별하라. 9.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라. 프로는 변명하지 않는다. 10. 1인 다역을 하라. 효율적인 생존전략이다. 마무리 지금까지 국악의 현황, 문제점, 그리고 해결방안을 제시해 보았다. 국악은 그동안 잊혀졌던 훌륭한 음악으로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으며, 국내외의 여건도 점점 좋아지고 있어, 앞으로 발전의 가능성이 아주 많다. 우리 전통음악은 세계 어느 나라 음악에도 뒤지지 않는 예술성과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 잘 보존하는 한편, 이를 기반으로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대인들에게 통할 수 있는 새로운 국악을 만들어내는 것이야 말로 국악인들이 인생을 걸고 할 만한 일이다. 이를 위해 국악인들 스스로 국악의 현황과 문제점을 직시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스스로 과감한 혁신과 노력을 해야 한다. 국악의 밝은 미래는 혁신과 노력을 해내는 사람에게 활짝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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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0-02
  • ‘광대인생 60주년 공연’ 여는 사물놀이 1인자 김덕수
    ▲ 한국적 신명을 전 세계에 전파해온 '문화 전도사' 김덕수씨가 광대 인생 60주년 기념공연 '흥'을 내달 27·28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린다. '우리 시대의 광대'로 불리는 김씨가 어릴 적 공연 모습이 담긴 낡은 사진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사진=서동일 기자 흑백사진 속 꼬마는 장구를 품에 끼고 웃고 있다. "1958년, 여섯살 때입니다. 그때 이미 전 프로였어요. 하하." 그보다 한 해 전. 그러니까 1957년 9월 9일 추석 다음날, 그의 남사당 풍물패 데뷔식. 다섯살 꼬마 덕수는 충남 조치원 시끌벅적 난장 한복판에 섰다. 그의 두 발은 어른의 양어깨를 딛고 있었고 이 어른의 아래엔 어른 한 명이 더 있었다. 3m가 족히 넘는 높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덕수는 "와, 내가 최고다" 혼자 탄성을 질렀다. 장터에 모인 이들은 고개 들어 저만치 우뚝 선 덕수를 보며 "우와" 함성을 쏟아냈다. "그 맛에 광대를 한 겁니다. 사람들의 박수소리에 인생을 맡긴 거예요." --> 관련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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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19
  • 영원한 자유인 최우칠
    최우칠은 텔레비전에 자주 나온다. 그러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늘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누가 소리를 하면 옆에서 장구나 북 치는 것이 최우칠이고 기악산조를 할 때에도 역시 옆에서 장구를 친다. 얼굴을 정면으로 화면에 비치는 일은 거의 없다. 늘 옆모습만 비친다. 그가 텔레비전에 나오기 시작한 것은 30년 전쯤 되니까 오랫동안 그렇게 방송을 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KBS.TV의 국악한마당 프로에 주로 나오지만 과거에는 송해가 진행하는 전국노래자랑에서도 국악반주를 담당했었다. 그는 그런 활동을 하면서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데 없을 정도로 많은 곳을 다녔고 별별 재미있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봤다. 그런 일을 꼭 무슨 일이라고 생각하여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재미있고 즐거우니까 계속 그런 일을 생활로 알고 살아왔다. 수입이나 돈에 대한 생각도 고정된 것이 없다. 열심히 활동하면 얼마간의 돈이 생기고 생기는 돈은 감사히 생각하고 쓴다. 분수에 넘게 막 쓰지도 않지만 짠돌이처럼 먹을 것 안 먹고 쓸 것 안 쓰는 그런 타입은 아니다. 술을 좋아해 거의 매일 술을 마시지만 어울리는 사람들과 즐겁게 담소하며 술을 마신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누구와 술을 마셔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고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술주정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우칠은 1952년생이다. 군산에서 꽤 넉넉히 사는 집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국악을 좋아해서 국악원에 놀러 가실 때는 늘 우칠을 데리고 다녔다. 아버지는 군산국악원 명예회장을 할 정도로 국악인들과 가까이 지냈고 무슨 행사라도 있게 되면 집에서는 국악인들이 함께 하는 잔치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당시 서울에서 임춘앵이나 박보아씨 같은 국악인들이 여성국극단을 데리고 군산에 오면 우칠의 집에서 한 판 벌이는 때도 많았는데 그럴 때면 우칠의 아버지는 북을 치기도 하고 단가를 하기도 하며 놀았다. 그런 분위기에 그런 경험을 많이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최우칠도 그의 아버지처럼 북치고 단가하고 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었다. 그런데 언제인가 그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칠을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보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우칠의 어머니 역시 국악을 좋아해서 유명한 고수였던 김득수와 오빠 동생 하는 의남매를 맺어 친하게 지냈다. 우칠은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용산중·고를 다녔는데 어머니가 군산으로 내려가게 되면 김득수선생 집에서 밥 먹고 다녔다. 김득수의 아들 은도와 늘 어울려 놀고 함께 자기도 하니까 자연 학교에 대한 관심보다는 국악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국악예술학교에 다니는 김덕수·김무경·이철주·김영재 등과 어울리게 되고 연상되는 서용석 등과도 술을 마시며 국악 전공자들과 함께하는 생활을 했다. 그런 모습을 본 김득수선생이 어차피 국악을 좋아하니까 제대로 국악을 배워봐라 하여 김득수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북도 배우며 국악공부를 본격적으로 해 나갔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 국악에 푹 빠져 있었던 최우칠도 나이가 차서 군대에 가게 됐다. 군 생활에서는 운전병 노릇을 했는데 그 운전하는 기술이 제대 후 국악인들과 더 가까운 관계를 맺도록 해 주었다. 제대한 다음 조상현명창의 차를 운전하며 같이 다니게 되었다. 조상현이 MBC의 내 강산 우리노래에 주역으로 출연할 때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하고 일이 없을 때에는 조상현명창에게 소리를 배우기도 했다. 또 오갑순이 방송활동과 공연활동을 활발히 할 때에도 한 동안 오갑순의 차를 운전했다. 운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할 때는 장구도 처 주니까 자연히 일행이 되어 국악인으로 살아가는 생활이 되었던 것이다. 최우칠은 지금 국악계에서 누구보다 바쁘게 많은 일을 하며 살아가지만 그 생활이 그냥 물 흐르듯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하는 일도 별로 없다. 본인이 국악을 좋아하고 국악인들을 좋아하니까 국악인 모두에게 좋은 일이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을 꾸미게 된다. 그래서 만든 것이 국악노조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 노조가 많이 만들어지는 ‘90년대 최우칠은 국악인들에게도 노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술 마시는 자리에서 국악노조에 대해 얘기하면 호응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래서 노조를 만들었지만 각자 자유롭게 활동하는 국악인들이라 무슨 회비를 받을 수도 없고 하여 최우칠은 그냥 본인이 노조위원장이 되고 회비도 본인이 납부하면서 한국노총산하 국악노조를 만들고 위원장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악방송이 계속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졌던 프로도 없어지는 경우가 있어 방송국이 국악프로를 없애지 말아달라는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종묘의 팔각정에서 궐기대회를 했는데 이성림·조상현·김영임·김뻑국·이은관 등을 비롯한 많은 국악인들이 모여 머리에 謹弔라는 띠를 두르고 한 나절동안 방송국을 성토하는 대회를 했었다. 그는 지금 국악노조위원장 외에 (사)한국국악협회 이사로 있으면서 국악협회의 각종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악제나 서울 국악제를 하면 으레 연출을 맡아하고 국악경연대회 등을 해도 역시 전체 진행을 맡아 중요한 일을 한다. 더러 지방자치단체에서 무슨 큰 국악공연을 할 때에도 초청하면 가서 연주도 하고 전체 연출도 하곤 한다. 최우칠은 오랜 세월 KBS.TV의 국악프로를 하면서 PD인 이상업·최공섭을 도와 많은 일을 했는데 그러면서 확실하게 배운 것이 연출하는 일이다. 워낙 많은 사례를 반복하여 경험했고 또 직접 해볼 기회도 많았기 때문에 지금은 국악공연연출을 하는데 무서움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최우칠은 국악노조위원장으로 (사)한국국악협회 이사로 국악계를 위해 활동하지만 주된 일은 KBS민속합주단 단장으로서의 역할이다. 매주 수요일이면 KBS 국악한마당을 녹화하는데 각양각색의 국악프로그램에 반주를 담당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프로그램의 책임자가 바뀌면 프로의 경향도 달라지니까 거기에 적응하여 완성도가 높은 내용이 되게 하자면 역시 반주단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래서 녹화하는 일이나 공연하는 일은 늘 스릴을 느끼게 되고 그런 것이 최우칠에게는 무척 재미있는 일이 된다. 녹화나 공연 마치면 서로 어울려 한 잔 마시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고 그럴 때 재담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일도 재미있는 일이다. 최우칠은 지금 국악계 전체로 볼 때도 재담(와이당)을 제일 잘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는 국악이 좋아서 국악을 하고 국악인들이 좋아 서로 어울리고 많은 사람들이 웃는 것이 좋아 재담을 하며 산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가는 곳마다 환영받고 서로 만나면 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365일 술을 마시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술의 종류가 소주에서 막걸리로 바뀌었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달라진 것은 체중인데 깡말랐던 체구가 좀 볼륨이 생길정도가 되었다. 나이도 있고 하니 그런 체격이 더 중후해 보여 좋다는 생각도 든다. 본인이 좋아서 하는 국악이지만 그것이 국악계를 위해 좋은 일이면 더 좋은 것이니까 최우칠 파이팅을 외쳐주고 싶다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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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04
  • 사물놀이
    우리는 훌륭한 전통 음악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즉흥곡인 시나위를 비롯해 여기서 독주곡 형태로 파생한 산조가 그런 예입니다. 그러나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이름이 나 있는 우리 음악은 다름 아닌 사물놀이입니다. 사물놀이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한 음악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엄청난 음량과 강한 비트에서 나오는 역동감 때문에 듣는 사람은 신명의 경지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축구장이 넓어도 사물놀이 한 팀만 있으면 한국 응원단은 다른 나라 응원단을 제칠 수 있습니다. 사물놀이가 내는 소리의 다이내믹함과 강도를 다른 나라의 악기가 따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풍물 연주의 모습. 사물놀이는 풍물에서 유래했으나 구성과 형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사물놀이의 탄생 사물놀이를 두고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내용은 과거에 다 있던 것이지만 사물놀이가 이런 형식으로 태어난 것은 1978년의 일이랍니다. 사물놀이는 농민들이 하던 풍물에서 유래했습니다. 풍물패의 긴 대열은 크게 ‘앞치배’와 ‘뒤치배’ 등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때 앞치배란 꽹과리, 소고, 장구, 북 등과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말하고 뒤치배는 양반이나 각설이 등의 복장을 하고 춤을 추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물놀이는 앞치배에서 4개의 악기를 빼서 새롭게 구성한 음악입니다. 4개의 악기란 다름 아닌 꽹과리(쇠), 장구, 북, 징을 말합니다. 그리고 풍물은 모두 서서 연주하고 현란한 춤이나 다른 개인기들이 동원되는 것에 비해 사물놀이는 4개의 악기를 가지고 4명(혹은 여럿이)이 앉아서 풍물 가락을 연주 합니다. 그래서 사물놀이는 ‘앉은반’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립니다. 풍물놀이 가락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여 탄생 사물놀이는 왜 이렇게 외양이 바뀌었을까요? 여기에는 현재 한국 사물놀이의 대표 상징처럼 되어 있는 김덕수씨와 그의 동료였던 김용배, 최태현, 이종대씨의 활약이 컸습니다. 이들은 남사당패의 후예들로서 70년대 대학에 불었던 탈춤 부흥 운동에 부응해 과거의 풍물 가락을 살리면서 현대화하자는 데에 의견을 모읍니다. 쉽게 말해 풍물을 현대인들이 접근하기 편하게 바꾸자는 것이었죠. 풍물은 과거 농경 사회에는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현대 도시산업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들은 이 풍물을 대폭 축소시켜 가장 중요한 악기라 할 수 있는 4개의 악기만 추려내어 실내, 즉 극장으로 끌어들입니다. 연주하는 형태도 앉아서 하는 것으로 바꾸었으니 더 실내에 적합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리메이크’해서 연주하던 중 이들은 당시 ‘공간사’라는 한국 최고의 건축설계 회사를 이끌고 있던 김수근씨와의 인연으로 드디어 사물놀이 첫 연주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이들을 눈여겨보던 김수근씨가 1978년 2월 공간사랑의 소극장에서 발표할 수 있게끔 배려를 해준 겁니다. 당시 왔던 사람들은 공연이 끝난 뒤 처음 접한 사물 장단의 현란함과 역동성에 말을 잊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때에 ‘사물놀이’라는 이름이 바로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이 이름은 민속학자인 심우성씨가 지어준 것이라고 하더군요. 원래 사물은 절에서 쓰는 용어로 북, 종, 목어, 운판을 지칭하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전통음악에는 없던 사물놀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세계적인 음악인 사물놀이는 이렇게 아주 최근에 만들어진 새로운 전통음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민의 역사와 함께해온 4가지 악기 그러면 사물놀이의 특징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물놀이에 이용되는 네 악기 가운데 꽹과리는 천둥을 상징하고 장구는 비를, 북은 구름을, 징은 바람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해석이 언제 생긴 것인지 확실히 모르지만 악기 소리가 자연 현상을 나타낸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연과의 친연성을 강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물놀이의 진짜 특징은 이 음악이 어떤 음악보다도 한민족이 갖고 있는 신명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김덕수 씨의 말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그는 이 사물놀이가 단순히 전통 타악에 국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물놀이는 우리 민족의 피 속에 흐르는 유전자의 음악적 표현이자 현대 한국의 총체적 에너지라고 믿었습니다. 사물놀이에 사용되는 4가지 악기들은 실로 우리 서민들과 역사를 같이 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는 이 사물이 없는 마을이 없었습니다. 이 악기들은, 일을 할 때에는 노동의 악기였고 풍년이 들면 축제의 악기였으며 마을굿을 할 때에는 종교적인 역할도 했습니다. 게다가 전쟁 때에는 군악으로도 쓰였다고 하더군요. 이것은 풍물 때 입는 옷이나 가락의 명칭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풍물패들의 옷이 조선 군사들의 옷과 비슷하게 생겼지요? 풍물에는 상모돌리기와 같은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이 순서에서는 상모꾼이 긴 끈이 달린 모자를 쓰고 나와 그 끈과 같이 춤을 추는데 김덕수씨의 말에 따르면 바로 이 상모꾼의 복장이 ‘전립’이라는 군사복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전국의 풍물 가락을 보면 그 명칭에 일자진이나 천자진, 오방진과 같은 군사용어가 등장한다고 하네요. 무아경에 빠지게 하는 신명의 가락 이러한 사물놀이가 연주하는 곡으로 들어가면 꽤 전문적이어서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예를 들어 ‘삼도풍물 가락’이나 ‘비나리’, ‘설장구 가락’ 등은 사물놀이의 유명한 레퍼토리인데 용어들이 많이 낯섭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삼도풍물 가락인데, 이것은 ‘웃다리’, 그러니까 충청, 경기 지방의 풍물과 호남, 영남의 풍물 가락을 모아 재구성한 연주곡입니다. 이외에도 매우 다양한 연주곡들이 있는데 이 사물놀이 연주의 핵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무아경, 즉 엑스타시(ecstasy)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주자들은 연주에 몰두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무아경 혹은 황홀경에 빠져 들게 됩니다. 그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연주자들은 바로 이 맛에 힘든지도 모르고 연주하는 데에 전력을 다한다고 합니다. 이때 연주자들은 다양한 리듬을 치밀하면서도 변화무쌍하게 구사해서 듣는 이가 리듬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듭니다. 연주자가 이렇게 연신 신명의 가락을 뱉어내면 관객들도 간접적이나마 무아경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도 사물놀이 연주를 들을 때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천천히 기운이 상승되다 어느 시점에서 정점으로 치닫는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 사물놀이는 계속해서 변신을 꾀하고 있습니다. 여러 장르의 음악과 협연하여 다양한 퓨전 음악을 만들기도 합니다만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난타와 같은 새로운 음악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난타는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것처럼 영국에서 유래한 스톰프(stomp) 등의 공연 형식을 따랐지만 리듬에는 사물놀이의 그것이 많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난타가 공전의 히트를 한 것은 사물놀이의 한국적인 장단이 들어가서 가능하게 된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사물놀이가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일지 궁금해집니다. 글∙사진∙그림 최준식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였다. 한국문화와 인간의식 발달에 관심이 많으며 대표저서로는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등이 있다. --> 네이버캐스트 자료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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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03
  • 세계로 퍼져가는 농악과 사물놀이
    1. 농악이라고 하는 음악장르 농악은 그 명칭이 “農(농사농) 樂(풍류악)” 두 글자로 된 농악(農樂)이어서 음악의 한 갈래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농악을 접할 수 있는 경우는 오늘날 농촌의 현장에서보다 민속예능이 행해지는 행사장인 경우가 더 많게 되었다. 2002년에도 제43회 전국민속예술축제가 충주의 탄금대 잔디마당에서 열렸었는데 그런 곳에 가 보면 농악소리는 거의 모든 출연 팀들의 연희과정에서 들을 수 있다. ‘금과 들소리’(전북)나 ‘정이 고을 여름 들소리’(제주) 같은 농사과정에서 부르는 농요를 부르는 팀도 농악대를 앞세우고 나와서 노래 사이사이에 농악을 치고, 강릉 사천 ‘하평 답교놀이’(강원)나 ‘당정마을 지신밟기’(대구) 또는 ‘계족산 기우제’(대전) 같은 의식과 관련되는 행사에도 농악대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천 ‘청단놀음’(경북)이나 ‘북청사자놀음’(함남) 같은 가면극에도 농악대는 등장하고 ‘강강술래’(전남)나 ‘월월이청청’(경북) 같은 부녀자들의 놀이에도 농악은 빠지지 않았다. 물론 판굿으로 벌이는 ‘부산농악’이나 ‘광주 지산농악’은 더 본격적인 농악의 대형을 갖추어 멋진 농악공연 한판을 벌이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민속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민속축제의 현장에서만 보드라도 농악의 기능은 아주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사를 짓는 현장에서 들노래를 부르면서 일할 때에도 농악을 쓰고 정월 대보름이나 정초 무렵에 하는 답교놀이나 지신밟기 또는 기우제 같은 마을의 공동행사에도 농악을 쓴다. 줄다리기 같은 행사에는 양쪽 편이 다 농악대를 앞세우고 입장도 하고 응원도 하기 때문에 두 패의 농악대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공연용의 농악으로 판굿이라는 농악을 할 때면 50여명의 많은 인원이 나와 각종 진법과 놀이를 벌이며 한 판의 농악을 하게 된다. 이로 미루어 보면 농악은 농사일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두레농악>도 있고 마을의 당제나 지신밟기 등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의식용 농악>도 있고 각종 민속놀이에 보조적으로 사용하고 <반주용 농악>도 있고 완전히 한 판 농악의 음악과 놀이를 함께 보여주는 판굿이라 하는 <공연용의 농악>의 농악도 있다. 민속예술을 연행하는 공연 팀들이 등장하고 퇴장하고 한 과정 한 과정을 진행할 때 계속 농악을 사용하기 때문에 행진용의 농악도 있는 셈이다. 정말 농악의 용도야말로 그 갈래를 짓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많이 쓰인다. 농악의 용도가 이처럼 다양하기 때문에 그런 용도에 따른 농악대의 편성도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간단하게 편성한다 하드라도 꽹가리․징․장구․북이 빠지는 예는 없다. 반드시 네 가지 악기는 사용하게 되어있다. 각 악기의 인원수도 형편에 따라서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최소한의 인원으로 구성하더라도 꽹가리는 한 두 개, 징은 하나, 장구나 북도 한 두 개쯤으로 편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농악을 공연용으로 하는 <판굿>인 경우는 편성이 50명 정도의 대 편성이고 악기의 인원이나 소고 잽이 포수․양반․각시 등의 잡색들 수도 여러 명으로 편성하게 된다. 그리고 농악의 지역별 특징에 따라 편성의 내용도 다르게 되어있다. 농악은 한문 식의 용어이고 풍물․풍장․매구·굿 등 순 우리말 용어도 많이 쓰인다. “웃다리풍물”이라는 용어에서 보듯이 풍물이라는 용어는 대전 이북의 중부지방에서 주로 쓰는 용어이고 “풍장 친다.” “굿 친다.”는 말은 호남지역에서 많이 쓰는 용어이다. 그래서 호남의 농악은 우도농악 좌도농악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우도굿 좌도굿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 “매구 친다.”는 말은 영남지역에서 많이 쓰는 용어이다. 그러니까 통칭으로 농악이라고 하는 것을 풍물이나 풍장 매구 등으로도 부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요즘은 풍물놀이란 말이 가장 많이 퍼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무슨 풍물패라 부르기도 하고 풍물놀이 경연대회라는 행사도 하고 있다. 그러니까 “풍장패” “매구경연대회” 같은 말이 사용되지 않는 것을 보면 <풍물>이란 말이 앞으로도 널리 쓰이는 용어가 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앞에서도 농악의 기능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농촌의 현장을 생각하면 농악이 사용되는 경우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에서 정초에 윷놀이 같은 것을 하고 놀 때에도 흥을 돋우기 위하여 농악을 사용할 수 있고 정월 보름 무렵에 하는 지신밟기나 달집태우기를 할 때에는 물론 농악이 중요하게 사용된다. 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나 당산제를 지낼 때에는 농악이 의식용 음악으로 엄숙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농사철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두레를 짜서 10여명이나 20여명이 함께 논에 모를 심으러 가게 되는데 그럴 때에 농기를 앞세운 일꾼들은 농악(길군악)을 치면서 일터로 가고, 또 돌아 올 때에도 농악을 치면서 돌아온다. 일터에서는 일을 한참 한 다음 참을 먹거나 막걸리를 마시게 되는데 그럴 때에도 풍장을 치면서 한 바탕 여흥을 하고 다시 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모심기나 김매기를 끝내고 마을에서 축제라도 벌이는 날이면 술 취한 마을 사람들이 누구나 참여하여 농악을 치면서 흥겹게 어울려 춤추며 논다. 그러니까 농악은 농촌생활의 많은 부분에 사용되었고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이나 놀이에 있어서는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전승되는 농악은 그런 생활음악으로서의 농악보다는 전문성이 강한 <판굿>이 주류를 이루고 걸립패나 남사당들이 하던 농악 등이 새로운 형태로 변하면서 현대에 적응하고 있다. 특히 각 학교에서 농악대를 만들어 육성할 경우 전주나 이리 정읍 등지에서는 우도농악을 남원이나 임실 등지에서는 좌도농악을 가르치고 김천에서는 김천농악을 충청도에서는 충청농악이라고 할 수 있는 웃다리풍물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경남의 삼천포농악이나 강원도 강릉의 강릉농악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있어서 그 지역의 몇몇 학교에서 전수하고 있다. 때문에 생활 속의 농촌 농악은 퇴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겠지만 판굿으로 벌이는 공연용의 농악은 학교의 농악대 육성이나 문화재제도를 통하여 잘 전승되리라고 생각한다. 2. 판소리와 농악의 큰 지도 나는 자주 얘기한다. 음악은 문화의 한 부분이어서 생활방식과 관련한 문화가 다르면 음악도 달라진다고.. 우리나라는 땅덩이는 크지 않아도 지방에 따라 사투리도 독특하게 발달하고 음식도 다양하게 발달되어있다. 그런데 음악의 기초형태인 노래는 철저히 각 지방의 사투리와 관계를 가지고 발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도민요, 경기민요, 남도민요, 동부민요, 제주민요 등의 민요 권으로 나누어 민요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고 무가(巫歌) 역시 민요를 바탕으로 발달하는 것이어서 지방에 따라 무가의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무악권을 설정하여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최근 어떤 학술대회에서 '중고제 판소리'를 일종의 고제(古制)판소리처럼 생각하여 그것이 옛날 식 판소리였기 때문에 전승이 끊어진 것처럼 말하는 학자를 보았는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음악도 지방에 따라 다르게 발달하기 때문에 음악의 특징을 공유하는 지역을 묶어서 하나의 음악 권으로 설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판소리에 있어서 동편제라는 말은 전라도 동쪽 지역의 판소리가 선율 됨됨이나 창법 등이 다른 지역과 다르고 명창들의 사사계보가 뚜렷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동편제의 지역은 전라도 남원을 중심으로 운봉, 순창, 구례, 곡성 등지와 경상도의 함양, 진주, 하동 등지에서 전승되던 소리이다. 이 지역은 농악으로 보면 좌도농악이 발달한 지역과 일맥상통한다. 좌도 농악 역시 충남 금산에서부터 남원, 임실, 곡성, 구례 등지에서 발달한 농악들인데 동편제 판소리가 경상도 쪽 문화와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발달한 것처럼 좌도농악 역시 경상도 쪽의 문화와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발달했다고 보아도 된다. 말하자면 인접지역의 문화와 무엇인가가 섞이면서 발달하는 것이 그 지역의 문화이기 때문에 동편제 판소리나 좌도 농악은 모두 경상도와 인접한 지역에서 발달한 것이어서 일정량의 경상도 문화와 영향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서편제 판소리는 우도 농악과 거의 같은 지역에서 발달한 판소리이다. 전라도 이리, 정읍, 나주, 광주, 영광, 보성 등 평야지대와 서해안 지대를 잇는 넓은 지역이 서편제 판소리가 발달하고 우도 농악이 전승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이야말로 전라도 특유의 문화가 다양하게 발달한 지역이어서 판소리도 전라도 '육자배기'나 '진도아리랑'에서 나타나는 남도 계면조의 선율이 많고 가자 붙임도 엇붙임이나 기교적인 붙임새가 발달하였다. 우도 농악 역시 가락이 화려하고 설장고 가락이나 꽹가리의 리듬이 부드러우면서도 화려하게 발달하였는데 그 역시 좌도 농악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전라도 전 지역을 문화적으로 본다면 판소리의 동편제와 농악의 좌도 농악이 발달한 경상도와 인접한 지리산 쪽과 서편제 판소리와 우도 농악이 발달한 중부 서남해안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대전 이북지역의 농악은 소위 말하는 웃다리 농악지역이다.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이 이 문화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지역은 사투리도 전라도와 다를 뿐 아니라 민요나 무가(巫歌)도 다르다. 그래서인지 농악도 다르게 발달되었는데 이 지역이 판소리로 따지면 중고제(中古制)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중고제 명창들의 출신지만 보더라도 김성옥(金成玉), 김정근(金定根) 부자(父子)가 충청도 강경 출신이고 김정근의 아들 김창룡(金昌龍, 1872~1943)은 서천에서 태어났다. 심정순(1873~1937)과 심상건(1889~1965)은 숙질(淑姪) 간인데 심정순은 판소리의 음반을 여러 장 남긴 중고제의 명창이었고 심상건은 가야금 병창을 잘하는 음악가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서산출신이다. 1902년 협율사가 생기면서 창극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일제시대 풍채 좋고 소리 잘하는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동백(李東伯 1867~1950)도 충청도 비인 출신이다. 순조, 헌종, 철종 때 이름을 떨쳤던 염계달 명창은 경기도 여주 출신이라 하고 역시 같은 시기 활동했던 고수관명창은 충청도 해미 출신이라고 한다(조선창극사). 따지고 보면 중고제를 잘 불렀다고 전해지는 대부분의 명창들은 충청도나 경기도 출신이다. 때문에 중고제라고 하는 판소리의 음악 스타일은 전라도와 문화가 다른 충청도 경기도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판소리이지 신식 판소리에 대칭 되는 고제 판소리의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판소리는 크게 호남은 중심으로 하는 동편제와 서편제가 있고 충청도와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중고제가 있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을 농악과 연결하여 조감하면 좌도 농악은 동편제 판소리 지역과 관련이 있고 우도 농악은 서편제 판소리 전승지역과 관계가 있고 웃다리 농악은 중고제 판소리 지역과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음악의 권역을 크게 구분하고 이해하면 음악이 문화의 한 부분으로 다른 문화와 관련을 가지고 발달한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문화에 대하여 그냥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의 각 부문을 연관 지으면서 횡적으로 또 종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3. 공연용 음악으로 거듭난 사물놀이 1978년 김덕수패에 의하여 시작된 ‘사물놀이’는 새로운 음악이다. 생활의 일부로 존재했던 옛날의 풍물이 아니고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새로운 기능을 가진 새로운 형태의 새로운 내용을 가진 새로운 음악이라는 것이다. 사물놀이에는 옛날 풍물의 요소가 많다. 그러나 옛 것은 아니다.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난 공연용의 풍물이고 일종의 창작품에 해당하는 것이다. 내가 사물놀이를 기존의 풍물과 구별하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뜻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농악과 사물놀이를 같은 것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고 또 두 가지를 구별하는 기준이나 안목을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를 자주 접하기 때문이다. 사물놀이는 두 가지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전통음악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작곡의 입장이다. 전통음악의 입장에서 보면 기존의 농악을 현재의 상황에 맞게 <현재화>한 것이 사물놀이라는 설명이 가능하고 작곡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데 전통음악의 언어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작곡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결과는 비슷하지만 보는 입장은 다른 것이다. 전통음악은 대부분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적응하여 새롭게 변하면서 생명력을 이어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풍물은 야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나절쯤을 단위로 하여 한 판씩 벌이던 것이다. 공연처럼 하는 ‘판굿’이라 하드라도 진법놀이를 하든지 농사풀이를 하든지 좀 느슨하게 한 과정 한 과정 해 나가게 되어있다. 그래서 흥청대는 멋도 있고 발림이나 춤을 보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상황은 그런 농악을 즐길 시간이나 공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또 우리네의 감수성이 변하여 그런 농악에서 농악다움의 멋이나 흥을 느낄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김덕수를 비롯한 네 명의 젊은이들은 농악을 하나의 음악작품처럼 감상할 수 있도록 실내라는 공간에서 일정한 시간에 농악을 감상할 수 있도록 기존의 농악가락을 이용하면서 훨씬 밀도 있게 압축하여 음악회 형식의 농악판을 만들어 본 것이다. 서서 발림을 하고 각종 놀이를 벌이며 하던 농악을 앉아서 두드리는 소리만 듣도록 하는 음악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변화도 <전통의 현재화>라는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농악의 <현재화>한 한 형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진보적으로 보면 사물놀이는 새로 만든 새로운 공연물이다. 말하자면 새로 작곡된 새 작품이라는 말이다. 다만 작곡방법이 전통적인 방법이어서 음악의 구성요소나 연행방법이 기존의 농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대로 농악이 하나의 놀이로서 음악․무용․연극․진법 등의 요소가 다 함께 있는 것인데 비해 사물놀이는 음악위주로 되어있다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전통음악어법으로 작곡한 새 작품이라고 하는 것이다. 새 작품의 형태도 악보에 그려진 서양 식 작품처럼 모든 음이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흐름은 정해져 있지만 각 악기의 가락은 연주자가 자기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 내도록 <틀을 짠>작품인 것이다. 어느 것이나 실내용의 음악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음악 연주의 효과가 극대화되도록 음량이나 템포를 훨씬 밀도 있게 죄면서 긴장감을 더해가서 절정에 이르도록 하는데 청중을 몰아의 상태인 엑스타시의 상태로까지 몰고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처음 사물놀이를 접한 청소년들도 한번 연주로 사물놀이를 좋아하게 되고 외국의 타악 연주자들도 사물놀이를 최고의 타악앙상불로 평가하여 오늘날 사물놀이는 세계적인 음악이 되었다. 1995년 당시 외국인으로 사물놀이를 배운 사람이 10000명에 이르렀고 매년 200셋트이상의 사물놀이 악기가 수출되는 통계가 나올 정도였다. 사물놀이의 파급효과는 정말 굉장한 것이었다. 초․중․고등학교에 사물놀이패가 등장하고 직업적으로 사물놀이를 연주하는 단체의 수도 상당히 많게 되었다. 그 만큼 사물놀이의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진짜 풍물 즉 농악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학생들이 많지만 사물놀이를 모르는 학생들은 없을 정도로 사물놀이가 풍물을 대신하는 존재가 되어버리기도 하였다. 또 사물놀이를 가깝게 생각하는 학생들은 그것이 국악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자연 국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니까 사물놀이가 국악으로 취향을 옮겨주는 매개역할도 하게 되었다. 사물놀이의 긍정적 파급효과는 너무나 엄청나서 일일이 열거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런데도 사물놀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일부 인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물놀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대개 사물놀이 때문에 기존 농악을 버렸다는 것이고 농악의 참 멋이 사라져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물놀이는 음악적인 효과를 노리다 보니까 빠르고 기교적인 가락에 치중한 나머지 흐드러지는 멋이나 저정거리는 맛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여유와 죄고 푸는 흐름이나 연극적인 재미도 퇴색해 버렸다. 허 허 웃고 한 잔 마시며 즐기는 풍물이 아니라 숨을 죽이고 긴장하며 감상하는 한 단위의 음악작품이 되어버렸다. 사물놀이는 그렇게 새로 태어난 새로운 공연물이기 때문이다. 사물놀이가 인기를 끌고 대단한 기세로 퍼져나가니까 사물놀이를 활용한 새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83년 8월에 발표된 강준일 작곡의 -피아노와 사물(四物)을 위한 모음곡-“열두거리”는 굿의 열두거리를 연상케하는 작품으로 1)Prologue, 2)굿거리, 3)잦은 가락, 4)진쇠, 5)소릿가락, 6)청배가락, 7)부정놀이, 8)도살풀이, 9)터 벌림, 10)엇중모리, 11)진쇠, 12)올림채, 13)당악 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86년 박범훈이 작곡한 “사물놀이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신모듬”은 3악장으로 구성되어있는데 김덕수패 사물놀이가 연주하는 음악을 그대로 살리면서 국악관현악과 어울리도록 만든 작품이다. 사물놀이는 국악관현악이 있어서 한층 부드러워지고 국악관현악은 사물놀이와 조우하면서 훨씬 신나는 음악을 만들어 간다. 지휘자의 통제를 받으며 연주하는 식이 아니라 지휘자가 음악을 타고 춤을 추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음악 그 자체가 대단한 역동성을 가지고 스스로 흘러가고 있다. 사물놀이의 힘이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김덕수패 사물놀이는 초창기부터 외국의 음악가들과 즉흥연주를 통해 만나는 improvization을 자주 시도했었다. 특히 외국에 가서 공연 할 경우 그 곳의 유명한 연주자들과 같은 무대에서 함께 연주하는 그런 음악행위를 자주 했다. 한국에서도 째즈그룹 “레드 선”과 함께 연주회를 여러 번 했는데 안숙선이 수궁가 한 대목을 노래하고 김덕수패 사물놀이와 “레드 선”이 함께 연주한 즉흥음악은 연주효과도 좋았고 그 연주의 실황음반도 호평을 받았다. 김덕수패 사물놀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면서 어떤 악기, 어느 나라 음악인들과도 만나면서 크로스오버라고도 하고 퓨젼이라고도 하는 그런 음악활동을 많이 하였다. 김덕수패 사물놀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성공하자 많은 사물놀이 팀이 만들어져서 직업적인 사물놀이 팀으로 활동하게 된다. 국립국악원에서는 김용배를 끌어들여 사물놀이팀을 만들었고, 사설 단체로도 ‘두레패’, ‘진쇠’, ‘두드락’ 등 많은 직업 사물놀이 연주단체가 출범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후 사물놀이는 대부분의 국악단체에 만들어지게 되고 각급 학교에도 사물놀이를 가르치고 팀을 만드는 일이 많아져서 사물놀이가 옛날의 농악을 대신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수백 수천의 사물놀이 팀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 사물놀이를 활용한 새로운 음악이나 작품들도 계속 나오고 있는 중이다. 4. 사물놀이 황제 김덕수 펠레가 축구의 황제라면 김덕수(1952년 생)는 사물놀이의 황제이다. 그가 이끄는 사물놀이는 가는 곳마다 청중을 열광케 하고 음악가와 문화계인사들에게 충격을 주면서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음악을 가지고 세계무대를 강타한 김덕수는 이미 세계적인 음반회사와 공연기획 회사들이 받들어 모시는 음악가가 되었고 수100차에 달하는 해외활동으로 많은 애호가와 사물놀이 제자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나는 1981년 6월 이들의 유네스코 회관 초청 연주회의 평을 쓰면서 “이 팀이야말로 헤비급 세계 챔피언에의 잠재력을 12분 가지고 있는 권투선수와 같다”고 하면서 세계무대에서 각광 받을 날을 예고 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들은 그 이듬해 6월 일본 순회공연을 시작으로 10월과 11월에는 미국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가는 곳마다 청중을 뒤집어지게 하였고 그래서 일거에 세계적인 그룹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특히 댈라스에서 열렸던 “세계타악인협회 ‘82년 대회(PASIC-'82)"에서의 연주는 사물놀이의 개성미와 높은 수준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듣는 이들로 하여금 한국음악뿐만 아니라 한국문화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김덕수패 사물놀이는 세계 곳곳의 유명연주회장에서 뿐만 아니라 현해탄의 선상이나 뮌핸의 무기창고, 시부야거리, 뉴욕의 센트럴파크, 예루살렘 통곡의 벽, 심지어는 북한 땅에서도 판을 벌였고 그들을 매료시켜 사물놀이의 소리를 잊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세계를 누비며 사물을 두드리고 사물을 가르친다. 김덕수는 해외에서 사물놀이 캠프를 열 때마다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그리고 나서 “하나아 두울 세엣 네엣”을 외우면서 우리 식으로 숨쉬기를 하도록 가르친다. 그렇게 배운 사람들을 사물노리안(Samulnorian)이라고 하는데 지금 사물노리안은 일본 미국 유럽 등 세계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연간 한국에서 나가는 사물놀이 악기만 해도 200세트이상이고 10000여명의 사물노리안이 한국의 악기를 가지고 사물놀이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음반도 ‘83년 미국에서 나오기 시작하여 지금은 폴리그램,EMI,CBS,BBC등 세계적인 음반회사들이 다투어 CD와 LD를 제작하여 수 십장의 앨범이 나왔다. 정말 한국음악의 세계화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세계화인가를 본때 있게 보여주는 본보기들이다. 사물놀이의 영향력은 가히 핵폭탄에 비교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78년 김덕수 패 사물놀이는 등장하자마자 파문이 일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파문은 파도로 변하여 전국의 청소년들을 사로잡았고 연주장마다 구름 떼 같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여파로 수십 개의 직업 사물놀이패가 생기고 수백 개의 사물놀이 팀이 창단되었다. 웬만한 직장과 학교 등에도 사물놀이가 생겨나고 매년 벌이는 사물놀이 힘겨루기 세계대회에는 200여 개의 팀이 출전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기세라 아니할 수 없다. 사물놀이는 우리의 전통에 바탕을 둔 새로운 공연물이다. 우리의 창조정신이 온고이지신(溫古而知新)이었듯 이들의 창조행위도 철저히 전통을 학습(學習)하고 적공(積供)하여 통달한 다음 새로운 상황에 맞는 현재의 전통음악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전통의 상황이란 자연의 형태와 같이 우리의 생활 속에 열린 상태로 조금은 느슨하게 있던 것이다. 풍물을 치는 사람은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고 장소나 용도도 다양하고 시간도 일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풍물놀이를 가지고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악기편성으로 일정한 조건하에서 감상하도록 감상용의 공연음악을 만든 것이다. 이것은 분명 전통의 풍물놀이와는 다른 창작작품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짠 김덕수는 작곡가이다. 또 그는 이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이고, 팀을 이끌어 가는 리-더이자 지휘자이며, 각종 공연을 기획 연출하는 기획자 연출자이다. 옛날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냥 명인(名人)이지만 요즘 식으로 따지면 작곡가이고, 연주가이고, 지휘자이고, 연출자이고, 기획자이며 또한 교육자란 말이다. 김덕수가 이렇게 큰일을 하고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남사당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그의 재능과 폭발하는 힘은 모두 남사당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의 아버지 김문학은 김덕수가 5살때 남사당에 합류시켜 양도일 등 당대 최고 명인들에게 기예를 배우게 했다. 그래서 그는 7살 되던 해에 전국농악경연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받았고 12살에는 동경올림픽 문화행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국악예술학교(1971년 졸)에서 국악전반에 대하여 교육을 받았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철저하게 남사당의 엘리트 과정을 밟은 셈이다. 종합예인집단인 남사당은 척박한 전통사회의 토양에서도 들풀처럼 그들의 예능을 무기로 살아왔다. 살아 남기 위해서는 항상 팔리는 예능, 우수한 기술, 대중적이고 현재성이 강한 무엇을 해야했다. 그 동안 김덕수가 황량한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개척의 꿈을 키우고 영토를 넓혀 갈 수 있었던 것도 다 남사당 기질 덕분이다. 그는 아무리 어려움이 와도 조금도 물러 설 줄 모른다. 초창기 멤버 김덕수 김용배 이강수 최종실 중 김용배가 떨어져나가는 큰 충격이 왔을 때에도 잠시만 슬퍼하고 휘청거렸을 뿐 곧장 강민석을 영입하여 전보다 못지않은 앙상블을 이루어 내는 강인함을 보였다. 남사당의 후예 김덕수는 이제 세계 사물놀이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우리의 토속문화를 세련시켜 이 시대의 우리문화를 만들었고, 이 시대의 한국 창작예술계에 좋은 창작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의 창작방법은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새것을 내 놓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철저히 익혀서 저절로 새것이 나오도록 하는 전통적인 방법이다. 수제천이나 산조를 능가하는 작품을 쓴 작곡가가 없는 국악계에 김덕수는 농악보다 더 밀도 있고 훌륭한 사물놀이를 작곡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다 남사당에서 물려받은 전통문화유산을 올바로 계승한 때문이다. 김덕수는 그러한 기질 때문에 세계적인 외국음악가들과 어울리거나 100명 넘는 큰 오케스트라와 협연 할 때에도 “기죽어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그다. 한참 같이 연주를 하다가 보면 저절로 그들이 우리 사물놀이의 굿거리나 덩덕궁이 장단 안으로 싸여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의 세계적인 인기는 대단하다. 그를 스승으로 떠받드는 제자들만 해도 미국 캐나다에 70여명 유-럽에 50여명 일본에 약 5000여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그 수는 각 지부와 지역캠프를 통해서 계속 늘어나고 있다. 또 국내의 제자도 수백 명에 이르고 이들이 결성한 사물놀이 팀도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언제나 겸손하고 남사당의 후예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가 외국 공연장에서 돼지머리를 삶아 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도, 그들에게 한국말로 구호를 하게 하는 것도 또 그들에게 한국악기를 사용하게 하는 것도 다 그 나름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숱한 해외공연에서도 우리음악을 헐값에 넘긴 적이 없고 상업적인 제의를 받아드린 적도 없다. 그는 각국의 최고가는 공연장, 최상의 귀가 모이는 곳을 선택했고 일류 음악가들과 함께 연주하는 고집을 부렸다. 꽉 짜인 스케줄로 해외 연주를 하고 돌아온 김덕수는 말한다. “서양의 재즈음악에 열광하던 사람들도 우리의 풍물가락 앞에서는 경탄을 아끼지 않았어요. 남사당의 진정한 예인으로 남기 위해 가락을 정리 기록할 생각입니다. 이제 겨우 우리가락에 눈을 떠가는 것 같습니다”라고. 매년 10만Km이상 연주 여행을 하며 우리가락의 세계화에 심혈을 기울이는 김덕수 그의 말은 겸손하지만 그의 기개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사물놀이 음악의 창시자 김덕수 그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고,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것은 바로 溫古而知新의 작곡방법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는 단순한 기능인이 아니다. 남사당에 뿌리를 둔 뚜렷한 예술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국악계의 지도자이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그가 필요로 하는 새 음악 현재의 공연물을 연출하며 창조적인 삶을 살아 갈 것이다.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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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31
  • 노름마치 "사물놀이 한단계 더 발전시킬 것"
    --> 노름마치 다음카페 가기 첫 해외 단독투어 갖는 국악그룹 ‘노름마치’사물놀이에 노래, 전통 랩 더한 퓨전국악 연주 전통 타악그룹 하면 김덕수의 사물놀이패만 있는 줄 알지만 이름 없는 실력파들이 꽤 많다. 그중의 한 사람이 퓨전국악그룹 ‘노름마치’ 리더이자 예술감독인 김주홍(39·사진)씨다. 벌써 17년째 노름마치를 이끌고 있는 김씨는 타악계의 실력자로 대접받는다. 노름마치는 ‘놀다’의 놀음(노름)과 ‘마치다’의 마침(마치)의 합성어. 노름마치는 사물놀이에 노래, 입으로 내는 장단소리인 ‘전통 랩’을 더한 퓨전국악을 들려준다.“1993년 젊은 국악인 몇몇이 의기투합해 노름마치를 만들었습니다. 인적 네트워크가 부족해 지금처럼 이름이 알려지고 단독 공연을 하기까지 꽤 오래 걸렸습니다. 다른 국악인의 공연 반주가 주였지만 ‘노름마치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올 수 있게 강하면서도 신명나게 했습니다.”서울 동교동 지하 1층에 위치한 연습실은 계란판 등 원시적 방음장치가 고작이다. 툭하면 이웃 주민의 항의를 받는 등 여건은 열악하지만 이호원·오현주·박준영·황영권 등 멤버들은 크게 바뀌지 않고 함께하고 있다. 노름마치가 빛을 발한 건 2005년 개봉한 영화 ‘왕의 남자’였다. 감우성·이준기·정진영 등 주연 배우에게 3개월 동안 사물 악기를 가르쳤다.“저희는 달랑 3초밖에 안 나오지만 영화 촬영 전에 관객이 많이 모이게 해달라고 제가 비나리를 했는데 다행히도 1000만 관객이 넘었어요.”그 후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노름마치는 국내는 물론 해외 무대에 서는 기회도 많아졌다. 지난해 초에는 북미 지역에서 가장 큰 아트마켓인 APAP에 초청돼 쇼케이스를 펼쳤고, 아시아에서 가장 큰 월드뮤직 페스티벌인 레인포레스트 월드뮤직 페스티벌에도 초청됐다. 해외 언론들은 ‘폭풍 같은 에너지로 무대를 휘어잡다’, ‘스펙터클한 타악 연주, 샤머니즘적인 노래, 그리고 애크러배틱한 춤사위’ 등의 표현을 써가며 호평했다.“김덕수 사물놀이패 덕분에 해외에서도 한국의 전통 사물놀이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를 비롯한 2세대가 할 일은 전통 사물놀이를 계승하는 것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정신을 전파하고 우리의 가치를 외국 시장에 팔 수 있는 그룹이 되고 싶습니다.”노름마치는 이달과 다음달 창단 후 첫 단독 해외투어인 ‘이스트 윈드, 솔 비트’에 나선다. 그동안 해외 페스티벌에 초청돼 종종 공연을 펼쳤지만 단독 투어는 이번이 처음이다. (02)323-2257 2010-07-26 세계일보 조정진 기자 -->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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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인소식
    2012-08-22
  • 전통무용의 대중적 진화 꿈꾸는 춤꾼.. 서울시 무용단장 임이조
    “전통춤으로 ‘백조의 호수’ … 욕먹어도 도전한다” 임이조(林洱調·61)는 춤꾼이다. 무형문화재 승무 전수조교이며, 살풀이춤 이수자다. 인간문화재 이매방(85) 선생에게서 40년 가까이 춤을 배웠다. 근래에 임이조는 한량무를 더 많이 춘다. 원래는 한량·각시·주모·스님, 네 명이 등장하는 이야기극이다. 그런데 임이조는 이것을 혼자 춘다. 1인극으로 그가 새로이 창작했다.임이조는 서울시무용단장이다. 전통춤꾼으로서 이 자리에 오른 것은 그가 처음이라 한다. 무용단의 대표 레퍼토리는 ‘백조의 호수’다. 지난해에 임 단장이 만들었다. 차이콥스키 음악에 맞춰 전통 춤사위가 섞인 현대무용을 한다. 임이조표 ‘백조의 호수’는 올 11월 상하이에 수출된다. 국제아트페스티벌에 공식 초청을 받았다. 80명의 스태프를 인솔해 나간다. 여러 면에서 임이조의 춤 인생은 ‘파격’이다. 그는 “전통무용도 대중과 같이 호흡해야 한다”면서 “사람들이 욕을 하거나 말거나 계속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중앙일보 글=성시윤 기자 ● ‘백조의 호수’부터 얘기해보죠. 차이콥스키 음악과 전통 춤사위로 만든 무용극이라고요.“네. 음악만 차이콥스키 음악이고요. 한국 창작무용이라고 보시면 돼요. 버선끝, 손끝, 발끝 동작은 한국 춤사위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한국 춤은 어느 음악에든지 다 출 수 있는 춤사위예요.”● 가장 먼저 배운 춤은 발레라면서요.  “여섯 살 때 발레를 배웠어요. 그래서 발레나 클래식을 좋아하죠. 하지만 ‘백조의 호수’는 편안한 마음에서 만든 작품은 아니에요. 많은 질타를 각오하고 만들었습니다.”● ‘백조의 호수’는 어떻게 만들게 됐나요.  “사실 심청이, 춘향이, 황진이라든지 아주 좋은 소재가 우리에게 많아요. 그런데 이걸 가지고 외국에 가면 쉽게 어필이 안 된다는 겁니다. 서양 스토리를 들고 나간다는 게 참 안타깝죠. 하지만 외국인들도 자기네들이 쉽게 느낄 수 있고, 빨리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원하는 것 같아요. ”● 이해하기 쉬운 작품을 하시는 거군요.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해야죠. 구경하고 나오면서도 ‘저게 무슨 작품이야’ 하고 관객이 이해를 못하는 작품도 많거든요. 그런 작품을 보면 작가 혼자서만 추상적인 생각을 한 것이에요. 관객들에게 쉽게 어필되는 작품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객석에서 봤을 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아무튼 춤을 아주 일찍 시작하셨네요. “저희 어머니가 현대무용을 하셨어요. 결혼하시고 춤을 접으셨죠. ‘딸을 낳으면 무용을 시켜야지’ 하셨대요. 저 데리고 춤도 많이 보러 다니셨는데, 공연 보고 나면 제가 흉내를 그렇게 잘 냈대요. 그래서 송범(1926∼2007) 선생님께 발레를 배우게 하셨어요. 국립무용단장을 아주 오랫동안 하신 분이죠.” ● 집안이 유복하셨나 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진 호강하고 살았죠. 저희 아버지가 미국문화원 공보실장도 하셨으니까요. 열한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모가 저를 맡아 키우셨어요. 제가 가자마자 아버지가 금방 사업에 실패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뒷받침 없이 춤을 배웠어요. 그래서 고생 많이 했죠.”그의 춤 창작은 일찌감치 시작됐다. 초등학교 5학년 학예회 때 같은 반 여자친구의 초립동이 옷을 빌려 입고 즉흥 춤을 췄다. 중학교 1학년 때 나간 ‘충남예술제’에선 남방춤을 역시 즉흥적으로 췄다.“그런 인연으로 자꾸 춤을 추게 되더라고요. 저희 어머니를 아는 분이 공짜로 발레도 가르쳐주셨고요.”열여덟 살에 그는 은방초, 김소희 같은 국악계의 거물을 만났다. 그리고 열아홉에 이매방을 만났다. “이매방 선생님이 승무를 추시는데, 소름이 쫙 끼쳤어요. 한국무용이란 게 저렇게 절제된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구나. 저게 한국무용이구나 싶었죠. 춤을 깨닫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어요.”그 인연이 이제 40여 년이 됐다. 그는 춤으로 자수성가를 했다. 단국대 체육과를 다닐 때에는 휴학을 세 차례 했다. 형편이 어려워, 때론 외국 공연에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 바람에 대학을 10년 넘게 다녔다. 그러고선 30대 중반이던 85년에 자신의 무용단(‘선’ 무용단)을 만들었다.● 무용단을 일찍 만드셨네요.  “그때 제가 방송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임이조’ 하면 대한민국에서 방송을 제일 많이 하는 무용수였어요. 방송 활동을 하다 보니 단체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무용단을 만들었죠.”● 젊은 나이에 무용단 만든 것에 대해 주위 선배들은 뭐라 하셨나요.  “은방초 선생님이 저를 보고 ‘냄비 뚜껑이 끓지도 않고 넘었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저를 굉장히 영악하게 여기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춤에 미쳐 가지고 판 벌이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발표회를 많이 하고 빚도 많이 졌어요. 뭐, 공연을 정말 무한정 했죠. 저를 알리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방송도 열심히 나갔고요.”● 왜 그렇게 본인을 알려야 했나요.  “내가 조건이 안 되니까요. 무슨 ‘대학 교수’도 아니고, 집안 뒷받침도 없으니까요. 나를 알려야 사람들이 나를 쓰죠. 나를 모르는데 누가 나를 찾겠습니까. 그래서 방송을 많이 했던 거죠. 그러면서 명창, 명인들이랑 많이 친해졌죠. 그 덕에 제 춤도 많이 좋아졌어요. 생음악에 하다 보니 춤의 맛이 발전한 거예요. 이생강 선생님 같은 분들이랑 같이 공연을 했으니까요. 저는 녹음 테이프에 춤을 춘 적이 거의 없었어요. 아무튼 그래서 ‘임이조’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거죠. 그게 제 노력이었어요. 지금 서울시무용단장 하면서 어느 정도 관객이 모이는 것도 ‘임이조라는 이름 때문에 모인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춤꾼으로 춤을 추는 것과 무용단장을 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죠.  “그렇습니다. 서울시무용단장 중에 임기 못 채우고 나간 분들도 많아요. 제가 보니까 ‘희생’이 중요해요. 단장으로서 권위적으로 행동하기보다 희생을 먼저 해야 해요. 정기공연 할 때면 제 아내가 백몇십 명 반찬을 차려 갖고 와요. 우리 집사람이 음식점도 했던 사람이라 반찬을 열몇 가지 해서 뷔페식으로 차려 가지고 와요. 그러면 전부 다 감동들을 하잖아요. 또 저희 서울시무용단이 ‘찾아가는 공연’ 같은 것을 많이 하는데요. 제가 단원들한테 그렇게 얘기합니다. ‘무대가 좋네, 나쁘네, 이런 얘기 하지 마라. 내가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기도하는 마음으로 춤을 추면 관객들이 좋은 무대, 귀한 무대로 인정을 한다’고요.”● 그럼에도 전통춤이 인기가 많지 않습니다.  “우선 지루하다는 거예요. 전통춤은 자주 보고, 가까이 앉아서 봐야 신도 나고 흥도 납니다. 무대 멀리서 우리 춤을 볼 때는 아주 느리지 않습니까. 서양무용처럼 동작이 역동적이지도 않고요. 게다가 우리 춤은 웬만큼 잘 추지 않으면 감동을 못 줘요. 호흡에서, 내면에서 나오는 춤이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통춤도 어필할 수 있는 소재와 흥미 본위로 가야 해요. 그럼 ‘진정한 예술이 나올 수 있을까’ 걱정스럽긴 하죠. 순수하게 예술만 한다면 관객이 많이 오나, 적게 오나를 따지지 말아야 해요. 그런데 저는 단장으로서 관객 숫자로 평가를 받거든요. 그러니 대중과 호흡을 같이해야 해요. ‘백조의 호수’를 만든 것도 어떻게 보면 제가 쇼맨십을 보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전통춤 하는 사람인데, 하필이면 왜 그걸 했겠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욕을 하거나 말거나 그런 도전도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1인극 한량무, ‘백조의 호수’ 등은 이런 생각에서 나왔다. 이런 그를 스승 이매방 선생은 어떻게 볼까. 자기에게서 배운 춤을 제자들이 변형하는 것을 싫어한다. 전통을 고집한다. 그런데 임이조는 스승에게 배운 승무나 살풀이춤보다는 자신이 창작한 한량무를 더 많이 춰왔다. ● 스승과 사이는 어떻습니까. “선생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란 존재가 있죠. 선생님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지금도 겁이 나요. 선생님이 계시기 때문에 경거망동을 좀 덜 하게 되지 않나 싶어요. 예인이 지켜야 할 것도 많이 말씀해주셨고요. 그래서 따뜻한 연이 많아요. 여러 가지 희로애락 속에서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제 머릿속을 떠나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제 집사람도 선생님이 소개해 주셨고요. 별것 아닌 것 같고 노하셔서 섭섭할 때도 있지만, 마음에 그런 게 남진 않습니다.”● 한량무를 추는 것에 대해 스승께선 뭐라 하시나요.  “제가 78년부터 한량무를 췄어요. 그래서 이제 ‘임이조’ 하면 사람들이 한량무를 떠올려요. 선생님은 ‘승무, 살풀이 전수자가 돼가지고서 한량무를 춘다’고 막 뭐라 하셔요. 그래서 요즘은 제가 승무도 많이 추고 있습니다. 호호호.”● 한량은 ‘돈 잘 쓰고 잘 노는 남자’ 아닌가요.  “제가 추구하는 한량은 풍류를 알고, 멋을 아는 남자예요. 벼슬이나 관직에 구애 받지 않고 초월해서 멋을 즐기는 남자요.”임이조의 지향점은 ‘한량’인가 보다. 그가 손수 지은 이름 ‘임이조’에서도 그게 엿보인다.“본명은 임규흥이에요. 임이조는 예명이고요. 제가 사주를 좀 보는데요. 제 사주에 물이 부족하대요. 그래서 물결 이(<6D31>)자와 고를 조(調)자로 예명을 지었어요. 물결이 고르면 춤 추는 사람에게 좋지 않겠나 해서요.”● 선생님 사주가 어떤데요.  “글쎄요. 돈복은 없고요. 도 닦는 팔자더라고요. 남에게 봉사해야 하고요. 그러면서 명예를 좇기보다는 많은 보람을 남겨야 하는 운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임이조 단장은 전통예술의 대중화에 자신의 운명을 건 듯하다. 대중에게 친숙한 춤꾼이며, 예술단체를 이끌고 있으니 그에게 딱 맞는 일이다. 그는 10년째 자신의 공연을 기획해주는 강현준(43) 유민공연기획 대표와 함께 지난 7월 ‘부지화(不知畵)’라는 이름의 전통예술 공연 브랜드도 선보였다. 시는 알지만 그림은 도통 모르던 문인들을 꼬집는 문구 ‘백일소소 부지화(白日昭昭 不知畵, 밝고 밝은 대낮에 그림을 알지 못한다)’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춤, 소리, 음악이 어우러진 공연을 일년에 두어 차례 선보인다고 한다. 임 단장의 ‘파격’이 전통예술의 대중화에 어떻게 기여할지 궁금해진다.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뭐 뻔하지 않겠어요. 제게 가장 중요한 건 춤이죠. 제가 태어날 때부터 숙명적으로 춤을 추게끔 돼 있었어요. 어머니 태몽에 호랑나비가 나왔다니까요. 나비가 춤 아니에요. 저는 죽는 날까지도 마음속으로 춤으로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춤은 내 삶 자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친에게서 춤을 이어받았고, 죽는 날까지 제가 춤을 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요. 춤을 못 춘다 하더라도 후진을 위해서 할 일이 있으니까요.” j 테일 >> “김덕수 그 친구, 이렇게 유명해질 줄 몰랐죠”임이조는 일찍이 초등학교 5학년 방학 때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전통예술을 하던 오춘광이란 사람이 소년소녀들로 구성한 패거리의 단원이 되면서다.“지방 극장에서 공연을 했죠. 그 시절만 해도 극장에서 영화 한 편 상영하고 국악 공연을 했어요. 그러고 나서 또 영화를 상영하고요.”비슷한 또래의 초등학생 다섯 명이 모인 공연단이었다. ‘다섯 명의 천재 소년소녀’라는 이름이었다. 공연을 하고 나면 출연료로 500원, 그리고 공연이 늦어지면 야참비로 200원을 받았다 한다. 멤버 중에는 사물놀이로 유명한 김덕수도 포함돼 있었다.“저보다 두 살인가 아래였어요. 빵빵하게 생긴 친구가 장구 하나는 참 야물딱지게 친다 싶었죠. 국악인들이 ‘김덕수’ ‘김덕수’ 하는데 나중에 보니 그 친구였어요. 그렇게 유명해질 줄은 그때 생각도 못 했죠.”--> 중앙일보 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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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인소식
    2012-08-21

공연소식 검색결과

국악동영상 검색결과

국악인프로필 검색결과

  • 김한복 - 사물놀이
    ☆ 김한복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사물놀이, 징 수련과정ㅣ학력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강민석 선생 사사 세한대학교 대학원 한국음악과 석사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음악 이수자 활동 경력 크라운해태 동락연희단 대표 수상 경력 1994년 다섯번째 사물놀이겨루기 한마당 대통령상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H3AGYtmR3k8 [삼도설장고가락 - 사물광대 (김한복 신찬선 박안지 장현진)] 기타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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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나,다
    2017-11-16
  • 이동주 - 사물놀이
    ☆ 이동주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사물놀이, 소고 수련과정ㅣ학력 황재기, 이금조, 김용래, 김덕수, 최종실 선생 사사 대불대학교 전통연희과 졸업 세한대학교 대학원 졸업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이수자 활동 경력 김덕수 사물놀이패 (1990년 1월~2010년 2월) 인천부평전통연희단 세한대학교 전통연희학과 겸임교원 수상 경력 세계사물놀이겨루기한마당 대통령상 홈페이지ㅣSNS ▶https://ko-kr.facebook.com/sogo.dj [페이스북]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2mHT0pfnnCI [채상소고] 기타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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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아,자,차
    2017-10-24
  • 남기문 - 풍물, 사물놀이
    ☆ 남기문 프로필 1958년생 사진 전공ㅣ분야 풍물, 사물놀이 (장구, 징) 수련과정ㅣ학력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전수조교 (1990년 지정) 활동 경력 1964년 남사당놀이 아동회원으로 전국 순회공연 참가 1973년 ~ 1976년 리틀엔젤스 단원으로 세계 50여 개국 순회공연 참가1985년 국립국악원 사물놀이 단원 입사 현재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지도단원 수상 경력 홈페이지ㅣSNS ▶ http://www.gugak.go.kr [국립국악원 홈페이지] 동영상 보기 ▶ https://youtu.be/GSiNo0QCBzg [태평소와 사물놀이 - 한세현, 이홍구, 박은하, 남기문, 최병삼] 기타 1986년 작고한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김용배 자리에 남기문 명인이 함께 하고 있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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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나,다
    2017-06-04
  • 김윤아 - 판소리
    ☆ 김윤아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판소리 수련과정ㅣ학력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이수자 활동 경력 김덕수 사물놀이 한울림 단원 역임창작공연단 ‘유쾌한 악당’ 멤버 수상 경력 제26회 KBS국악대경연 판소리 장원 제10회 서편제보성소리 일반부 판소리부문 대상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ZDOPet3MUG8 [심청가ㆍ심청이 물에 빠지는 대목] 기타 초등6학년부터 본격적으로 판소리, 가야금, 가야금병창, 타악, 무용 등의 수업을 폭넓게 받았다.유쾌한악당 대표인 장구연주가 김기태와 부부이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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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나,다
    2017-05-29
  • 김리혜 - 한국무용가
    ☆ 김리혜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한국무용 수련과정ㅣ학력 일본 중앙대학교 독문학과 졸업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석사 졸업 국가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 활동 경력 김리혜 춤터 대표 수상 경력 1992년 제3회 한국국악대경연의 무용부문 금상 2002년 제3회 한일문화교류기금상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 https://youtu.be/5ARqrznhTOQ [국립국악원 수요춤전 - 산조춤, 살풀이춤, 도당 등] 기타 재일교포 출신으로 5살 때부터 무용을 배웠고 1981년 한국춤을 익히기 위해 단신 귀국해 이매방 선생 문하에 입문하여 해외출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살풀이춤과 승무의 이수자가 되었다. 1982년 사물놀이의 시조 '김덕수' 명인과 ‘한국의 집’에서 제1호 전통 혼례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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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나,다
    2017-05-14
  • 한상욱 - 사물놀이
    ☆ 한상욱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사물놀이 수련과정ㅣ학력 이광수. 김덕수. 최종실. 강민석 선생 사사 세한대 전통연희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전남무형문화재 제18호 양태옥류 진도북놀이 이수자 활동 경력 현재 국립남도국악원 기악단 총무 수상 경력 세계사물놀이겨루기 대통령상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기타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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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타,파,하
    2016-12-21
  • 김복만 - 풍물 쇠재비
    ☆ 김복만 프로필 (충남 대덕) 사진 전공ㅣ분야 풍물, 타악, 꽹과리 수련과정ㅣ학력 남사당 송순갑 선생에게서 웃다리 농악과 7채 가락 사사 유지화 선생에게서 우도농악부포놀음 사사 전사섭 선생에게서 설장구놀이 사사 신탄진 중앙중과 유성농고 (현 유성생명과학고) 졸업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이수자 활동 경력 1985년 마당패 뜬쇠 창단 멤버1990년 김덕수 선생 등과 함께 (사)한울림 창단1991년 사물놀이 ‘진쇠’ 창단 한예종, 원광디지털대, 중앙대, 서울예술대 출강(사)한국연희단체총연합회 풍물분과 위원장 수상 경력 전주대사습놀이 농악부문 장원 수상대전한밭농악경연대회 대상 및 (개인상)수상KBS국악경연대회 사물놀이부 금상 수상네번째 사물놀이겨루기 대통령상 수상경기민속예술제 대상 (이담 농악) 수상 스물해 세계사물놀이 대회 일반부 대통령상 지도 등 다수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 https://youtu.be/0w_2nf05W3o [도당굿 - 김복만, 윤용준, 전성희, 최영호, 이준형] 기타 초등학교 2학년 때 상모돌리기부터 시작해 4학년 때 처음 꽹과리를 잡았으며 중고교시절에 농악부 장학생으로 활동했다. 국악계에서 '꽹과리 일인자' 로 불리며 이종덕(전북 무형문화재 제43호 방짜유기장)에게 꽹과리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악인프로필
    • 가,나,다
    2016-09-10
  • 박종호 - 고수, 판소리
    ☆ 박종호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판소리, 판소리 고법 수련과정ㅣ학력 조용안 선생 사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졸업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12호 판소리 수궁가 전수조교 활동 경력 한울림예술단 단원 역임현재 공연예술앙상블 '더늠' 대표 수상 경력 6번째 세계사물놀이 겨루기 한마당 대통령상제2회 박동진명창 경연대회 판소리 일반부 장원 (국회의장상)제13회 전국고수대회 명고부 대상 (국무총리상) 2016 제36회 전국고수대회 대명고수부 대상 (대통령상)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 https://youtu.be/pe0BUhdAo6w [토끼이야기 - 김덕수 (장구) + 박종호 (소리)] 기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적벽가)의 예능보유자 이셨던 故박봉술 명창의 조카이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12호 판소리(수궁가) 예능보유자 故박복남 명창의 자제로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소리공부를 하였으며 소리뿐만 아니라, 판소리고법, 사물놀이, 무속음악 등 우리음악 전반에 걸쳐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으며 판소리꾼 박미선의 동생이고 고수 박종훈의 형이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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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29
  • 박천지 - 지휘, 타악연주가
    ☆ 박천지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타악연주, 지휘 수련과정ㅣ학력 이수영, 김덕수, 이광수, 장덕화 (타악), 박범훈 (작곡,지휘) 선생 사사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 작곡전공 졸업 및 동대학원 지휘전공 수료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악사) 이수자 활동 경력 퓨전밴드 우주낙타 음악감독 역임율화 국악관현악단 지휘자 역임 국립국악관현악단 타악수석 역임 국립극장 문화동반자 프로젝트 음악감독 및 지휘 동국대학교, 중앙대학교 출강 현재 전주시립국악단 상임 지휘자 수상 경력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 http://youtu.be/Oeu2nPTtn64 [박동욱 구성 '천지연(天志延)' - 타악 '박안지, 박천지, 연제호'] 기타 연극,무용 등의 다양한 장르와 협업하며 얻어진 음악적 성과들을 전통 타악기의 창작곡에 담아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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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12
  • 문일상 - 타악연주가
    ☆ 문일상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타악연주 수련과정ㅣ학력 최종실, 김덕수, 유지화, 채향순, 한승석 선생 사사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타악연희과 졸업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수료 활동 경력 육군군악대 강사 역임 현재 전통창작 타악그룹 '유소' 대표 수상 경력 제29회 전주대사습 전국대회 농악부 장원 2008 KBS국악대경연 풍물부문 장원 제7회 전국국악대전 농악부문 대상 홈페이지ㅣSNS ▶ http://cafe.naver.com/theuso [유소 네이버 카페] 동영상 보기 ▶ http://youtu.be/P4U-o2x8SQA [점고 - 유소 타악콘서트] 기타 유소는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타악연희과를 졸업한 국악인 7명이 모여 결성한 국악 타악 전문그룹이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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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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