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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로 퍼져가는 농악과 사물놀이
    1. 농악이라고 하는 음악장르 농악은 그 명칭이 “農(농사농) 樂(풍류악)” 두 글자로 된 농악(農樂)이어서 음악의 한 갈래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농악을 접할 수 있는 경우는 오늘날 농촌의 현장에서보다 민속예능이 행해지는 행사장인 경우가 더 많게 되었다. 2002년에도 제43회 전국민속예술축제가 충주의 탄금대 잔디마당에서 열렸었는데 그런 곳에 가 보면 농악소리는 거의 모든 출연 팀들의 연희과정에서 들을 수 있다. ‘금과 들소리’(전북)나 ‘정이 고을 여름 들소리’(제주) 같은 농사과정에서 부르는 농요를 부르는 팀도 농악대를 앞세우고 나와서 노래 사이사이에 농악을 치고, 강릉 사천 ‘하평 답교놀이’(강원)나 ‘당정마을 지신밟기’(대구) 또는 ‘계족산 기우제’(대전) 같은 의식과 관련되는 행사에도 농악대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천 ‘청단놀음’(경북)이나 ‘북청사자놀음’(함남) 같은 가면극에도 농악대는 등장하고 ‘강강술래’(전남)나 ‘월월이청청’(경북) 같은 부녀자들의 놀이에도 농악은 빠지지 않았다. 물론 판굿으로 벌이는 ‘부산농악’이나 ‘광주 지산농악’은 더 본격적인 농악의 대형을 갖추어 멋진 농악공연 한판을 벌이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민속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민속축제의 현장에서만 보드라도 농악의 기능은 아주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사를 짓는 현장에서 들노래를 부르면서 일할 때에도 농악을 쓰고 정월 대보름이나 정초 무렵에 하는 답교놀이나 지신밟기 또는 기우제 같은 마을의 공동행사에도 농악을 쓴다. 줄다리기 같은 행사에는 양쪽 편이 다 농악대를 앞세우고 입장도 하고 응원도 하기 때문에 두 패의 농악대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공연용의 농악으로 판굿이라는 농악을 할 때면 50여명의 많은 인원이 나와 각종 진법과 놀이를 벌이며 한 판의 농악을 하게 된다. 이로 미루어 보면 농악은 농사일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두레농악>도 있고 마을의 당제나 지신밟기 등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의식용 농악>도 있고 각종 민속놀이에 보조적으로 사용하고 <반주용 농악>도 있고 완전히 한 판 농악의 음악과 놀이를 함께 보여주는 판굿이라 하는 <공연용의 농악>의 농악도 있다. 민속예술을 연행하는 공연 팀들이 등장하고 퇴장하고 한 과정 한 과정을 진행할 때 계속 농악을 사용하기 때문에 행진용의 농악도 있는 셈이다. 정말 농악의 용도야말로 그 갈래를 짓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많이 쓰인다. 농악의 용도가 이처럼 다양하기 때문에 그런 용도에 따른 농악대의 편성도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간단하게 편성한다 하드라도 꽹가리․징․장구․북이 빠지는 예는 없다. 반드시 네 가지 악기는 사용하게 되어있다. 각 악기의 인원수도 형편에 따라서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최소한의 인원으로 구성하더라도 꽹가리는 한 두 개, 징은 하나, 장구나 북도 한 두 개쯤으로 편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농악을 공연용으로 하는 <판굿>인 경우는 편성이 50명 정도의 대 편성이고 악기의 인원이나 소고 잽이 포수․양반․각시 등의 잡색들 수도 여러 명으로 편성하게 된다. 그리고 농악의 지역별 특징에 따라 편성의 내용도 다르게 되어있다. 농악은 한문 식의 용어이고 풍물․풍장․매구·굿 등 순 우리말 용어도 많이 쓰인다. “웃다리풍물”이라는 용어에서 보듯이 풍물이라는 용어는 대전 이북의 중부지방에서 주로 쓰는 용어이고 “풍장 친다.” “굿 친다.”는 말은 호남지역에서 많이 쓰는 용어이다. 그래서 호남의 농악은 우도농악 좌도농악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우도굿 좌도굿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 “매구 친다.”는 말은 영남지역에서 많이 쓰는 용어이다. 그러니까 통칭으로 농악이라고 하는 것을 풍물이나 풍장 매구 등으로도 부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요즘은 풍물놀이란 말이 가장 많이 퍼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무슨 풍물패라 부르기도 하고 풍물놀이 경연대회라는 행사도 하고 있다. 그러니까 “풍장패” “매구경연대회” 같은 말이 사용되지 않는 것을 보면 <풍물>이란 말이 앞으로도 널리 쓰이는 용어가 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앞에서도 농악의 기능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농촌의 현장을 생각하면 농악이 사용되는 경우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에서 정초에 윷놀이 같은 것을 하고 놀 때에도 흥을 돋우기 위하여 농악을 사용할 수 있고 정월 보름 무렵에 하는 지신밟기나 달집태우기를 할 때에는 물론 농악이 중요하게 사용된다. 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나 당산제를 지낼 때에는 농악이 의식용 음악으로 엄숙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농사철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두레를 짜서 10여명이나 20여명이 함께 논에 모를 심으러 가게 되는데 그럴 때에 농기를 앞세운 일꾼들은 농악(길군악)을 치면서 일터로 가고, 또 돌아 올 때에도 농악을 치면서 돌아온다. 일터에서는 일을 한참 한 다음 참을 먹거나 막걸리를 마시게 되는데 그럴 때에도 풍장을 치면서 한 바탕 여흥을 하고 다시 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모심기나 김매기를 끝내고 마을에서 축제라도 벌이는 날이면 술 취한 마을 사람들이 누구나 참여하여 농악을 치면서 흥겹게 어울려 춤추며 논다. 그러니까 농악은 농촌생활의 많은 부분에 사용되었고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이나 놀이에 있어서는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전승되는 농악은 그런 생활음악으로서의 농악보다는 전문성이 강한 <판굿>이 주류를 이루고 걸립패나 남사당들이 하던 농악 등이 새로운 형태로 변하면서 현대에 적응하고 있다. 특히 각 학교에서 농악대를 만들어 육성할 경우 전주나 이리 정읍 등지에서는 우도농악을 남원이나 임실 등지에서는 좌도농악을 가르치고 김천에서는 김천농악을 충청도에서는 충청농악이라고 할 수 있는 웃다리풍물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경남의 삼천포농악이나 강원도 강릉의 강릉농악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있어서 그 지역의 몇몇 학교에서 전수하고 있다. 때문에 생활 속의 농촌 농악은 퇴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겠지만 판굿으로 벌이는 공연용의 농악은 학교의 농악대 육성이나 문화재제도를 통하여 잘 전승되리라고 생각한다. 2. 판소리와 농악의 큰 지도 나는 자주 얘기한다. 음악은 문화의 한 부분이어서 생활방식과 관련한 문화가 다르면 음악도 달라진다고.. 우리나라는 땅덩이는 크지 않아도 지방에 따라 사투리도 독특하게 발달하고 음식도 다양하게 발달되어있다. 그런데 음악의 기초형태인 노래는 철저히 각 지방의 사투리와 관계를 가지고 발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도민요, 경기민요, 남도민요, 동부민요, 제주민요 등의 민요 권으로 나누어 민요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고 무가(巫歌) 역시 민요를 바탕으로 발달하는 것이어서 지방에 따라 무가의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무악권을 설정하여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최근 어떤 학술대회에서 '중고제 판소리'를 일종의 고제(古制)판소리처럼 생각하여 그것이 옛날 식 판소리였기 때문에 전승이 끊어진 것처럼 말하는 학자를 보았는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음악도 지방에 따라 다르게 발달하기 때문에 음악의 특징을 공유하는 지역을 묶어서 하나의 음악 권으로 설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판소리에 있어서 동편제라는 말은 전라도 동쪽 지역의 판소리가 선율 됨됨이나 창법 등이 다른 지역과 다르고 명창들의 사사계보가 뚜렷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동편제의 지역은 전라도 남원을 중심으로 운봉, 순창, 구례, 곡성 등지와 경상도의 함양, 진주, 하동 등지에서 전승되던 소리이다. 이 지역은 농악으로 보면 좌도농악이 발달한 지역과 일맥상통한다. 좌도 농악 역시 충남 금산에서부터 남원, 임실, 곡성, 구례 등지에서 발달한 농악들인데 동편제 판소리가 경상도 쪽 문화와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발달한 것처럼 좌도농악 역시 경상도 쪽의 문화와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발달했다고 보아도 된다. 말하자면 인접지역의 문화와 무엇인가가 섞이면서 발달하는 것이 그 지역의 문화이기 때문에 동편제 판소리나 좌도 농악은 모두 경상도와 인접한 지역에서 발달한 것이어서 일정량의 경상도 문화와 영향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서편제 판소리는 우도 농악과 거의 같은 지역에서 발달한 판소리이다. 전라도 이리, 정읍, 나주, 광주, 영광, 보성 등 평야지대와 서해안 지대를 잇는 넓은 지역이 서편제 판소리가 발달하고 우도 농악이 전승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이야말로 전라도 특유의 문화가 다양하게 발달한 지역이어서 판소리도 전라도 '육자배기'나 '진도아리랑'에서 나타나는 남도 계면조의 선율이 많고 가자 붙임도 엇붙임이나 기교적인 붙임새가 발달하였다. 우도 농악 역시 가락이 화려하고 설장고 가락이나 꽹가리의 리듬이 부드러우면서도 화려하게 발달하였는데 그 역시 좌도 농악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전라도 전 지역을 문화적으로 본다면 판소리의 동편제와 농악의 좌도 농악이 발달한 경상도와 인접한 지리산 쪽과 서편제 판소리와 우도 농악이 발달한 중부 서남해안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대전 이북지역의 농악은 소위 말하는 웃다리 농악지역이다.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이 이 문화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지역은 사투리도 전라도와 다를 뿐 아니라 민요나 무가(巫歌)도 다르다. 그래서인지 농악도 다르게 발달되었는데 이 지역이 판소리로 따지면 중고제(中古制)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중고제 명창들의 출신지만 보더라도 김성옥(金成玉), 김정근(金定根) 부자(父子)가 충청도 강경 출신이고 김정근의 아들 김창룡(金昌龍, 1872~1943)은 서천에서 태어났다. 심정순(1873~1937)과 심상건(1889~1965)은 숙질(淑姪) 간인데 심정순은 판소리의 음반을 여러 장 남긴 중고제의 명창이었고 심상건은 가야금 병창을 잘하는 음악가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서산출신이다. 1902년 협율사가 생기면서 창극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일제시대 풍채 좋고 소리 잘하는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동백(李東伯 1867~1950)도 충청도 비인 출신이다. 순조, 헌종, 철종 때 이름을 떨쳤던 염계달 명창은 경기도 여주 출신이라 하고 역시 같은 시기 활동했던 고수관명창은 충청도 해미 출신이라고 한다(조선창극사). 따지고 보면 중고제를 잘 불렀다고 전해지는 대부분의 명창들은 충청도나 경기도 출신이다. 때문에 중고제라고 하는 판소리의 음악 스타일은 전라도와 문화가 다른 충청도 경기도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판소리이지 신식 판소리에 대칭 되는 고제 판소리의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판소리는 크게 호남은 중심으로 하는 동편제와 서편제가 있고 충청도와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중고제가 있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을 농악과 연결하여 조감하면 좌도 농악은 동편제 판소리 지역과 관련이 있고 우도 농악은 서편제 판소리 전승지역과 관계가 있고 웃다리 농악은 중고제 판소리 지역과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음악의 권역을 크게 구분하고 이해하면 음악이 문화의 한 부분으로 다른 문화와 관련을 가지고 발달한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문화에 대하여 그냥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의 각 부문을 연관 지으면서 횡적으로 또 종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3. 공연용 음악으로 거듭난 사물놀이 1978년 김덕수패에 의하여 시작된 ‘사물놀이’는 새로운 음악이다. 생활의 일부로 존재했던 옛날의 풍물이 아니고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새로운 기능을 가진 새로운 형태의 새로운 내용을 가진 새로운 음악이라는 것이다. 사물놀이에는 옛날 풍물의 요소가 많다. 그러나 옛 것은 아니다.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난 공연용의 풍물이고 일종의 창작품에 해당하는 것이다. 내가 사물놀이를 기존의 풍물과 구별하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뜻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농악과 사물놀이를 같은 것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고 또 두 가지를 구별하는 기준이나 안목을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를 자주 접하기 때문이다. 사물놀이는 두 가지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전통음악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작곡의 입장이다. 전통음악의 입장에서 보면 기존의 농악을 현재의 상황에 맞게 <현재화>한 것이 사물놀이라는 설명이 가능하고 작곡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데 전통음악의 언어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작곡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결과는 비슷하지만 보는 입장은 다른 것이다. 전통음악은 대부분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적응하여 새롭게 변하면서 생명력을 이어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풍물은 야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나절쯤을 단위로 하여 한 판씩 벌이던 것이다. 공연처럼 하는 ‘판굿’이라 하드라도 진법놀이를 하든지 농사풀이를 하든지 좀 느슨하게 한 과정 한 과정 해 나가게 되어있다. 그래서 흥청대는 멋도 있고 발림이나 춤을 보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상황은 그런 농악을 즐길 시간이나 공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또 우리네의 감수성이 변하여 그런 농악에서 농악다움의 멋이나 흥을 느낄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김덕수를 비롯한 네 명의 젊은이들은 농악을 하나의 음악작품처럼 감상할 수 있도록 실내라는 공간에서 일정한 시간에 농악을 감상할 수 있도록 기존의 농악가락을 이용하면서 훨씬 밀도 있게 압축하여 음악회 형식의 농악판을 만들어 본 것이다. 서서 발림을 하고 각종 놀이를 벌이며 하던 농악을 앉아서 두드리는 소리만 듣도록 하는 음악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변화도 <전통의 현재화>라는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농악의 <현재화>한 한 형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진보적으로 보면 사물놀이는 새로 만든 새로운 공연물이다. 말하자면 새로 작곡된 새 작품이라는 말이다. 다만 작곡방법이 전통적인 방법이어서 음악의 구성요소나 연행방법이 기존의 농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대로 농악이 하나의 놀이로서 음악․무용․연극․진법 등의 요소가 다 함께 있는 것인데 비해 사물놀이는 음악위주로 되어있다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전통음악어법으로 작곡한 새 작품이라고 하는 것이다. 새 작품의 형태도 악보에 그려진 서양 식 작품처럼 모든 음이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흐름은 정해져 있지만 각 악기의 가락은 연주자가 자기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 내도록 <틀을 짠>작품인 것이다. 어느 것이나 실내용의 음악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음악 연주의 효과가 극대화되도록 음량이나 템포를 훨씬 밀도 있게 죄면서 긴장감을 더해가서 절정에 이르도록 하는데 청중을 몰아의 상태인 엑스타시의 상태로까지 몰고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처음 사물놀이를 접한 청소년들도 한번 연주로 사물놀이를 좋아하게 되고 외국의 타악 연주자들도 사물놀이를 최고의 타악앙상불로 평가하여 오늘날 사물놀이는 세계적인 음악이 되었다. 1995년 당시 외국인으로 사물놀이를 배운 사람이 10000명에 이르렀고 매년 200셋트이상의 사물놀이 악기가 수출되는 통계가 나올 정도였다. 사물놀이의 파급효과는 정말 굉장한 것이었다. 초․중․고등학교에 사물놀이패가 등장하고 직업적으로 사물놀이를 연주하는 단체의 수도 상당히 많게 되었다. 그 만큼 사물놀이의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진짜 풍물 즉 농악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학생들이 많지만 사물놀이를 모르는 학생들은 없을 정도로 사물놀이가 풍물을 대신하는 존재가 되어버리기도 하였다. 또 사물놀이를 가깝게 생각하는 학생들은 그것이 국악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자연 국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니까 사물놀이가 국악으로 취향을 옮겨주는 매개역할도 하게 되었다. 사물놀이의 긍정적 파급효과는 너무나 엄청나서 일일이 열거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런데도 사물놀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일부 인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물놀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대개 사물놀이 때문에 기존 농악을 버렸다는 것이고 농악의 참 멋이 사라져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물놀이는 음악적인 효과를 노리다 보니까 빠르고 기교적인 가락에 치중한 나머지 흐드러지는 멋이나 저정거리는 맛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여유와 죄고 푸는 흐름이나 연극적인 재미도 퇴색해 버렸다. 허 허 웃고 한 잔 마시며 즐기는 풍물이 아니라 숨을 죽이고 긴장하며 감상하는 한 단위의 음악작품이 되어버렸다. 사물놀이는 그렇게 새로 태어난 새로운 공연물이기 때문이다. 사물놀이가 인기를 끌고 대단한 기세로 퍼져나가니까 사물놀이를 활용한 새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83년 8월에 발표된 강준일 작곡의 -피아노와 사물(四物)을 위한 모음곡-“열두거리”는 굿의 열두거리를 연상케하는 작품으로 1)Prologue, 2)굿거리, 3)잦은 가락, 4)진쇠, 5)소릿가락, 6)청배가락, 7)부정놀이, 8)도살풀이, 9)터 벌림, 10)엇중모리, 11)진쇠, 12)올림채, 13)당악 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86년 박범훈이 작곡한 “사물놀이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신모듬”은 3악장으로 구성되어있는데 김덕수패 사물놀이가 연주하는 음악을 그대로 살리면서 국악관현악과 어울리도록 만든 작품이다. 사물놀이는 국악관현악이 있어서 한층 부드러워지고 국악관현악은 사물놀이와 조우하면서 훨씬 신나는 음악을 만들어 간다. 지휘자의 통제를 받으며 연주하는 식이 아니라 지휘자가 음악을 타고 춤을 추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음악 그 자체가 대단한 역동성을 가지고 스스로 흘러가고 있다. 사물놀이의 힘이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김덕수패 사물놀이는 초창기부터 외국의 음악가들과 즉흥연주를 통해 만나는 improvization을 자주 시도했었다. 특히 외국에 가서 공연 할 경우 그 곳의 유명한 연주자들과 같은 무대에서 함께 연주하는 그런 음악행위를 자주 했다. 한국에서도 째즈그룹 “레드 선”과 함께 연주회를 여러 번 했는데 안숙선이 수궁가 한 대목을 노래하고 김덕수패 사물놀이와 “레드 선”이 함께 연주한 즉흥음악은 연주효과도 좋았고 그 연주의 실황음반도 호평을 받았다. 김덕수패 사물놀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면서 어떤 악기, 어느 나라 음악인들과도 만나면서 크로스오버라고도 하고 퓨젼이라고도 하는 그런 음악활동을 많이 하였다. 김덕수패 사물놀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성공하자 많은 사물놀이 팀이 만들어져서 직업적인 사물놀이 팀으로 활동하게 된다. 국립국악원에서는 김용배를 끌어들여 사물놀이팀을 만들었고, 사설 단체로도 ‘두레패’, ‘진쇠’, ‘두드락’ 등 많은 직업 사물놀이 연주단체가 출범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후 사물놀이는 대부분의 국악단체에 만들어지게 되고 각급 학교에도 사물놀이를 가르치고 팀을 만드는 일이 많아져서 사물놀이가 옛날의 농악을 대신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수백 수천의 사물놀이 팀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 사물놀이를 활용한 새로운 음악이나 작품들도 계속 나오고 있는 중이다. 4. 사물놀이 황제 김덕수 펠레가 축구의 황제라면 김덕수(1952년 생)는 사물놀이의 황제이다. 그가 이끄는 사물놀이는 가는 곳마다 청중을 열광케 하고 음악가와 문화계인사들에게 충격을 주면서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음악을 가지고 세계무대를 강타한 김덕수는 이미 세계적인 음반회사와 공연기획 회사들이 받들어 모시는 음악가가 되었고 수100차에 달하는 해외활동으로 많은 애호가와 사물놀이 제자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나는 1981년 6월 이들의 유네스코 회관 초청 연주회의 평을 쓰면서 “이 팀이야말로 헤비급 세계 챔피언에의 잠재력을 12분 가지고 있는 권투선수와 같다”고 하면서 세계무대에서 각광 받을 날을 예고 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들은 그 이듬해 6월 일본 순회공연을 시작으로 10월과 11월에는 미국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가는 곳마다 청중을 뒤집어지게 하였고 그래서 일거에 세계적인 그룹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특히 댈라스에서 열렸던 “세계타악인협회 ‘82년 대회(PASIC-'82)"에서의 연주는 사물놀이의 개성미와 높은 수준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듣는 이들로 하여금 한국음악뿐만 아니라 한국문화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김덕수패 사물놀이는 세계 곳곳의 유명연주회장에서 뿐만 아니라 현해탄의 선상이나 뮌핸의 무기창고, 시부야거리, 뉴욕의 센트럴파크, 예루살렘 통곡의 벽, 심지어는 북한 땅에서도 판을 벌였고 그들을 매료시켜 사물놀이의 소리를 잊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세계를 누비며 사물을 두드리고 사물을 가르친다. 김덕수는 해외에서 사물놀이 캠프를 열 때마다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그리고 나서 “하나아 두울 세엣 네엣”을 외우면서 우리 식으로 숨쉬기를 하도록 가르친다. 그렇게 배운 사람들을 사물노리안(Samulnorian)이라고 하는데 지금 사물노리안은 일본 미국 유럽 등 세계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연간 한국에서 나가는 사물놀이 악기만 해도 200세트이상이고 10000여명의 사물노리안이 한국의 악기를 가지고 사물놀이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음반도 ‘83년 미국에서 나오기 시작하여 지금은 폴리그램,EMI,CBS,BBC등 세계적인 음반회사들이 다투어 CD와 LD를 제작하여 수 십장의 앨범이 나왔다. 정말 한국음악의 세계화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세계화인가를 본때 있게 보여주는 본보기들이다. 사물놀이의 영향력은 가히 핵폭탄에 비교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78년 김덕수 패 사물놀이는 등장하자마자 파문이 일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파문은 파도로 변하여 전국의 청소년들을 사로잡았고 연주장마다 구름 떼 같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여파로 수십 개의 직업 사물놀이패가 생기고 수백 개의 사물놀이 팀이 창단되었다. 웬만한 직장과 학교 등에도 사물놀이가 생겨나고 매년 벌이는 사물놀이 힘겨루기 세계대회에는 200여 개의 팀이 출전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기세라 아니할 수 없다. 사물놀이는 우리의 전통에 바탕을 둔 새로운 공연물이다. 우리의 창조정신이 온고이지신(溫古而知新)이었듯 이들의 창조행위도 철저히 전통을 학습(學習)하고 적공(積供)하여 통달한 다음 새로운 상황에 맞는 현재의 전통음악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전통의 상황이란 자연의 형태와 같이 우리의 생활 속에 열린 상태로 조금은 느슨하게 있던 것이다. 풍물을 치는 사람은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고 장소나 용도도 다양하고 시간도 일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풍물놀이를 가지고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악기편성으로 일정한 조건하에서 감상하도록 감상용의 공연음악을 만든 것이다. 이것은 분명 전통의 풍물놀이와는 다른 창작작품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짠 김덕수는 작곡가이다. 또 그는 이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이고, 팀을 이끌어 가는 리-더이자 지휘자이며, 각종 공연을 기획 연출하는 기획자 연출자이다. 옛날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냥 명인(名人)이지만 요즘 식으로 따지면 작곡가이고, 연주가이고, 지휘자이고, 연출자이고, 기획자이며 또한 교육자란 말이다. 김덕수가 이렇게 큰일을 하고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남사당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그의 재능과 폭발하는 힘은 모두 남사당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의 아버지 김문학은 김덕수가 5살때 남사당에 합류시켜 양도일 등 당대 최고 명인들에게 기예를 배우게 했다. 그래서 그는 7살 되던 해에 전국농악경연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받았고 12살에는 동경올림픽 문화행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국악예술학교(1971년 졸)에서 국악전반에 대하여 교육을 받았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철저하게 남사당의 엘리트 과정을 밟은 셈이다. 종합예인집단인 남사당은 척박한 전통사회의 토양에서도 들풀처럼 그들의 예능을 무기로 살아왔다. 살아 남기 위해서는 항상 팔리는 예능, 우수한 기술, 대중적이고 현재성이 강한 무엇을 해야했다. 그 동안 김덕수가 황량한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개척의 꿈을 키우고 영토를 넓혀 갈 수 있었던 것도 다 남사당 기질 덕분이다. 그는 아무리 어려움이 와도 조금도 물러 설 줄 모른다. 초창기 멤버 김덕수 김용배 이강수 최종실 중 김용배가 떨어져나가는 큰 충격이 왔을 때에도 잠시만 슬퍼하고 휘청거렸을 뿐 곧장 강민석을 영입하여 전보다 못지않은 앙상블을 이루어 내는 강인함을 보였다. 남사당의 후예 김덕수는 이제 세계 사물놀이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우리의 토속문화를 세련시켜 이 시대의 우리문화를 만들었고, 이 시대의 한국 창작예술계에 좋은 창작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의 창작방법은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새것을 내 놓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철저히 익혀서 저절로 새것이 나오도록 하는 전통적인 방법이다. 수제천이나 산조를 능가하는 작품을 쓴 작곡가가 없는 국악계에 김덕수는 농악보다 더 밀도 있고 훌륭한 사물놀이를 작곡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다 남사당에서 물려받은 전통문화유산을 올바로 계승한 때문이다. 김덕수는 그러한 기질 때문에 세계적인 외국음악가들과 어울리거나 100명 넘는 큰 오케스트라와 협연 할 때에도 “기죽어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그다. 한참 같이 연주를 하다가 보면 저절로 그들이 우리 사물놀이의 굿거리나 덩덕궁이 장단 안으로 싸여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의 세계적인 인기는 대단하다. 그를 스승으로 떠받드는 제자들만 해도 미국 캐나다에 70여명 유-럽에 50여명 일본에 약 5000여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그 수는 각 지부와 지역캠프를 통해서 계속 늘어나고 있다. 또 국내의 제자도 수백 명에 이르고 이들이 결성한 사물놀이 팀도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언제나 겸손하고 남사당의 후예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가 외국 공연장에서 돼지머리를 삶아 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도, 그들에게 한국말로 구호를 하게 하는 것도 또 그들에게 한국악기를 사용하게 하는 것도 다 그 나름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숱한 해외공연에서도 우리음악을 헐값에 넘긴 적이 없고 상업적인 제의를 받아드린 적도 없다. 그는 각국의 최고가는 공연장, 최상의 귀가 모이는 곳을 선택했고 일류 음악가들과 함께 연주하는 고집을 부렸다. 꽉 짜인 스케줄로 해외 연주를 하고 돌아온 김덕수는 말한다. “서양의 재즈음악에 열광하던 사람들도 우리의 풍물가락 앞에서는 경탄을 아끼지 않았어요. 남사당의 진정한 예인으로 남기 위해 가락을 정리 기록할 생각입니다. 이제 겨우 우리가락에 눈을 떠가는 것 같습니다”라고. 매년 10만Km이상 연주 여행을 하며 우리가락의 세계화에 심혈을 기울이는 김덕수 그의 말은 겸손하지만 그의 기개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사물놀이 음악의 창시자 김덕수 그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고,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것은 바로 溫古而知新의 작곡방법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는 단순한 기능인이 아니다. 남사당에 뿌리를 둔 뚜렷한 예술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국악계의 지도자이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그가 필요로 하는 새 음악 현재의 공연물을 연출하며 창조적인 삶을 살아 갈 것이다.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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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31
  • 국악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이동복 국립국악원장
    --> 국립국악원 홈페이지 취임 100일 이동복 국립국악원장 “국악은 한민족 묶는 원형질, 기틀 다지며 활로 모색할 것”“한심하게도 요즘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일제강점기 사상이 녹아들어 우리 음악의 뿌리를 뒤흔들고, 이제는 학교 교육에서도 국악을 홀대하고 있지요. 임기 2년 동안 국립국악원에서 우리 음악이 무엇인지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취임 100일을 맞아 8일 기자들과 만난 이동복(63) 국립국악원장은 국악이 처한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북한 사람들도 위대한 수령 어쩌고 하면서도 노래는 우리처럼 아리랑을 부른다. 사상과 이념이 달라도 한민족을 묶어 주는 원형질이 음악”이라고 강조한 이 원장은 “그 정체성을 확보하는 근원을 살려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국악의 활로를 모색하겠다.”고 역설했다.--> 서울신문 해당뉴스 더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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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30
  • 여류가객 변진심 (최종민의 국악칼럼)
    시조보급에 앞장 선 여류가객(歌客) 변진심한 집에 딸이 다섯이라 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입을 딱 벌릴 것이다. 어떻게 그 많은 여자아이들이 한 집에서 클 수 있을까?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8남매 10남매를 둔 가정이 많았고 여러 형제나 여러 자매가 함께 크는 경우가 많았다. 시조명창으로 여류 가객으로 크게 활동하는 변진심도 딸이 많은 집의 셋째 딸이다. 무엇보다 딸 다섯이 다 국악을 했다는 것이 화제가 될 만하다. 첫째는 변금자로 가야금을 전공하여 전주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둘째는 변영숙으로 역시 가야금을 전공했는데 딸 셋도 모두 국악을 시켜 ‘가야랑’이라는 연주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셋째가 변진심이고 넷째는 거문고를 전공한 한양대학교 변성금교수이다. 그리고 다섯째 역시 해금을 전공하고 서울대 등에서 가르치는 변종혁이다. 위로 오빠가 하나 있고 다음으로 내리 딸이 다섯인데 이처럼 모두 국악을 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이들은 부모가 국악인이어서 국악을 한 것도 아니다. 부모는 음악과 전혀 관계가 없는 분들이다. 다만 집에 피아노가 있을 정도로 환경이 좋았고 모두들 어린 나이 때 유치원을 다니게 한 것이 예능을 일찍이 개발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큰 언니 금자는 중학교 과정까지 무용으로 전주에서 날렸다. 헌데 키가 작으니까 무용보다는 가야금이 유리하겠다하여 전주여고 2학년 때부터 가야금을 하게 된 것이 가야금 전공으로 굳어졌다. 맏언니가 가야금을 하니까 그 밑으로는 자연스레 모두 가야금을 배우게 되어 넷째까지 모두 가야금을 잘 하게 되었다. 그 큰 언니가 가야금을 배우기 위해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국립국악원의 최충웅 등에게 배우고 대학의 여러 교수들에게도 배우는 동안 국악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어 동생들을 줄줄이 국악전공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다. 변성금은 전주에서 성심여중을 나왔는데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진학시켰다. 언니에게 가야금을 배워 가야금을 잘 했기 때문에 가야금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고2 때 학교에서 손 모양을 보고 거문고를 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전공을 바꾸었는데 거문고로 두각을 나타내어 한양대학교 국악과를 장학생으로 졸업한 다음 전주우석대학교 교수로 가 있다가 지금 모교인 한양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 아래 변종혁은 아예 초등학교 학생인 것을 서울로 전학시켜 나중에 국립국악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해금을 전공하고 국립국악원에 연주단원으로 있다가 지금은 대학에서 제자들 가르치는 일과 연주활동을 주로 하고 있다. 변진심은 1954년생이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해서 유명했다. 고등학교 때는 방송에도 나가고 학교행사에서도 독창을 하곤 했다. 시조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노래를 잘 했기 때문이다. 전주에 장상철이라는 분이 학원을 내어 가야금 거문고 시조 등의 국악을 가르치면서 발표회를 준비할 때인데 기악은 출연자가 많았지만 시조를 부를 출연자는 마땅치 않을 때였다. 고1학생인 변진심이 시조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한 달 밖에 안 되었지만 공연무대에 세웠다. 그 때 평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를 불렀는데 끝나니까 어른들이 “월하 월하” 하면서 시조의 명인 김월하 같은 소리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이 후 변진심은 월하라는 시조의 명인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 본인이 시조에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대학으로 진학할 때 시조나 가곡을 공부하는 국악과로 진학할 생각을 해 봤지만 그런 것을 전공할 수 있는 국악과가 얼른 눈에 띄지 않았고 본인도 국악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때였다. 그래서 그냥 성악으로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에 진학했다. 1973년 대학교 1학년 때 서울의 국립국악원에서 제2회 전국국악경연대회가 열렸을 때 변진심은 비전공부문으로 나가서 판소리, 경기창, 서도창 등의 출연자들을 제치고 1등을 차지할 정도로 실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더욱 시조나 가곡과 같은 정가에 관심을 많이 가질 때였는데 둘째 언니가 “성금이와 종혁이 두 어린 동생들을 서울로 데려다 놨는데 마음이 안 놓이니 진심이 네가 가서 밥도 해 주고 동생들 좀 돌봐라”해서 ‘74년 8월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오자마자 처음 찾아 간 곳이 김월하선생님 댁이었다. 인사를 드리고 시조를 했더니 “목소리 참 좋다”하시면서 제자로 받아 주셨다. 김월하선생이 ’73년에 여창가곡의 보유자 되고 고등학생인 김영기와 이승윤을 전수생으로 삼은 지 3개월 되었을 때였다. 변진심은 두 동생들을 돌보면서 가야금 개인지도로 약간의 돈을 벌어서 월하선생님에게 학채를 드리고 꾸준히 여창가곡을 공부했다. 그렇게 2년여 지났을 때 큰 언니(금자)가 와서 “앞으로는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 시대가 올 것이니 다시 복학하여 교사자격증을 받도록 해라”하면서 복학에 필요한 돈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변진심은 다시 전주로 내려가서 성악으로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를 3년 후배들과 함께 ‘80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곧 바로 충남 서산 대산중학교를 시작으로 전북 김제 북중과 여자 상업고등학교 음악교사를 ’84년까지 했다. 그 무렵 뉴질랜드의 웰링턴 대학에서 성악과 국악을 다 하는 변진심을 교환학생으로 초청하겠으니 오라고 했지만 가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좀 남는 일이다. 교직에 있으면서도 김월하선생에게 꾸준히 공부하여 ‘86년에 여창가곡을 이수하였다. 그리고 ’87년부터는 국악예술학교에 정가 강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주당 12시간을 맡아 3일간 학교에 나가 가르쳤다. 그 때 가르친 학생들 중 최진숙, 오정해, 강경아, 조주선 등은 판소리 전공학생들이었지만 지금까지 사제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 이 후 남원정보국악고등학교 강사도 하고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국악과의 여창가곡 강사도 오래 했다. 경연대회에도 몇 번 나갔다. ‘82년 국립국악원 대회 때는 1등인 금상을 받았었고 ’95년에는 제6회 KBS국악대경연대회 정가부문 금상을 받았다. 2005년에는 1년에 한 명씩 시상하는 KBS국악대상 가악상을 받았다. 그 동안 변진심 정가발표회만 3회를 했고 수 없이 많은 무대에서 여창가곡이나 시조를 공연했다. 음반도 CD 두 장을 냈는데 변진심 정가선집이 그것이다. 얼마 전에는 조금 새로운 시도로 기존의 서양 식 노래로 불리어지는 ‘성불사의 밤’같은 가사를 시조곡조로 불러서 발표회도 하고 음반도 만들었다. 지금은 전남대, 한양대, 추계예대 등에 나가 가르치는 한 편 과천문화원의 시조사범으로 나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국악FM방송 ‘국악이 좋아요’프로에 나가 매주 한 번씩 시조를 가르친 것이 10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변진심의 시조에 익숙한 애청자가 엄청나게 많아졌다. 고등학교 때 시작한 시조공부가 여창가곡 공부로 이어졌고 ‘91년에 다시 시조공부를 더 하게 되었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둘째 언니(영숙)가 시조와 가사·가곡을 잘 하는 김호성에게 변진심을 데리고 갔다. 평소에 언니와 잘 아는 사이여서 찾아간 것이었는데 노래를 해 보라하여 여창가곡 “버들은 실이되고 ~ ”로 시작하는 이삭대엽을 불렀더니 목이 좋고 꿋꿋하게 잘 부른다고 칭찬했고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에 김호성이 남창가곡을 하고 변진심이 여창가곡을 하는 기회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시조를 지도해 주기 시작하여 변진심은 경제시조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현재 시조의 판도는 석암(石庵) 정경태(鄭坰兌)가 악보와 함께 보급한 석암제가 전국으로 보급되어 경제(京制)시조는 배우는 사람이 드물정도가 되었다. 말하자면 석암제가 절대 우세하고 경제는 위축되었다. 변진심은 경제시조를 보급하고 선양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경제시조보존회를 만들고 2006년 2월 17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창단공연을 했다. 시조공연도 과거와 달리 완창공연이라 하여 평시조, 지름시조, 사설시조, 우조시조, 중허리시조, 사설지름시조, 온지름시조, 우조지름시조, 반각시조 등 12가지 시조를 전부 들려주는 식으로 공연을 하고 있다. 변진심은 여창가곡의 가객이지만 시조보급에 발 벗고 나선 사람이 되었다. 본인이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점이 많아 딸과 아들도 국악을 하도록 유도했다. 딸은 대금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했고 아들은 지금 가곡전공으로 추계예술대학 국악과를 다니고 있다. 본인은 숙대 앞에 경제시조보존회 회관을 만들어 놓고 전국에서 찾아오는 제자들을 위해 매일 출근하여 시조와 가곡을 가르친다. 과천문화원에 가는 일이나 전남대 출강 국악방송에 가는 일 공연 일정 등 엄청나게 바쁜 스케줄이지만 전혀 피곤한 줄 모르고 행복하게 정가의 가객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초에는 남편과 함께 한라산 백록담을 등반하고 올 정도로 건강하고 가끔 부부가 늦은 밤에 집에서 술을 한 잔씩 할 정도로 화목하게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소망을 물으니 경제시조를 잘 살리고 보급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스승인 김월하처럼 장학금을 많이 마련하여 더 많은 정가전공자들을 양성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변진심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최 종민 --> 최종민의 국악세상 (사진출처 : 국악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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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9
  • 제주에 터잡은 채상소고춤 김운태 명인
    채상소고춤 --> 다음카페 바로가기 "전통무대공연 개발..공연예술인 키우겠다" "앞으로 제주도는 물론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전통무대공연을 개발하고 싶습니다. 제주는 전통예술부흥은 물론 공연예술인을 키우는 메카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동영상 뉴스보기 전립(모자)에 흰 띠를 달아 돌리면서 추는 채상소고춤의 명인 김운태(48)씨가 9일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제주민속촌박물관 공연장에서 나긋한 춤동작을 시작하자 관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호남·영남·경기의 독특한 장단과 함께 다양한 춤사위가 흘러나왔고, 엇박으로 띠를 빠르게 돌리며 기예에 가까운 동작을 선보일 때마다 관객들은 신이 나 저절로 어깨를 들썩였다. 소고춤을 통합한 젊은 예인으로 이름난 그는 벌써 2년 넘게 제주도에 머물며 하루에 세 차례 공연을 하고 있다. 제주의 전문예술공연단체인 '전통노리안 마로'와 함께 '전통예술흥행프로젝트-명인'의 예술감독을 맡은 김씨는 지난 1일 이정희(김숙자류 매헌춤보존회 회장)의 도살풀이춤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이날 역시 19일 있을 국립국악원 공연을 앞두고 예기(藝妓)인 장금도(83.여) 명인의 민살풀이춤에 고수로 나서 호흡을 맞추는 중이었다. 2009년 두달만 머물고자 제주에 내려온 그는 퓨전 열풍에 밀려 외면받고 있는 전통예술을 부흥하기 위해 마로의 젊은 예인들과 함께 제주도에 남은 인생을 걸어 보기로 의기투합했다. 공연장과 가까운 곳에 민박집을 통째로 빌려 먹고 자며 관객과 예술가 모두 감동과 흥을 누릴 수 있는 무대를 연구하고 있다. 지천명(知天命)을 앞둔 그에겐 아침저녁으로 운동하며 체력관리를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서울에는 예술가가 예술만 하고 살기가 힘들지만 제주도는 다릅니다. 국내외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이 늘 있기 때문에 관객을 확보하기 쉽고, 옛날 예인들처럼 살 수 있어 문화 자체가 상품이 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죠." 삶이 춤에 녹아내려 자연스럽게 몸에 배야 한다고 믿는 그에게 삶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는 제주는 그야말로 '황금밭'이었던 셈이다. 예술의 기운이 샘솟는 천혜의 자연조건에서 작품을 잘 만들고 사람을 잘 키우면 일본의 가부키를 능가하는 문화상품을 만들 수 있다는 그는 2013년께 제주시내권에 전용극장을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다. 이곳에서 제주도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속예술작품을 상시공연하고 나아가 정재(궁중무용) 등 궁중예술도 볼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또다른 목표는 제주에서 전통예술의 대를 이을 인재를 키우는 것. 어린 시절 호남여성농악단의 일원으로 공연장에서 자란 그는 후학들에게도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한바탕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단다. 무대와 관객을 중심으로 풍부한 현장경험을 쌓은 공연전문예술인을 양성하는 것이 그가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다. (제주=연합뉴스) 김지선 기자 -->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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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박경랑의 코리언 팝 클래식 댄스 - 배학수교수의 무용평론
    --> 박경랑과 e-춤터 다음카페 가기 [예술부산 통권 78호 2011년 12월 35쪽] 1981년 테네 가수 플라시도 도밍고는 대중 가수 존 덴버와 함께 아마도 사랑’(Perhaps Love)을 불렀다. “아마도 사랑은 폭풍우로보터 안식을 주는 쉼터와 같을 거예요.”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을 섞을 때 잘 못하면 둘의 결점만 모여 유치하면서도 지루한 작품이 되어버리는데 도밍고와 덴버는 둘의 장점을 살려 편하면서도 품위있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날 박경랑도 그랬다. 그녀는 한국의 고전무용에 대중 무용적 요소를 잘 섞어 전통미를 간직하면서도 즐거운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박경랑은 춤을 세 개 보여 주었는데 고전과 대중의 화학적 결합을 성취한 작품은 두 번째 작품 ‘교방청 춤’이었다. 이 작품은 굴신(屈伸)과 상허하실(上虛下實)이란 한국 고전 무용의 전통적 기법을 그대로 사용한다. 굴신이란 몸을 굽혔다 펴는 업-다운이며, 상허하실이란 단전호흡으로 하체를 안정시키며 상체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세이다. 교방청춤은 모든 동작을 고전적 방식으로 수행하면서, 고전무용에서는 드문 직선의 활달함과 세밀한 잔놀음, 그리고 강력한 클라이맥스를 섞어 관객에게 새로운 감흥을 주었다. 양팔을 일직선으로 죽 펴는 직선의 사위는 매우 시원한 느낌을 주며, 작은 장식적 움직임이 동작에 자주 가미되어 전체적으로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절정의 장면은 박경랑 교방청춤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작품의 종반 그녀는 지구가 태양을 돌듯이 자전하면서 공전한다. 느린 속도로 진행을 하다가 빠른 속도로 자전과 공전을 섞으면 그 동작의 박력과 순환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에 관객들은 삭이고 있던 감정을 터트리면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박경랑은 교방청 춤에서 고전무용의 중후함에 시원함과 화려함, 그리고 절정의 회전을 섞어 고전과 대중의 중간이란 새로운 스타일의 무용 세계를 확립하였다. 이날 함께 출연한 이생강과 백인영도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생강은 소금, 피리, 대금을 들고 나와 각각의 음색을 소개하였으며 목포의 눈물과 대니보이를 그 악기로 연주하였고, 백인영은 아쟁으로 베사메무초를 연주했다. 그렇게함으로써 그 두 분은 국악기로 서양음악을 연주하면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가 난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양악 연주에 시간을 너무 많이 할애하여 국악 작품을 제대로 듣고 싶은 관객은 다소 실망이었을 것이다. 파페라(popera)는 대중음악(pop)의 형식으로 연주하는 오페라이거나 오페라 형식으로 연주하는 팝이다. 박경랑의 춤은 대중 무용 형식으로 추는 고전무용이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에 대해 어느 쪽이 더 좋은지 말할 수 없듯이, 박경랑의 팝 클래식도 정통 고전무용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독자적 스타일인 것이다. (2011.11.11. 부산 국립국악원 연악당) --> 경성대학교 배학수교수 네이버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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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창극의 스타와 판소리명창
    창극은 스타의 산실이었다. 초창기에는 판소리로 이름 높은 명창들이 창극을 시도했기 때문에 김창환·이동백·송만갑은 그 자체 스타이고 명창이었다. 정정열까지도 명창이 스타가 된 경우이지만 오태석은 조금 달랐다. 오태석은 판소리명창으로 보다는 창극의 스타로 유명했다. 그가 출연한 춘향전(방자역)이나 수궁가(원숭이역) 등에서는 관객들이 오태석의 연기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여성국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박귀희·김소희(햇님·달님) 같은 스타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 후의 임춘앵이나 김진진·김경수도 명창이라기 보다는 스타성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반대로 임방울은 대단한 명창이었지만 창극에서는 스타가 되지 못한 경우이다. 하여 창극의 스타와 판소리명창은 약간 차이가 나는 개념이라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엮어 보기로 하겠다. 1962년 국립국극단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국립창극단이 만들어 질 때에는 영화나 TV 등 새로운 공연물이 늘어나면서 판소리와 창극이 극도로 위축된 시기였다. 이 무렵 김창구를 비롯한 국립극장 관계자들이 창극과 판소리를 함께 보호 육성할 방안으로 국립창극단을 만들었다. 김연수가 초대 단장을 맡고 당시 한 참 활동하던 김소희·박초월·박귀희·김경애·김득수·강종철·김정희·남해성·박봉선·박초선·임유앵·장영찬·정권진·한농선·한승호·허희 등이 단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몇 사람에 대해서는 창극과 판소리에 공헌한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단장을 맡았던 김연수(1907~1974)에 대한 얘기부터 해 보겠다. 김연수는 일제강점기 ‘쑥대머리’ 한 방으로 스타가 된 임방울과 쌍벽을 이루며 창극과 판소리 두 분야에 크게 공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 한문을 배워 유식한 편이었고 성격이 따지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품이라 많은 일화를 남긴 사람이다. 29세의 늦은 나이에 순천의 성군수 집에서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배울 때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수궁가의 가사가 틀렸다고 우겨서 유성준이 그 곳을 떠나게 했다는 얘기가 유명하고 그 일 때문에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성악연구회에 출입하게 되었다. 이 무렵 조선성악연구회에는 정정열이 있어서 창극좌를 만들어 창극을 재건하고 흥행에 성공을 거둘 때인데 김연수는 그 단체에 끼어 활동하면서 본인도 나중에 정정열처럼 창극을 각색·연출·작창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겠다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김연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후에도 늘 지도자의 위치에서 단체를 운영하기도 하고 판소리를 새롭게 만들어 보려 애썼는데 그 결실의 하나가 국립창극단이 출범했을 때 단장이 되어 판소리를 창극으로 각색·작창·연출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판소리도 본인의 미학에 맞게 사설과 곡조를 다시 짜서 새로운 판소리를 만들었다. 본인은 춘향가만 발표했었고 나머지는 모두 오정숙이 차례차례 완창으로 발표했는데 수궁가를 완창하기 직전 김연수는 작고하고 말았다. 오늘날 동초제 판소리라고 하는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 등은 오정숙이 공을 들여 퍼뜨려 전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퍼져나가고 있는데 오정숙의 제자 이일주·조소녀·민소완(성준숙)·김소영 등이 거점이 되어 활발하게 전수하고 있다. 김연수는 토막창극을 재미있게 각색하여 무대에 올린 것으로도 유명한데 지금 그런 작품은 대부분이 전승되지 않고 있다. 판소리로 1964년 인간문화재가 되기도 했던 김연수는 판소리 작품 여러 바탕을 남겼고 많은 창극작품을 무대에 올렸던 초대 국립창극단의 단장이었다. 김소희(1917~1995)는 13~4세 때부터 소녀명창으로 당시 경성방송국에서 판소리 한 대목을 방송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1935년 콜롬비아레코드에 취입하기 위해 정정열 일행으로 일본에 갈 때는 일행이 정정열·이화중선·임방울·박록주·신숙·한성준이었으니 김소희가 최연소 10대 후반의 나이였다. 김소희는 송만갑·정정열·박동실 등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가곡과 거문고·가야금·양금 등을 배워 국악전반에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무엇이든지 잘 하면서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한문과 서예를 신호열선생에게 배워 서예작품이 국전에 3년이나 입선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이런 학습과 경륜을 가진 김소희였기 때문에 창극과 판소리에 기여한 공적 또한 적지 않다. 해방 후 여성국극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박귀희와 김소희가 출연한 햇님·달님이라는 작품이었다. 그 작품은 실제 박귀희와 김소희를 모델로 하여 김아부가 대본을 만든 것으로 대중들의 대단한 성원을 받았고 박귀희는 남자역할로 굉장한 스타덤에 올랐었다. 박귀희를 실제 남자로 착각하고 사모하는 여성들이 줄을 이어 찾아다닐 정도로 유명했었다. 그처럼 여성국극 붐을 만들었던 김소희는 그 후 국립창극단의 여러 창극작품을 작곡하는 작창을 맡아 하기도 했다. 김소희가 한 일은 여러 방면에 걸쳐 참으로 다양하고 많다. 여성국악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했고 그들이 힘을 합쳐 국악예술학교를 만들고 이사장을 한 일이라든지 말년에 국악협회 이사장을 한 일 등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판소리의 격을 높이고 판소리를 국내·외에 선양한 일이라 하겠다. 해방공간에서는 건국의 핵심인사들과 미군정청 관계자들이 회식이라도 하게 되면 김소희·박귀희 등이 그런 자리에 나아가 판소리와 가야금병창을 들려주곤 했는데 그것이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또 1962년에는 한국민속예술단의 일원으로 파리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를 순회 공연했고 1964년에는 삼천리가무단의 일원으로 미국 여러 도시를 순회 공연했다. 1972년 봄 뉴욕 카네기홀에서는 판소리 연주도중 청중들이 기립박수를 할 정도로 크게 감동을 주기도 했는데 서울에 돌아 온 다음 나에게 “저들은 한국말을 모르면서도 판소리에 그처럼 감동을 받는데 한국 사람들은 왜 그런 음악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했었다. 김소희는 명창으로서의 프라이드도 대단했다. 그는 13세에 판소리를 시작한 것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63세되던 1979년이 국악생활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한국 최초로 김소희는 국악생활 50주년 기념공연을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최종민의 사회로 뜻 있게 잘 마쳤다. 그런데 그 후 김소희명창은 큰 무대에 서지 않으려 했다. 내가 왜 그러느냐고 말하면 “나는 명창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내 소리가 나의 마음을 따라 주지 않아 제대로 고음이 나지 않는데 나의 청중들에게 실망스러운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대에 서지 않으려는 것이니 그리 아세요.”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깨끗하고 고고한 김소희명창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제자 복이 없다고 한탄 한 적이 있다. 제자들 중 오정숙은 김연수에게 가고 성창순은 정응민에게 가고 안향련·김동애·박소영은 고인이 되었다. 신영희·안숙선·박윤초·유수정·이명희·한정하·이영태·오정해·김미숙 등이 판소리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국립창극단 출신의 명창을 꼽으라면 박동진을 빼 놓을 수 없다. 박동진은 1975부터 1979까지 제2대 국립창극단단장을 한 명창이다. 박동진도 어린 시절은 판소리를 공부했지만 먹고 살 방도가 없어 지방의 소리선생이나 여성국극단의 반주악사(장구)등을 하면서 살았지만 1962년부터 1972년까지 국립국악원 악사로 있으면서 정력적인 판소리독공을 계속하여 최초로 대중을 상대로 한 흥보가 완창공연을 통해 판소리 중흥에 불을 지핀 인물이다. ‘68년에 흥보가를 5시간에 걸쳐 완창하고 ’69년에는 춘향가를 8시간 동안 완창으로 명동국립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후 박동진은 언론이 주목하는 판소리의 대명사처럼 되었고 계속된 ‘70년 심청가(6시간),’71년의 수궁가(5시간), 적벽가(6시간)완창으로 그는 ‘73년에 판소리의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70년에는 성서판소리 ‘예수전’과 ‘팔려간 요셉’등을 발표하여 한국기독교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이 후 ‘성웅 이순신’ 같은 장편의 서사시는 직접 사설을 짓고 작창 하여 녹음하는 등 판소리 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많이 남겼다. 판소리를 들으러 오는 청중이면 어떤 청중들이라도 쉽고 재미있게 판소리를 감상할 수 있도록 현장에 맞는 소리를 척척 만들어 불러주는 창조능력을 가진 명창이었다. 청중을 울리고 웃기는 능력을 충분이 가지고 있었던 명창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가사를 만들고 내용을 꾸려서 멋지게 전달하는 실력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고의 명창이었다. 박동진에 버금가는 여류명창으로는 오정숙(1935~2008)을 꼽을 수 있다. 박동진이 완창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자 오정숙도 판소리 완창에 도전하게 된다. ‘72년에 춘향가, 73년에 흥보가, 74년에 수궁가, 75년에 심청가를 완창했는데 여류명창이 이처럼 여러 바탕의 판소리를 완창으로 발표한 것은 오정숙이 최초이다. 박동진이 본인의 판소리를 발표했다면 오정숙은 그의 스승 김연수의 작품을 발표한 것이 다를 뿐이다. 이 판소리들은 오늘날 김연수의 호를 따서 동초제 판소리라 부르고 지금 전주를 중심으로 오정숙의 제자들이 잘 전수하고 있다. 오정숙은 1977년부터 90년대 말까지 20여년 국립창극단에 있으면서 많은 배역을 멋지게 해 내었지만 특히 춘향가의 월매 역은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연기를 보여주는 명배우였다. 소리와 연기가 모두 완벽에 가까울 정도 야무지게 활동했던 명창·명배우였던 분이 바로 오정숙이라 할 수 있다. 조상현도 국립창극단 출신의 명창으로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1939년생인 그는 1971부터 1982까지 국립창극단에 있었고 늘 주연을 하며 창극의 대중화에 기여했었다. ‘70년대 말에는 MBC. TV에 창극 프로그램을 만들어 계속 출연하면서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그는 한국 최고의 명창이다. 정응민에게 배운 판소리 춘향가·심청가·수궁가를 주로 부르고 박녹주에게 배운 흥보가를 부를 수 있긴 하지만 정응민이 흥보가를 부르지 않아서인지 조상현도 흥보가를 자주 부르지는 않는다. 그의 장기는 춘향가·심청가·수궁가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떤 청중이라도 “야 - ! 판소리가 참으로 멋있구나.” 할 정도로 감동을 줄 수 있는 명창이다. 발성이 완벽에 가깝고 세세상청을 통성으로 낼 수 있는 유일한 명창이다. 배운 판소리의 작품성이 높기 때문에 본인이 손 댈 필요가 없기도 하지만 본인의 생각(미학)이 멋대로 뜯어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배운 그대로 부르는데 완성도가 높은 판소리를 부른다. 그는 광주광역시 국극단을 만들어 오래 단장으로 있었고 사단법인 판소리보존회 회장으로 역시 오래 활동했다. 다른 명창들처럼 판소리를 개인지도형식으로 한 사람씩 가르치는 교수보다는 다수를 모아놓고 그룹지도처럼 가르치는 강의 식 판소리 교습으로 유명한데 그렇게 가르친 제자들이 수 백 명에 이른다. 조상현은 판소리명창으로 최고의 명창이지만 창극의 배우로서도 최고의 배우라 할 수 있다. 춘향전의 이도령역이나 심청가의 심봉사역을 특히 잘 하고 무슨 역이든지 척척해내는 명배우이다. 내가 국립창극단 출신의 명창들을 몇 사람 소개하는 것은 지금의 후학들이 이런 선배들의 여러 가지 특징 중에 무엇이라도 참고하여 각자의 미래를 더 훌륭하게 설계하고 더 열심히 공력을 쌓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 소개하는 것이다. 지면관계로 너무 간략하게 다룬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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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15
  • 국립국악원, ‘1900년 파리, 그곳에 국악’ 오는 8월 7일부터 2달간 전시
    국립국악원이 20세기 벽두인 1900년 4월 14일. 문화와 예술이 풍성했던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던 만국박람회 당시의 분위기와 전경을 확인할 수 있는 영상을 국내 최초로 선보인다.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재개관 기념 특별전 ‘1900년 파리, 그 곳에 국악이 8월7일(화)~10월7일(일)까지 전시가되며, 8월 6일(월) 오후 16:00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막식과 함께 문화체육관광부, 프랑스대사관, 프랑스문화원, 아리랑TV, 동아일보, 국악방송, 프랑스음악박물관(Musee de la Musique) 국립민속박물관, 경북대학교박물관, 국립국악원 후원회 국악지음후원과 아시아나항공, 프로비스타호텔, 고흥곤국악기연구원, 하나은행 협찬으로 전시행사가 진행이 된다. 국악박물관 재 개관 특별전 계기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당시 영상 국내 최초 공개, 지난달 31일 112년 만에 고국의 품에 안긴 해금 등 국악기 11점 등과 함께 상영, 프랑스 고몽-파테 아카이브, 프랑스 국립 시청각연구소 소장 기록 영상으로 당시 분위기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영상은 프랑스 고몽-파테 아카이브와 프랑스 국립 시청각연구소(INA: Institut national de l' audiovisuel)가 소장한 기록 영상으로 국립국악원이 국악박물관 재개관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관련 영상을 찾아 두 달간 국악박물관 재 개관 특별전 ‘1900년 파리, 그곳에 국악’전시관에서 방영할 수 있게 된 것. 국립국악원(원장 이동복)의 부설기관인 국악박물관은 1년여 박물관 전면 개편 작업을 진행. 오는 7일부터 10월 7일까지 두 달간 국악박물관 재 개관 특별전 ‘1900년 파리, 그곳에 국악’을 연다. --> 해당뉴스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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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11

공연소식 검색결과

국악동영상 검색결과

  • 국립국악원 목요풍류 - 이춘희의 경기민요 [2015.03.12] Full 영상
    01. 제비가○ 소리/이춘희(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강효주 02. 회심곡○ 소리/이춘희(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03. 이별가, 한오백년○ 소리/이춘희(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피리/이호진, 장구/강형수04. 신고산타령, 궁초댕기○ 소리/채수현·성슬기, 장구/강형수05. 금강산타령, 노랫가락, 창부타령○ 소리/이춘희(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장구/강형수06. 도화타령, 양류가, 노들강변○ 소리/강효주·채수현·성슬기, 장구/강형수07. 긴아리랑, 구아리랑, 강원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소리/이춘희(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장구/강형수08. 맹꽁이타령○ 소리/이희문, 거문고/이재하, 장구/강형수09. 개성난봉가, 오봉산타령, 양산도, 잦은방아타령○ 소리/이춘희(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외 출연자 전원, 장구/강형수○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반주- 피리/이호진, 대금/원완철, 해금/김지희, 가야금/문경아(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주최 및 촬영/국립국악원[National Gugak Center]
    • 국악동영상
    • 민속악(성악)
    • 민요.잡가
    2015-04-29
  • 4대의 가야금과 해금을 위한 '메나리' -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작곡/류형선, 연주/국립국악원 창작악단(가야금/이지혜·최보라·이주인·이지연, 해금/사주현)
    • 국악동영상
    • 신국악
    • 창작국악
    2015-04-29
  • 2014 '제6회 한국춤 제전' Full 영상
    2014년 3월 6일 국립국악원 예악당 <프로그램> 1. 김숙자 류 '입춤' - 이정희 2. 김광숙 제 '장구춤' - 김광숙 3. 이길주 제 '살풀이춤' - 이길주 4. 이매방 류 '승무' - 최창덕 5. 정재 류 '춘앵전'(정재) - 김영숙 6. 박병천 류 '설북춤' - 한순서 7. 이매방 류 '살풀이춤' - 정명숙 8. 강선영 류 '태평무' - 이명자 9. 정인삼 제 '소고춤' - 정인삼
    • 국악동영상
    • 민속악(종합.무용)
    • 한국무용.전통/창작
    2015-04-29
  • 사람을 그리는 춤, 한국춤 100선 열두마당 - '내리사랑' Full 영상
    2015년 2월 15일(일) 오후7시 국립국악원 우면당 <프로그램> 사회:전수환(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1. 정재만 <승무> - 무용:윤민숙 2. 이미영 <태평무> - 무용:서예우 3. 전은자 <부채춤> - 무용:김보람 4. 김삼진 <즉흥무-획> 무용:김성 5. 이미영 <손북춤> - 무용:양정은 6. 김란 <춘향연무> - 무용:윤옥주 7. 박은영 <산조> - 무용:이경진 8. 최종실 <소고춤> - 무용:이지은 9. 박은영 <춘앵전> - 무용:이선희 10. 서진주 <쟁강춤> - 무용:이효민 11. 채향순 <살풀이> - 무용:박차은 12. 최현 <비상> - 무용:윤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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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속악(종합.무용)
    • 한국무용.전통/창작
    2015-04-27
  • 사람을 그리는 춤, 한국춤 100선 열두마당 - '치사랑' Full 영상
    2015년 2월 15일(일) 오후4시 국립국악원 우면당 <프로그램> 사회:전수환(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1. 김천흥,한영숙,이흥구 <학춤> - 무용:정민근, 전보현 지도:박은영 2. 김천흥 <춘앵전> - 무용:박은영 3. 이동안 <진쇠춤> - 무용:윤미라 4. 조갑녀 <민살풀이춤> - 무용:이미영 5. 강선영 <태평무> - 무용:임현선 6. 한영숙,정재만 <살풀이> - 무용:차수정 7. 김백봉 <부채춤> - 무용:전은자 8. 최현 <비상> - 무용:원필녀 9. 이매방 <승무> - 무용:채향순 10. 김조균 <한량무> - 무용:류영수 11. 문일지 <허튼춤> - 무용:김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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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속악(종합.무용)
    • 한국무용.전통/창작
    2015-04-27
  • 2015 한국 거문고앙상블 제8회 정기연주회 [금세계] Full 영상
    2015년 3월 10일(화) 오후7시30분 국립국악원 우면당 <프로그램> 해설:김영운(한양대학교 교수) 1. 도드리 - 밑도드리:변성금 강혜진, 웃도드리:손채영 문성아 2. 가사 '춘면곡' - 거문고:우민희, 노래:박진희, 대금:김상준 3. 한갑득류 거문고산조 - 거문고:김연미 박희정 전진아, 장구:정준호 4. 숲 The Forest - 작곡 전자음향:Rawcut Music, 거문고:윤은자 외 5. Blue Walking II - 작곡:박경훈, 지휘:이경은, 거문고:이재하 외 6. 거문고앙상블을 위한 거문고 협주곡 <출강> - 작곡:김용실, 지휘:이경은 거문고협연:오경자 거문고:이재하 외, 타악:김혜진 외
    • 국악동영상
    • 민속악(종합.무용)
    • 놀이.종합
    2015-04-27
  • 2015년 1월 20일 '국악인을 위한 신년음악회' Full 영상
    <프로그램> 1.꽃로롱 별초롱, 꽃마을 - 어린이 예술단 푸르미르, 어린이 정가단 아리 2.정선엮음자진아리랑 - 김용우, 플라잉 코리언 3.광대의 노래 - 이희문, 박성호 4.신년기원굿 -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 국악동영상
    • 민속악(종합.무용)
    • 놀이.종합
    2015-04-27
  • 2014 제2회 차세대 명무전 Full 영상
    2014년 3월 5일(수) 19:30 국립국악원 우면당 1. 입춤(정명숙 류) - 김현아 2. 한량무(임이조 류) - 임현종 3. 창작무 봉선화 - 김설화 4. 쟁강춤(최승희 류) - 김선희 5. 태평무(한영숙 류) - 김현진 6. 춘앵전(정재 류) - 변현조 7. 호남산조춤(이길주 류) - 최현정 8. 살풀이춤(김광숙 제) - 민혜미 9. 태평무(강선영 류) - 백수경 10 . 진도북춤(박병천 류) - 이해선
    • 국악동영상
    • 민속악(종합.무용)
    • 한국무용.전통/창작
    2015-04-27
  • 2014 남도민요의 밤 '만추' Full 영상
    2014년 11월 7일(목) 19:30 국립국악원 예악당 <프로그램> 1. 비나리 - 이광수 민족음악원 2. 동백타령, 들국화 - (사)남도민요보존회 3. 남해 뱃노래(멸치잡이 노래), 신뱃노래 - 한정하, 유영애, 박양덕, 김수연, 김화자 4. 정선아리랑 - 최영숙 5. 노랫가락, 창부타령 - 이금미 6. 상주아리랑, 신풍년가 - (사)남도민요보존회 7. 육자배기 - 박송희, 박계향, 정순임, 신영희 8. 자진육자배기 - 한정하, 안숙선, 박양덕, 김수연, 유영애, 김화자 9. 삼산은 반락, 개고리타령 - 박송희, 남해성, 박계향, 정순임, 신영희, 한정하, 안숙선, 박양덕, 김수연, 유영애, 김화자 10. 살풀이 - 무용:진유림 11. 농부가 - (사)남도민요보존회 12. 가야금병창 '야월심경', '사철가' - 가야금병창:강정숙, 강길려, 고수:정준호 13. 방아타령 - 박송희, 남해성, 정순임, 박계향, 한정하, 박양덕, 안숙선, 김수연, 유영애, 김화자 외 (사)남도민요보존회 14. 판굿 - 이광수민족음악원 15. 진도아리랑 - 출연진 전원
    • 국악동영상
    • 민속악(종합.무용)
    • 놀이.종합
    2015-04-27
  • 영산회상 '하현도드리·염불도드리·타령' - 국립국악원 정악단
    세피리/이영 , 대금/김영헌, 해금/전은혜, 거문고/김치자, 가야금/이종길, 단소/이종범, 양금/조유회, 장구/박거현
    • 국악동영상
    • 정악
    • 궁정악.풍류
    2015-04-24

국악인프로필 검색결과

  • 최민서 프로필 - 가야금연주가
    ☆ 최민서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가야금 연주 수련과정ㅣ학력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졸업용인대학교 국악과 졸업 및 동대학원 수료 활동 경력 인천연수구립전통예술단 단원국립 정동극장 예술인턴 역임한국가야금연주가협회 정회원유대봉제 백인영류 가야금산조보존회 정회원인천시무형문화재 제7-1호 남창가곡 악사보존회 이사국립국악원 국악박물과 재개관 기념 기획공연 ‘젊은국악 풍류를 그리다’ 32Festival international jazz plaza CUBA . 아바나 국제재즈페스티벌 초청 공연Spain Barcelona 「World Routes 2017」 초청 공연Georgia ‘2020 국제현대예술13’ 개막공연kbs국악의 향기, kbs콘서트7080, Mnet더 마스터 출연 수상 경력 제12회 인천전국국악경연대회 기악부문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홈페이지ㅣSNS https://www.instagram.com/minseo_3070 [인스타그램]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Xlep7oqa8vo?si=BjZ1-zosdCHpnGY5 ['절영의 전설' (지휘: 한진, 25현가야금: 최민서)] 기타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악인프로필
    • 사,아,자,차
    2024-01-16
  • 김어진 프로필 - 피리연주가
    ☆ 김어진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피리연주, 태평소연주가 수련과정ㅣ학력 최경만, 이건회, 한세현 선생 사사중앙대학교 국악대학 국악관현악과 졸업서울시무형문화재 제44호 삼현육각 이수자 활동 경력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준단원 역임 수상 경력 제11회 부평전국국악경연대회 금상제44회 춘향국악대전 최우수상 홈페이지ㅣSNS https://www.instagram.com/piri_ej [인스타그램]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zmdq0yWy6iE [메나리토리 (국악콘서트 판)]https://www.youtube.com/watch?v=L4xhvi9aKEA [김어진의 피리, 심율心篥 (선릉아트홀 불휘기픈소리)] 기타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악인프로필
    • 가,나,다
    2023-12-19
  • 한단비내린 프로필 - 해금연주가
    ☆ 한단비내린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해금 연주 수련과정ㅣ학력 국립국악학교 졸업 (학교장상, 국립국악원장상, 전공우수상)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 (학교장상, 문화체육부장관상, 전공우수상)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학사 (수석졸업, 최우등졸업)서강대학교 아트앤테크놀로지학과 석사과정 재학한국과학기술원 (KAIST) 문화기술대학원 박사과정 입학 예정 활동 경력 수상 경력 2019 제19회 명창박록주전국국악대전 일반부 관악부문 우수상2020 제36회 동아국악콩쿠르 해금 일반부 동상2020 제20회 인천국악대제전 전국국악경연대회 일반부 기악부문 대상2021 제15회 21세기 한국음악프로젝트 동상 (팀명 : 연리지)2021 해금앙상블 프로젝트 FUN 대상 (팀명 : 옐로우드)2022 제1회 메타버스기획공모전 장려상 (팀 : 등대) 홈페이지ㅣSNS https://www.instagram.com/handanbinaerin [인스타그램]https://muz.so/danbinaerin [홈페이지]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18rsveRUd1k?si=TB7OIGbkUu9Fyqkn [지영희류 해금산조]https://www.youtube.com/@_danbinaerinhan7261 [유튜브채널] 기타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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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타,파,하
    2023-11-24
  • 이우선 프로필 - 한국무용가
    ☆ 이우선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한국무용 (전통) 수련과정ㅣ학력 임이조, 진유림 선생 사사국립전통예술중학교 졸업계원예술고등학교 졸업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실기과 예술사 졸업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무용과 전문사 졸업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일무 전수자국가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전수자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자 활동 경력 前 국립국악원 무용단 객원 단원한국예술종합학교 실기 강사 역임 예원학교 무용과 향상 지도역임서울 신도초등학교 방과후 무용교사 역임서울 구남초등학교 방과후 무용교사 역임고양예술고등학교 무용과 강사 역임고양예술고등학교 예술영재교육원 강사 역임고양 흥도초등학교 방과후무용교사 역임한국전통문화학교 강사 역임강남대학교 평생교육원 무용 실기 교수이화여자대학교 국악과 실기 강사 역임남원국악예술고등학교 무용과 특강 강사 역임서울북한산초등학교출강 진유림 청어람전통춤 보존회 회원사) 대한무용협회 고양시지부 회원사) 아악일무보존회 회원 수상 경력 국립국악원 제12회 온나라 전통춤경연대회 금상 (국무총리상)제15회 전국국악경연대회 대상 (문화체육부장관상)제14회 평택 지영희 전국국악경연대회 차상 제38회 동아무용콩쿠르 전통 부문 동상제25회 전주대사습놀이 무용부문 차상제18회 전국무용콩쿠르 최우수 지도자상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x-dS1U2_HxE?si=CrSrJLFRld3bS4wc [임이조류 한량무]https://www.youtube.com/@leewoosun5977 [이우선 유튜브채널] 기타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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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아,자,차
    2023-11-15
  • 장성빈 프로필 - 판소리
    ☆ 장성빈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판소리 수련과정ㅣ학력 정지혜 선생님께 만정제 흥보가 사사 청연 조영자 선생님께 남도잡가 및 남도민요 사사성사 김영자 선생님께 정광수제 수궁가 사사연봉 김일구 선생님께 박봉술제 적벽가 사사중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전수생)조은희 선생님께 권명화류 대구살풀이춤 사사중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9호 살풀이춤 전수생)전주예술중학교 국악과 공동 수석 입학 및 졸업 (판소리 전공)전주예술고등학교 국악과 졸업 (판소리 전공)원광디지털대학교 전통공연예술학과 최우수 졸업. 연주자상 및 공로상 (판소리 전공)문화예술교육사 2급 자격 취득 활동 경력 2015. 국립국악원 장애인의 날 특별기획공연 <우리도 스타> 출연 201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장애인예술가 창작지원사업 찾아가는 국악콘서트 10회 공연2016~2019. 장애인국제교류공연 참가 (오사카, LA, 비엔나, 프라하, 포르트칼, 스페인)2018. 평창패럴림픽 선수촌 입촌식 환영공연 및 메달플라자 공연전라북도교육청, 경산교육지원청, 익산교육지원청 교장교감 세미나 공연 다수성남청소년오케스트라 2회 협연 (장애인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음악회)학교로 찾아가는 장애인식개선콘서트 (포항 장성고등학교 외 다수)외 국내공연 다수문화소외계층 찾아가는 콘서트 다수재능나눔 봉사공연 (국립생태원, 요양원) 다수2022. 판소리 정광수제 수궁가 완창2013. SBS 지적장애 판소리신동 출연2013. KBS 1TV 아침마당 화요초대석 출연2014. KBS 1TV 가족이 부른다 3연승 및 연말 준우승2017. KBS 전주방송특집다큐 <소년 소리로 날다>출연2021. OBS 멜로다큐 가족 <그후 10년> 출연 외 방송출연 다수한국장애인고용공단 직장내장애인식개선 파트너 강사 수상 경력 2010. 제17회 달구벌전국청소년국악경연대회 초등부 최우수상 2012. 제4회 남해성전국판소리경연대회 중등부 대상2013. 제16회 전국남도민요경창대회 중등부 대상 2013. 제6회 장애학생 음악콩쿠르 한국음악부문 금상/중등부 대상 (교육부 장관상) 2014. 제1회 전라북도 자랑스런 청소년상 장애부문수상 (전북도지사상) 2015. 제3회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아리랑경연대회 대상 2016. 제20회 올해의 장애인상 (대통령상) 2017. 대한민국 인재상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상) 2022. 무안 전국장애인승달국악대제전 일반부 종합대상 (대통령상) 홈페이지ㅣSNS https://blog.naver.com/ifree5004 [네이버 블로그]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shorts/3MX-7Eacek8 [장성빈과 진도아리랑]https://www.youtube.com/watch?v=4xPm3NLUgKs&t=44s [장성빈 수궁가]https://www.youtube.com/watch?v=-NSPXx_8j2A [아름다운 나라 - 성남청소년오케스트라 협연] 기타 소리를 사랑하는 아리랑 소년, 장성빈 출간 (솟대문학)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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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9
  • 신한별 프로필 - 판소리
    ☆ 신한별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판소리 수련과정ㅣ학력 국립전통예술중학교 및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졸업이화여자대학교 한국음악과 졸업 활동 경력 2016 국립국악원 홍보 동영상 출연2017 대웅제약 베아제 광고 출연2017 신한별의 <별별 소리판> 독주회2017 KBS 국악뮤지컬 드라마 ‘조선미인별전’ 출연2020 제15회 DIMF 창작지원작 <창작뮤지컬: 란> 판소리 자문2022 키르기스스탄 Kyrgyzstan - 대한민국 남원농악, 판소리-키르기스스탄 오케스트라 합동 공연 수상 경력 2019 제13회 21C한국음악프로젝트 장려상 (팀 오름)2019 All Star 페스티벌 IN THE GALAXY 장려상 (팀 국악인가요) 홈페이지ㅣSNS https://heradee.com/hanbyeol [홈페이지]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NS0Mymr35sU [2019 21C한국음악프로젝트 - 오름 '풍어' (노래 박상훈, 신한별] 기타 2022 싱글앨범 <그저> <윤슬> 발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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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5
  • 김성현 프로필 - 대금연주가
    ☆ 김성현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대금 연주 수련과정ㅣ학력 국립국악중학교 및 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예술사 졸업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예술전문사 졸업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전수자 활동 경력 현재 국립국악원 정악단 단원 수상 경력 2012 제32회 온나라국악경연대회 대금부문 금상2017 제27회 KBS국악대경연 전체 대상 홈페이지ㅣSNS https://www.gugak.go.kr [국립국악원 홈페이지]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_gykYk8_1VY [대금독주 '상령산풀이']https://youtu.be/VAqGR4IQEKE [국악찬양 - 김성현(대금), 김성훈(피리)] 기타 국립국악원 정악단 피리 단원인 김성훈의 동생이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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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나,다
    2023-01-10
  • 김성훈 프로필 - 피리연주가
    ☆ 김성훈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피리 연주 수련과정ㅣ학력 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한양대학교 국악과 졸업단국대학교 대학원 통합과정 박사 수료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이수자국가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이수자 활동 경력 충주시립우륵국악단 상임단원 역임현재 국립국악원 정악단 단원 수상 경력 2011 제31회 온나라국악경연대회 대금부문 금상2015 제31회 동아국악콩쿠르 일반부 대금부문 금상 홈페이지ㅣSNS https://www.gugak.go.kr [국립국악원 홈페이지]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bETzL2yuETQ [사철가 - 작곡 유민희, 피리 김성훈, 타악 고명진] https://youtu.be/VAqGR4IQEKE [국악찬양 - 김성현(대금), 김성훈(피리)] 기타 국립국악원 정악단 대금 단원인 김성현의 형이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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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나,다
    2023-01-10
  • 김철진 프로필 - 대금연주가
    ☆ 김철진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대금 연주 수련과정ㅣ학력 전통예술고등학교 졸업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예술사 졸업 및 예술전문사 수료 활동 경력 현재 국립국악원 정악단 대금 정단원201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대금앙상블 ‘취’ 제1회 정기연주회201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중 교류연주회2013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박물관! 춤추고 노래하다’201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대금앙상블 ‘취’ 제2회 정기연주회201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대금앙상블 ‘취’ 제3회 정기연주회2016년 국립국악원 금요공감 ‘봉덕이 찾기’2016년 음악극 ‘인선왕후’ 수상 경력 2015 제35회 온나라국악경연대회 대금부문 금상2015 제31회 동아국악콩쿠르 일반부 대금부문 금상 홈페이지ㅣSNS https://ko-kr.facebook.com/empalll [페이스북]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ym0I28w2ISM [대금합주곡 ‘대풍류’ - 김면수,김철진,심성욱(대금), 김태현(소금)] 기타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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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나,다
    2023-01-03
  • 선지우 프로필 - 해금연주가
    ☆ 선지우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해금 연주 수련과정ㅣ학력 국립국악중학교 및 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 활동 경력 창작국악그룹 '속속곳' 동인현재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단원 수상 경력 2018 제34회 동아국악콩쿠르 일반부 금상2020 제14회 21c한국음악프로젝트 금상 (속속곳)2021 KBS국악대경연 대상 홈페이지ㅣSNS https://www.instagram.com/ji_wooooooooooo [인스타그램]https://www.gugak.go.kr [국립국악원 홈페이지]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rY5zP8qstTo [지영희류 해금산조]https://www.youtube.com/@JiwooSun [유튜브채널] 기타 2022년 9월 국립국악원 최연소 단원으로 창작악단에 입단하였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악인프로필
    • 사,아,자,차
    202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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