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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정보 검색결과

  • 국악가요가 없는 한국의 노래문화
    우리민족은 노래와 춤을 좋아해서 고대국가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류의 노래문화를 다양하게 발달시켰다. 전통음악으로 따지면 각 지방에 특징 있게 발달한 민요와 그 민요를 바탕으로 발달한 무가(巫歌)들, 잡가종류, 가곡, 가사, 시조, 제사에 사용되는 악장(樂章), 시창, 송서, 판소리, 범패 등 엄청난 양의 노래문화가 발달하였다. 이런 노래들은 우리네의 생활관습이 일을 하거나 놀거나 심지어는 혼자 있을 때에도 노래하는 것이 일상화되어있기 때문에 발달한 것들이다. 모심을 때에도 노래하면서 모심고 김맬 때에도 노래하면서 김을 맸다. 상여를 메고 나갈 때나 터를 다질 때에도 노래를 부르곤 했다. 혼자 있을 때에도 가곡을 하거나 시조를 부르고 시창이나 송서를 하는 것도 예사였다. 종교적인 의식은 그것이 굿이든 절에서 하는 재(齋)이든 심지어 유교식 제사인 종묘나 문묘 제사에도 노래가 빠지지 않았다. 우리의 노래문화는 그렇게 기능이 생활전반에 걸쳐 사용되는 것이었고 내용도 다양하고 수준 또한 높았다는 말이다. 현재 우리의 노래문화는 어떤가?전통사회 시절에 사용되었던 많은 생활의 노래들은 사라져 버렸다. 김매기소리나 상여소리 같은 토속민요가 급속도로 사라져가고 잡가나 가곡과 시조 같은 노래도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위축되었다. 무가(巫歌) 역시 굿이 사라지니까 없어지고 있다. 판소리나 잡가 종류는 국악전공자들이 하는 종류가 되어 어느 정도 그 전승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노래문화는 옛날과 완전히 다르게 바뀌어져 버렸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노래와 직장인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다르고 60대 노인들이 부르는 노래와 20대 청년들이 부르는 노래가 다르다. 성악가들이 부르는 노래와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 역시 다르다. 이런 오늘날의 노래문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학교에서 가르치는 노래는 서양민요를 가져다가 가사만 한국어로 번역한 것들이 많다. 이런 경우 서양말에 맞도록 작곡된 음악구조 때문에 한국어로 번역해 부르면 곡의 강약과 가사의 강약이 어긋나서 노래하기 힘들다. 말하자면 곡은 서양음악언어로 되어있는데 가사는 한국어로 불러야 하니까 서로 맞지 않아 부르기도 어렵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노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음악시간에 배우는 노래들은 일상생활 가운데 잘 부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대학원 다닐 때 어느 중․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중학교 1학년들에게 ‘노래는 즐겁다’는 단원을 가르쳤는데 쉽고 재미있는 노래여서 학생들은 어렵지 않게 잘 배웠다. 나는 학생들이 완전히 배웠다고 생각하고 그 노래로 실기시험을 보게 했는데 의외로 그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음정 박자는 정확하게 부르지만 가사가 갖는 내용과 억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여러 학생이 그렇게 불만족스러운 시험을 보기 때문에 9번째 학생 차례가 되었을 때 유행가를 해 보라고 했다. 그 학생은 그 무렵 유행했던 ‘섬마을 선생님’이라는 유행가를 했는데 눈을 감고 온 몸을 비비 꼬면서 매우 실감나게 유행가를 하는 것이었다. 음악시간에 가르친 ‘노래는 즐겁다’는 제대로 표현이 안 되게 불렀던 학생이 그냥 듣고 배운 ‘섬마을 선생님’은 기막히게 잘 표현하며 불렀다는 말이다. 내가 가르친 교과서의 서양민요는 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유행가는 왜 그렇게 잘 표현할 수 있었을까? 서양민요는 음악언어가 우리말과 맞지 않아서 표현이 잘 안된다. 그렇다면 표현이 잘 된 유행가는 우리말과 잘 맞는 음악언어로 되어있다는 얘기인데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유행가가 처음 발달하게 된 것은 일본사람들에 의해서이다. 한국에 축음기를 팔기 위해서 다양한 한국음악의 음반을 만들고 신상품으로 유행가를 내 놓았는데 일본민요 선율에 트로트리듬을 붙인 유행가는 금방 인기를 얻으며 보급되었다. 일본민요의 음악언어는 우리의 민요언어와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일본어와 우리말의 어순(語順)이 같기 때문에 강약의 흐름이 서로 같고 가사를 발음할 때 시김새하는 것도 서로 같다.그래서 일본민요선법에 트로트리듬을 붙인 우리 가요는 왜색가요나 트로트가요라 불리긴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쉽게 수용되었던 것이다. 한편 지금 젊은이들은 미국 팝송스타일의 가요를 주로 부르고 있다. 음악언어로 보면 팝송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말 가사로 노래하면 가사의 액센트가 어긋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고”를 노래한다면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고” 와 같은 식이 된다. 젊은이들은 이런 노래의 가사처리가 얼마나 우습게 되어있는지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매우 불합리한 것이다. 그리고 1970년대에 유행했던 통키타 가수들의 노래는 포크가요라고 하는데 그 포크의 뜻이 우리민요가 아니고 서양민요라는 뜻이다. 학교에서 서양민요를 배웠고 교회에서 서양민요 식의 찬송가를 부르며 음악언어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대중가요는 일본민요 언어로 된 트로트가요, 미국 팝송 식으로 된 신세대의 가요, 서양민요 식으로 된 포크가요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악가요가 거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국악가요라는 말이나 국악동요라는 말을 가끔 사용하긴 한다. 그러나 그런 노래들을 따져보면 음악언어는 우리민요나 판소리와 같은 우리 음악언어가 아닌데 국악악기로 반주한다거나 국악인들이 음악행위를 주도한다고 하여 그런 용어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악가요나 국악동요가 되자면 악기에 상관없이 음악언어가 국악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음악의 성격을 나타내는 척도는 바로 음악언어이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을 발달시키기 위해서 문화언어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나 진정한 국악가요가 거의 없다고 하는 내 주장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그리고 한국가곡이라고 하는 많은 노래들도 대부분 서양음악언어로 작곡했기 때문에 한국음악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음악언어로 볼 때 한국 전통음악과 같은 계통이 아니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노래문화 중 우리음악언어로 작곡된 노래는 거의 없다는 얘기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음악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음악언어인데 우리나라 작곡가들은 음악언어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고 전통음악과 같은 우리 음악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에 국악가요가 없는 음악문화를 만들어내게 되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 국악정보
    • 자료실
    2012-08-31
  • 세계의 음악이 된 판소리
    판소리는 2003년 11월 7일에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이면서 세계의 음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 사람들이 판소리를 잘 모른다. 일부 사람들은 판소리를 좋아하고 판소리에 대한 지식도 꽤 갖고 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판소리가 있다는 사실 정도를 알고 있지 그 이상을 잘 모르고 있다. 이번 강의는 그런 한국인들에게 최소한의 판소리 상식을 갖게 하고 판소리의 가치를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1. 판소리의 토양 지금은 판소리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는 것처럼 되어있지만 그 동안의 판소리는 철저히 자생력에 의해서 발달되어 왔다. 판소리의 자생력이란 결국 소리하는 사람(광대)들과 그 소리를 소비하는 서민 대중들과의 사의에서 형성된 것이고 그 소비층의 변화에 따라서 판소리의 내용도 변화되고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판소리는 줄거리가 있는 긴 이야기를 성악적인 방법으로 연출해 내는 것이니까 그것을 발달시킨 수요자의 측면으로 눈을 돌리면 판소리는 수요자인 우리들이 옛날 얘기와 같은 ‘이야기’와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소리’ 또는 ‘노래’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그 두 가지 요소가 만나면서 만들어낸 극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음악의 생성발달은 철저히 자연 발생적이고 우리의 생활이라고 하는 문화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누구의 특별한 아이디어나 국가적인 정책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수요자인 일반 대중과 공급자인 음악가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생성 발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판소리의 기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보형 같은 학자는 판소리가 ‘판놀음’에서 나왔다고 본다. ‘판놀음’이란 여러 패의 놀이꾼들이 너른 마당을 놀이판으로 삼고 각기 ‘소리’나 ‘춤’ ‘줄타기’ 등을 한판씩 노는 것을 뜻하는데 이런 경우의 예능을 ‘판소리’ ‘판춤’ ‘판줄’과 같이 불렀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기는 지금도 판을 짜서 한판 노는 농악을 ‘판굿’이라 하고 그런 식으로 추는 춤을 ‘판춤’이라 하고 그런 식의 염불을 ‘판염불’이라 하니까 ‘판소리’도 한 판으로 짜서 판놀음에서 부르던 소리라고 하는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을 가진다. 그런데 또 다른 견해도 있다. 무가(巫歌)기원설이다. 무당들이 하는 굿에는 서사적인 내용을 노래도 연출하는 무가가 많이 있다. 동해안 별신굿의 ‘심청굿’도 그렇고 경기 도당굿의 ‘손님굿’도 그렇다. 진도 씻김굿의 ‘제석굿’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긴 이야기를 노래로 연출하며 듣는 이들에게 큰 재미를 안겨주기도 한다. 또 무가를 부르는 형태가 경기도와 전라도의 서사무가는 판소리 하는 것과 비슷하다. 특히 경기 도당(都堂)굿의 경우는 남자 무당이 북 장단에 맞추어 무가를 하는 것이 판소리하는 것과 똑 같은 형태로 보일 정도이다. 전라도 굿을 많이 본 사람들도 ‘판소리는 굿에서 왔을 것’이라고 느끼기 쉽게 되어있다. 서사무가의 연출방법도 비슷하고 음악적인 내용도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판소리의 명창 대부분이 전라도 세습무 집안 출신이라는 것도 그런 짐작을 하게 하는 한 요인이다. 하긴 판소리는 전라도 무속 출신들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무속 출신 아닌 사람이 판소리를 할 경우 ‘비가비(非甲)’라 하여 실력을 낮추어 보려는 경우가 많은데 권삼득처럼 ‘비가비’이면서도 정말 소리를 잘하게 되면 ‘양반광대’라고 하여 높여 부르기도 한다. 이 ‘비가비’란 동류가 아니라는 뜻이고 그 동류란 무속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처럼 판소리의 기원에 대해서는 ‘판놀음 기원설’도 있고 ‘무가 기원설’도 있는데 또 다른 추측을 하는 경우도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이야기꾼 기원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통사회 시절에는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파는 이야기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야기꾼은 ‘장화홍련전’이나 ‘춘향전’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구연해 주고 돈을 받아 생활하는 직업인이었다고 하니까 그들의 이야기 연출 솜씨도 대단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말로만 했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면서 노래도 하고 재미있는 표정도 짓고 춤도 추고했을 터이니까 그런 것이 발전하여 판소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기는 나도 ‘이야기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고 그런 이야기꾼들의 구연 솜씨는 대단하다는 얘기도 들은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바로 판소리로 연결 될 수 있을까하는 점에 대해서는 해결되어야 할 과정들이 너무나 많다. 어쨌든 판소리는 그렇게 이야기라는 문학적 요소와 노래라는 음악적 요소와 연출이라는 연극적 요소가 어우러져 발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서민 대중들의 여러 가지 욕구와 관련을 가지고 발달하는 판소리는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된다. 판소리를 음악으로 연출할 때의 중요한 요소가 ‘아니리’와 ‘소리’인데 ‘아니리’는 반드시 전라도 사투리로 하여야 하고 ‘소리’도 전라도의 민요 토리인 육자백이 토리의 계면조가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점을 보면 판소리는 전라도에서 자생하고 전라도를 배경으로 발달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전라도 사람은 판소리를 무척 좋아한다. 심지어는 국악은 곧 판소리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나는 ‘82년도에 전남대학교에 국악과를 만들고 초대 국악과장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전라도 시골에 민요채집을 가서 “저는 국악하는 사람 최종민입니다” 하고 인사를 하면 “그러먼 판소리 잘 허시것네요”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만큼 전라도 사람은 판소리를 국악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전라도 사람들이 판소리를 좋아하는 정도는 대단하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판소리 판이 벌어진다고 하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전주 대사습이나 남원 춘향제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드는데 그들 대부분이 판소리를 들으러 오는 분들이라고 보아도 된다. 전주 실내체육관을 가득 메운 청중들이 판소리를 들으며 뿜어내는 열기는 자연 “얼씨구” “조오타”와 같은 추임새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 추임새 하는 수준이 서울의 국악과에 다니는 학생들 보다 더 높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춘향제 때에 남원 광한루원에 모이는 청중들도 마찬가지이다. 심청가의 슬픈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흥겨운 중중모리 장단이 나오면 일어서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전라도 사람들은 정말 판소리를 좋아하고 판소리에 대한 안목도 대단히 높다. 그래서 판소리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판소리 명창 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안다. 그러니까 자기 자녀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는 사람도 많아져서 오늘날의 판소리는 전라도 출신들에 의해서 계승 발전되어 간다고 해도 될 정도이다. 결국 판소리의 발달 배경에는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이야기’와 ‘노래’ ‘연극’등의 요소가 있고 그것을 공연물로 가꾸어 온 전라도 사람들의 음악적인 안목과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2. 판소리의 큰 흐름 판소리는 시조나 가곡처럼 혼자서 유유자적으로 즐기는 노래가 아니다. 소릿군이 청중을 대상으로 소리를 파는 공급자와 수요자가 있는 노래이다. 시조나 가곡 같은 노래들은 청중을 생각하지 않는다. 노래 부르는 사람들 개인의 수양이나 교양을 위하여 하는 노래이기 때문에 수양과 관련되는 철학과 그것을 소리로 표현하는 표현방법을 모색하며 발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노래를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사특한 마음과 욕심을 버리도록 하는 그런 음악을 발달시켰던 것이다. 이런 노래와 달리 판소리는 청중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이기 때문에 청중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수양의 음악과는 전혀 다른 상품의 음악인 셈이다. 그래서 공급자인 소리광대가 수요자인 청중을 상대로 하여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개발해 온 것이 판소리라고 보아도 된다. 게다가 우리네의 음악작품은 서양의 음악작품처럼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모하면서 발달했으니까 판소리의 작품 내용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발달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발달한 판소리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판소리에 관한 최초의 문헌이라고 하는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만화집(晩華集 영조30년 1754)에 “가사 춘향가 2백귀”라는 것이 있고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때의 문인 송만재(宋晩載 1788~1851)의 관우희오십수(觀優戱五十首)에 판소리나 줄타기 땅재주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 18세기 무렵이나 19세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판소리가 불리어졌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판소리라는 공연물이 어떤 식으로 발달해 왔을까?. 국가가 장려하는 음악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패트론(후원자)이 있었을 턱도 없고 순전히 서민 대중들을 상대로 소리를 팔면서 살아야 하는 광대들이 어떤 소리를 어떻게 하면서 판소리를 발달시킬 수 있었을까하는 것이 궁금한 것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해답이나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상상력으로 그런 과정을 재구성해 볼 수밖에 없다. 초창기의 판소리는 사설이 재미있고 곡조가 민요와 비슷한 간단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때의 재미있는 내용이란 대개 음란한 얘기일 것으로 짐작된다. 하기는 음란한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유교적인 덕목으로 낙이불음(樂而不淫)한 것이 좋다고 하는 생각도 뒤집어 보면 정말 즐거운 것은 음란한 것이기 때문에 즐거워하면서도 음란하지 않게 하는 것 그런 것을 수양의 덕목으로 삼아 수양하자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런 시대에 일반 대중들이 척 들어서 재미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좀 음란한 내용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판소리는 그런 내용의 얘기를 실감나게 하면서도 노래의 재미를 맛 볼 수 있도록 음악적으로 각색하여 들려주었을 것이다. 송만재의 관우희에 나오는 열두 마당 중에서 사랑을 내용으로 하는 것은 춘향가를 비롯하여 배비장전․변강쇠타령․강릉매화전․왈자타령등인데 그 내용의 야한 정도는 당시가 유교적인 분위기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런 야한 얘기나 횡재하는 얘기, 신선의 얘기 등 그 당시의 현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내용들을 거침없이 들려줌으로서 한 바탕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면서 마음껏 카타르시스 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판소리가 차츰 인기를 얻고 독립된 공연물로 확산되니까 판소리를 좋아하는 수용층도 다양해지고 판소리 광대들도 세련되어져서 한 단계 높은 수준의 판소리가 발달하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초기에는 그냥 야한 얘기를 상스러운 표현으로 막 표현하던 것이 한문을 배우고 먹물 먹은 사람들이 판소리를 좋아하게 되니까 가사의 표현방법이 한문투로 바뀌고 같은 내용이라도 중국의 고사를 끌어다가 명분 있게 표현하는 방법이 사용되게 되었을 것이다. 또 음악적으로도 기존의 토속적인 음악언어 외에 젊잖은 음악언어와 다양한 음악언어를 수용하여 보다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도록 발달시켰을 것으로 본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설의 내용이나 음악의 내용이 훨씬 유교적인 가치관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재미위주로 발달했던 판소리가 재미와 명분을 함께 지닌 판소리로 발달하면서 판소리에 대한 미학과 함께 판소리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12마당 즉 12개 이상의 작품으로 발달했던 판소리가 이 시기로 내려오면 5마당 정도로 줄어드는 현상이 일어난다. 정절(貞節)을 중시한 춘향가나 효심(孝心)를 그리는 심청가가 인기를 얻으며 가꾸어진다. 횡재하는 얘기에다가 형제의 우애를 내용으로 하는 흥보가는 재미의 요소와 교육적인 내용을 함께 담고 있어서 또한 널리 알려 지게 된다. 수궁가 역시 토끼의 위기극복의 지혜가 재미를 주는가하면 별주부의 충성스러움이 유교의 덕목과 합치한다. 적벽가는 가장 많이 읽히는 삼국지의 한 부분을 판소리로 각색하여 인정과 의리의 문제를 잘 그리고 있어서 또한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이런 내용들을 표현하기 위한 음악의 언어는 우선 가곡의 음악요소를 상당부분 판소리가 수용하게 되고 경기 토리나 경상도 토리도 판소리가 수용하게 된다. 그러면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토속적이고 슬픈 정서에서 으젓하고 젊잖은 분위기로 바뀌게 된다. 초기의 판소리가 토속적이고 계면조의 성격이었다면 이 시기의 판소리는 가곡과 경토리를 받아드리면서 평조나 우조의 요소를 많이 가지게 된다. 판소리의 이야기 내용이 명분이 있으면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재편되면서 음악의 내용도 그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음악언어를 받아드렸고 이 모든 것이 청중․관객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연극적인 요소도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소리의 공급자인 광대와 소리의 수요자인 청중들의 상호작용인데 “귀명창이 있어야 진짜 명창이 나온다”는 말도 있지만 과거의 우리 사회에는 “판소리는 이러 이러해야 한다”는 공통된 미학의 틀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함께 발달시킨 판소리가 뚜렷한 흐름을 가지고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신재효의 광대론 신재효(申在孝1812~1884)는 조선조 후기 전라북도 고창출신으로 상당한 재력을 바탕으로 판소리 인들을 후원하고 판소리 사설을 정리한 사람이다. 그가 정리한 판소리는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적벽가․변강쇠가 등이고 그가 지은 단가 사설은 광대가․도리화가 등 30여편에 달한다. 고창에 가면 고창읍성 앞에 신재효가 살던 신재효 고택(중요민속자료 제39호)이 있고 그 바로 앞에 신재효의 호를 딴 동리국악당(桐里國樂堂)이 있다. 동리 신재효는 그 만큼 뚜렷한 판소리에 업적을 쌓았던 인물이어서 “한국의 쉐익스피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높이 평가되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는 많은 광대(판소리를 업으로 삼는 음악가)들을 상대하고 그들에게 자기의 의견을 얘기하기도 하고 직접 가르치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잘 못된 사설을 바로 잡아 준다든지 판소리에 대한 미학적인 기준을 일러주는 일 등은 그의 장기로 하는 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그가 새롭게 시도한 것이 춘향가를 남창(男唱)과 동창(童唱)으로 구분하여 사설을 정리한 것이고 남자만 부르던 판소리를 여자도 부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가 진채선이란 여자에게 판소리를 가르쳐서 경복궁 낙성연에서 ‘방아타령’등을 부르게 한 것은 유명한 일이고 그 진채선 이후에 허금파 강소향등의 여류가 등장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여류 명창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신재효이기 때문에 판소리와 관련된 많은 얘깃꺼리가 전하지만 오늘은 그가 지은 광대가를 통해서 신재효가 가지고 있었던 명창에 대한 이상이랄까 명창의 조건에 대한 얘기를 해 볼까 한다. 광대가는 “고금에 호걸문장 절창으로 지어내어 후세에 유전하나 모두 다 허사로다”하면서 도연명이나 백낙천 같은 이들의 대단한 작품들도 다 허황사설(虛荒辭說)이라면서 차마 못 듣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거려천지(蘧廬天地) 우리행락 광대행세 좋을씨고”하면서 광대가 대단하다는 말을 꺼낸다. “그러나 광대행세 어렵고 또 어렵다. 광대라 하는 것은 제일은 인물치례 둘째는 사설치례 그 지차 득음(得音)이요 그 지차 너름새라.”로 이어지는데 바로 이 대목이 광대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대목이다. 여기서 보면 신재효는 광대를 참 좋은 예능인이랄까 멋진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보았다. 광대란 그 당시 사회에서 천인 계급이었고 살아가기도 어려운 직업이었는데도 신재효는 그 광대들의 멋진 삶을 제대로 간파했던 것이다. 여기서 광대란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을 말한다. 광대란 말은 본래 가면극과 관련하여 많이 쓰이던 말이다. 양반광대 또는 각시광대 같은 경우는 가면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고 고성오광대 가산 오광대하면 가면놀이나 가면극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게 된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 판소리하는 명창을 가리키는 말로 많이 쓰이고 이 경우도 판소리 명창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광대란 말도 앞에 다른 말을 얹어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용례를 보면 그 의미를 더 분명하게 이해 할 수 있다. “진짜광대”․“또랑광대”․“화초광대”․“아니리 광대” 같은 말이 있기 때문인데 신재효가 말하는 광대는 소위 말하는 진짜광대이다. 그러나 크게 이름이 나지 않고 어떤 조그만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기량이 우수하지 못한 광대는 또랑광대라고 비하해 말하기도 하고, 소리는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인물이나 팔아 먹고사는 광대는 화초광대라고 한다. 또 소리 중심으로 수준 높게 판소리를 하지 않고 재담이나 늘어놓으며 이야기만 계속하는 광대는 아니리 광대라고 한다. 이런 광대들은 바람직한 광대가 아니다. 그래서 신재효는 광대가 기막히게 좋은 것이지만 광대 되기가 너무나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재효가 말하는 광대의 조건은 무엇인가?. 첫째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물은 천생(天生)이라 변통할 수 없다고 했다. 둘째는 <사설치례>라고 했는데 광대가에서 말하는 사설은 이런 것이다. “사설이라 하는 것은 정금미옥(精金美玉) 좋은 말로 분명하고 완연하게 색색이 금상첨화(錦上添花) 칠보단장(七寶丹粧) 미부인(美婦人)이 병풍 뒤에 나서는 듯 삼오야(三五夜) 밝은 달이 구름 밖에 나오는 듯 새눈 뜨고 웃게 하기 대단히 어렵구나” 그냥 읽어서는 무슨 뜻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러나 판소리에 있어서 사설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광대는 그러한 사설을 짜기도 하고 멋진 시어(詩語)를 구사할 줄도 알고 같은 내용이라고 더 멋있게 더 분명하게 표현해야 듣는 사람들이 감동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 시대의 광대들은 즉석에서 판소리의 내용을 창조적으로 짜서 부르는 것이 유행했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 창조의 역량중에서 가사를 짜는 문학적 역량을 사설치례라는 말로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설치례 다음이 <득음(得音)>이라는 것인데 광대가에서 말하는 득음은 이런식으로 되어 있다. “득음이라 하는 것은 오음(五音)을 분별하고 육율(六律)을 변화하여 오장(五臟)에 나는 소리 농락(籠絡)하여 자아낼 제 그도 또한 어렵구나.” 여기서 ‘오음을 분별하고 육율을 변화’한다는 것은 음악의 언어방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작곡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하면 되겠고 ‘오장에 나는 소리 농락하여 자아낼제’는 그러한 음악내용을 실제 소리로 표현하는 표현기교와 발성등을 말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그러니까 광대에게 있어서 득음을 했다는 것은 판소리를 하는데 필요한 소리를 자유자재로 낼 수 있는 발성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뜻도 되지만 가사의 내용을 음악으로 작곡하는 작곡능력도 함께 갖추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리고 맨 마지막이 <너름새>라고 했는데 광대가에서는 “너름새라 하는 것은 귀성 끼고 맵시 있고 경각(頃刻)에 천태만상(千態萬像) 위선위귀(爲仙爲鬼) 천변만화(千變萬化) 좌상(座上)에 풍류호걸 구경하는 노소남녀 웃게 하고 울게 하니 어찌 아니 어려우며”라고 하였다. 너름새는 연기에 해당하는 몸짓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순식간에 신선이 됐다가 귀신이 됐다가 할 수 있어야 하고 천변만화하는 표정과 몸짓으로 모든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명창은 <인물>을 잘 타고 나야 하고, <사설>을 잘 짜고 멋 있게 표현하는 문학적 창작능력이 있어야 하고 ,작곡능력이 있어야 하고 소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득음>이 되어야 하고 연기와 몸짓을 통하여 청중을 웃기고 울릴 수 있는 <너름새>를 잘 하여야 한다는 것이 신재효의 광대론이다. 4. 음악가들의 ‘득음(得音)’ 이야기 ‘득음’이란 말은 판소리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이지만 기악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직역하면 “음을 얻는다” 또는 “소리를 얻는다”가 되어서 마치 ‘발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득음이란 우선은 발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음악가가 음악에 필요한 소리를 충분하게 낼 수 있게 되는 것이 첫째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득음은 발성문제만 해결하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신재효가 ‘광대가’에서 말한 득음에 관한 것을 살펴보면 “득음이라 하는 것은 오음(五音)을 분별하고 육율(六律)을 변화하여 오장에서 나는 소리, 농낙하여 자아낼 제 그도 또한 어렵구나”라고 하였다. 여기서 보면 득음은 오음을 분별하고 육율을 변화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 먼저 나오는데 이것은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음악언어의 구조를 훤히 알아서 가장 합리적인 표현방법을 구사할 줄 아는 작곡능력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오장에서 나는 소리”란 입이나 목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온 몸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이고 “농낙하여 자아낼 제”란 자유자재로 멋지게 꾸며내는 소리라고 생각하면 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그러니까 득음이란 그냥 소리만 잘 내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속’을 훤히 알고 합리적으로, 멋지게, 온몸으로 마음껏 소리를 낼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득음을 해야 한다. 그런데 득음이 그렇게 쉽지 않다. 실제 음악가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득음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만큼 득음은 음악가가 반드시 해결하여야 할 문제이다. 음악가들은 그 득음을 위해서 각기 독특한 혼자만의 연습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흔히 <독공>이라고 하여 매일 매일 계속되는 장기간의 연습도 있고 ‘100일 공부’처럼 집중적으로 온통 연습에만 매달리는 방법도 있다. 장우벽(1735~1809)은 영조 때 활약한 가곡의 대가인데 매일 인왕산 바위 위에 올라앉아 장안을 굽어보며 노래를 불렀다 하고 김계선(1891~1943)같은 대금의 명인은 매일 새벽 서울의 남산에 올라가 대금을 연습하였다고 한다. 이들이 연습할 때에는 같은 음악을 반복하여 연습하는데 대개는 신발을 벗어 놓고 조금만 조약돌을 모아다가 한번 불고 돌 하나 신에 넣고 또 한번 불고 돌 하나 신에 넣고 하면서 연습하여 조약돌이 신 하나가득 수북하게 쌓이면 산을 내려 왔다고 한다. 그 만큼 계속 같은 음악을 반복 연습하는 가운데 악기를 다루는 기술이 능통하게 되고 또 ‘음악 속’도 훤하게 알게 되어 무슨 악기든지 다룰 수 있는 힘과 음악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함께 배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과 달리 대부분의 판소리 명창들은 집중적인 훈련을 통하여 득음 하였다는 얘기가 많이 전한다. 박동진 명창만 하드라도 100일 공부한 얘기가 유명하다. 박 명창은 처음 소리를 배운 다음 이곳 저곳 다니면서 소리선생도 하고 조그만 자리의 소리도 하면서 조금은 방탕하게 한동안 지냈는데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그러한 생활을 크게 반성하고 고향에 돌아가 100일 공부를 시도하였다고 한다. 부친에게 그러한 결심을 얘기하고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게 부탁해놓고는 혼자 산 중턱에 움막을 짓고 독공에 들어갔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는 하루 종일 소리만 하는 맹훈련이었다. 그런데 판소리 명창들의 훈련방법은 전력을 다해 통성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연습하기 때문에 목에 무리가 가게 된다. 그러면 자연 목이 잠기고 소리가 잘 나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몸에도 무리가 누적되어 병이 나게 마련이다. 박 명창도 그렇게 맹훈련을 하는 중에 몸이 붓고, 이가 솟고, 목이 잠기어 소리가 나오지 않는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고비란 것이 말이 쉽지 본인으로서는 이렇게 소리하다가 산에서 죽는가보다 할 정도로 꼼짝달싹 하지 못하고 앓아 눕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마음은 오직 득음에 있을 뿐 몸이 아프고 괴로운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런 상태에서도 계속 쉬지 않고 소리를 질러 대며 소리를 끌어내려고 애 썼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몸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박동진도 마지막에는 소리는커녕 몸을 움직이지 조차 못하고 죽은 듯이 늘어져 있게 되었는데 마침 박동진의 부친이 혹시나 하고 찾아오셨더라 는 것이다. 박동진은 평소에 그럴 때에는 인분 거른 물을 마시면 낫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기에 그의 부친에게 인분 거른 물을 가져다 달라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마셨는데 정말이지 금방 몸의 부기가 빠지고 회복의 기미가 보이게 되어서 다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면서 백일공부를 마쳤다고 한다. 박동진 명창은 이 백일공부를 통하여 득음했다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계기로 그 전과는 훨씬 다른 생활태도와 오직 판소리에만 정진하는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대 명창이 된 것이다. 함동정월이라는 가야금의 명인도 연습을 많이 하기로 소문난 분이다. 함 여사가 김명환씨와 함께 살 때에는 식전에 한 바탕 오전에 두 세 바탕 식으로 거의 종일을 가야금 산조를 몇 바탕씩 타면서 생활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생활이 온통 연습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함 명인은 보통 사람보다 왼팔이 더 굵고 강하게 발달했고 그녀가 타는 가야금은 줄을 보통 가야금 보다 훨씬 되게 죄어 줄을 고르기 때문에 다른 가야금 연주자들은 그 가야금을 타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 만큼 늘 같은 곡을 반복하여 타면서도 계속 그 음악의 삼매경에 들어가 음악의 여행을 하기 때문에 지루하기는커녕 늘 새로운 음악의 체험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음악가들의 경우 연습을 한다는 것이 무슨 장단을 지키고 곡조를 익힌다는 차원이 아니다. 그 산조라는 음악 속에 들어가 장단과 어우러지면서 차츰 차츰 죄이고 절정을 이룬 다음에는 풀고 또 죄이고 풀고 하면서 마음과 몸이 혼연일체가 된 음악여행을 즐기는 것이다. 그렇게 공력을 쌓아 나가기 때문에 이런 분들에게 있어서 음악은 생활이고 도(道)이고 인생 그 자체인 것이다. 또 그런 과정을 통해서 득음을 하고 음악가가 되고 그들의 음악이상에 접근해 갔던 것이다. 득음에 대한 일화는 판소리 명창들에게서 많이 찾을 수 있다. 폭포에 가서 소리를 지르면 처음에는 자기 귀에도 안 들리던 소리가 나중에는 그 폭포 소리를 뚫고 멀리까지 들렸다는 얘기도 얼마든지 있다. 이런 것이 음악가들의 득음과 관련한 얘기들이고 이러한 과정이 국악인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기에 소개하였다. 5. “이면”이라는 용어의 의미 국악에서는 “이면”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면에 맞는다”든지 “이면에 맞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럴 경우 그 이면이란 말의 한자(漢字)는 理面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다. “이면에 맞는다”는 것은 대개 이치(理致)에 합당하다는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판소리를 하는데 엎드리어 땅을 치면서 통곡하여야 할 대목인데 그 소리를 그냥 뻣뻣하게 서서 부른다면 그것은 “이면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춘향가를 창극으로 하는데 춘향을 남자로 하고 이도령을 여자로 했다면 그런 것도 “이면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이면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면에 맞는 소리”라고 하면 좀 복잡해진다. 판소리에서 좋은 소리인지 좋지 않은 소리인지를 따질 때에도 이런 말을 쓰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는 그 “이면에 맞는 소리”라는 말이 일종의 미학용어처럼 사용되는 것이다. “천리만리”라는 가사를 표현하는데 “천리”는 좀 짧게 부르고 “만리”는 더 길게 “마아아아알리”로 부르는 것이 “이면에 맞는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놀보가 흥보를 나가라고 할 때에는 막 내쫓는 것이니까 ‘우조’로 불러야 이면에 맞고 흥보가 쫓겨 나갈 때에는 슬픈 마음으로 부르는 대목이니까 ‘계면조’로 불러야 이면에 맞는다. 말하자면 슬픈 대목에서는 슬픈 소리로 부르고 기쁜 대목에서는 기쁜 소리로 부르는 것을 이면에 맞는 소리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판소리의 극적인 흐름이 ‘어사 출도’ 대목처럼 바쁘게 도망가고 법석을 떨 때에는 그런 극적 상황에 합당하게 빠른 장단으로 노래하고 한가하게 광한루에 올라 사방 경치를 살펴보는 ‘적성의 아침 날’ 같은 대목에서는 느린 진양조로 부르는 것이 “이면에 맞는 소리”를 하는 것이 된다. 만약 그런 상황을 거꾸로 생각하여 ‘어사 출도’ 대목을 진양조로 느리게 부르고 ‘적성의 아침 날’을 빠른 휘모리장단으로 부른다면 그것은 이면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극적인 내용에 따라서 장단을 어떻게 배열하느냐 하는 것도 이면에 맞게 배열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가사의 내용이나 극적인 상황에 맞게 소리를 짜고 부르는 것을 “이면에 맞는 소리를 한다”고 하는 것이다. “ 이면에 맞는 소리”란 말은 작곡의 미학용어가 되기도 하고 연주의 미학용어가 되기도 한다. 이럴 경우 이면이란 말의 한자는 理面보다는 裏面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본다. 나는 어느 날 아침 산을 오르다가 문득 그 “이면”을 깨닫게 되었다. 이면의 한자는 理面․裏面․二面을 두루 써도 될 만큼 세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판소리 명창들이 “이면에 맞다”라는 말도 쓰고 “이면에 맞는 소리”라는 말도 쓰고 또 “이면을 그린다”는 말도 쓰는데 이 세 가지의 경우 그 <이면>이란 말의 뜻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결국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어느 한 가지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면>이란 용어는 한문(漢文)을 많이 쓰는 전통사회 시절부터 써 온 용어이다. 분명 한자로 된 성어(成語)인데 그 동안 국악계에서는 그 한자에 대한 논의도 없었고 또 어느 것이 옳은지 한자로 표기하는 예도 거의 없었다. 그냥 “이면”이란 말을 써 오기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용어가 한문성어(漢文成語)인 것이 분명한 이상 한문으로 따져 보아야 하는데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생각해 보니까 “이면”이란 말의 한문은 앞서 예를 든 세 가지 한문이 다 해당하는 용어라는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그 동안 판소리계에서 “이면”이란 말의 한문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렇게 복합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떻게 보기에 “이면”이란 말에 세 가지 한문의 뜻이 다 있다는 것일까?. 먼저 “이면”을 二面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필요하다. 사전 조건이라는 한 면과 그것을 나타낸 현상으로서의 한 면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가사(사설)라는 사전 조건을 음악으로 작곡했을 때의 현상이 서로 잘 맞으면 “이면에 맞는 소리”가 된다. 또 그 작품을 합당하게 창(唱)으로 표현했을 때에도 “이면에 맞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작곡이 잘 되었다든지 창으로 잘 표현되었을 때에는 그것이 “이치에 합당하게 된 것”이니까 “理面에 맞는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 되기도 한다. 또 그렇게 작곡이 잘 된 ‘소리 대목’을 잘 표현한 연주가 이루어졌을 때 “이면을 잘 그렸다”고 말하는데 그런 경우의 “이면”은 한문의 裏面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전 조건과 표현된 현상이 잘 맞으면 “二面이 잘 조화된 것”이고 “裏面을 잘 그린 것”이고 또 “理面에 맞는 소리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아이디어는 음악이란 표현의 예술이기 때문에 무엇을 표현했을 때 그 <표현된 내용>은 결국 <사전 조건을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 사전 조건이란 판소리의 경우 가사의 내용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그 가사를 어떤 기준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춘향가의 ‘신연맞이’대목을 동초 김연수명창은 세마치라고 하는 빠른 진양조장단으로 작곡했는데 다른 판소리 작품들은 대부분 자진모리로 되어있다. 이런 것이 바로 같은 사설이지만 작곡자의 해석에 따라서 다른 조건이 되어 다른 현상으로 나타나는 예이다. 해석의 문제 역시 중요한 것이지만 <사전 조건>에 포함시키면 된다. 그 동안 판소리에서 “이면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 평가 점수에서 불가(不可) 판정을 받은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 만큼 “이면에 맞는 소리”를 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면에 맞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민속악에서 “이면의 뜻을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음악에 대한 안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여러분께서는 “이면”이 한문성어로 ‘二面’․‘裏面’․‘理面’의 뜻을 함께 가진 포괄적인 용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사전 조건>과 <표현된 현상>이 잘 조화되었을 때 “이면에 맞는 소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6. 20세기에 출현한 새로운 공연물 <창극> 한국의 20세기는 외래 문물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온 한 세기였다. 1900년대의 시작은 대륙으로부터 들어오는 중국문화의 영향력이 감소되는 한편 일본을 거쳐 들어오는 서양문화의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는 한 세기였다. 이런 문화의 변혁기에 나타나는 새로운 공연물이 앞으로 얘기하려고 하는 우리의 ‘창극’이다. 창극은 ‘창(唱)’과 ‘극(劇)’이 합쳐진 공연물이다. ‘음악극’이라 말해도 좋고 ‘창악인들이 개발한 연극성이 강한 공연물’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창극 이전에도 우리에게는 훌륭한 음악과 극을 결합시킨 공연물이 있었다. 판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판소리는 가장 경제적으로 큰 효과를 내는 수준 높은 공연물인데 한 사람의 명창(가객)과 한 사람의 고수가 공연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몇 백 년 동안 이러한 판소리를 다양하고 수준 높게 발달시켜 많은 사람들이 즐기게 했다.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등이 다 그러한 판소리 작품들 아닌가?. 그런데 20세기를 맞으면서 우리네 판소리와 다른 외국 공연물이 서울에서 공연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의 청계천2가쯤에 해당하는 수표교 다리 건너편의 청국관에서는 중국의 전통 연극이 자주 공연되었고 1902년에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가 나중에 원각사라고 부르게 되는 서양식의 극장이나 광무대․연흥사․단성사․장안사 같은 서양식 극장에서도 일본의 신파극이나 가부키나 신연극 등이 자주 공연되었다. 이처럼 극장이 많아지고 그런 곳에서 새로운 공연물을 공연하는 것 자체가 우리 문화계에 던져주는 변화의 파장은 클 수밖에 없었다. 창극의 시작 1902년에 지어진 협률사는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극장이다. 처음에는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식 축하 공연을 그곳에서 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궁중 소속으로 있는 관기(官妓)나 예능이 뛰어난 예기(藝妓)들을 모으고 경․서도 명창이나 판소리 명창들을 모아서 다양하고 큰 공연 준비를 한다. 첫 번째의 공연은 전염병이 돌게 되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왕실이 지은 신식 극장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돈을 받으며 공연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초창기의 공연물들은 기생들의 노래나 춤과 경기명창들의 재담과 판소리하는 사람들이 배역을 나누어 하는 창극 등이 주 공연물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협률사는 1906년에 문을 닫게 되고 1908년에 협률사를 내부 수리하여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관하게 되는데 이 때의 운영진은 친일세력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인직을 비롯한 친일 연극인들이 원각사를 무대로 신연극 등을 공연하였는데 그래도 그 곳에는 김창환 등의 명창 40명과 기생 24명이 이동백을 단장으로 하여 전속 단체를 구성하고 판소리․민속무용․창극 등을 공연하였다. 그리고 1909년 말 원각사의 전속 단체마저 폐지되자 협율사 명창들은 김창환․강용환․유공열 등을 중심으로 하는 파와 송만갑․이동백․김창룡 등을 중심으로 하는 파로 나뉘어 전국 순회 공연에 들어간다. 이 협률사의 공연이 전국적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창극 보급에 크게 공헌하지만 1910년 한․일 합방이 발표되자 모두 공연을 중단하고 흩어지게 된다. ‘창극’이라는 이름의 유래 창극이라는 명칭도 1910년대에는 신연극(新演劇)이나 신파극에 대한 구연극(舊演劇) 또는 구파극(舊派劇)이라고 했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가 되면서 조선성악연구회가 발족되고 판소리와 창극을 개발한 것이 새로운 공연물로 각광을 받게 되는데 이 무렵에는 판소리나 창극 모두를 창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말하자면 정노식은 판소리의 역사를 쓰면서 「조선창극사」라고 했고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창극좌’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만들어 창극 활동을 하였다. 그러니까 창극이라는 용어는 한동안 판소리와 창극을 함께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창극이 인기를 얻고 많은 창극단이 생긴 다음 해방을 맞으면서 서양적인 것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니까 창극이라는 말 대신 국극(國劇)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게 되어 ‘여성국극단’이 생겨나게 되고 또한 인기를 얻게 된다. 이런 연유로 현재의 국립창극단이 1962년 국립극장 소속 단체로 처음 발족할 때에는 국립국극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국립창극단’이라는 명칭은 1973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이름이다. 초창기의 음악극은 판소리를 하는 남도명창들에 의하여 개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국관에 가서 중국의 경극 등을 자주 구경한 강용환은 원각사라는 새로운 무대가 만들어지고 판소리인들이 함께 공연할 공연물을 모색할 때에 <춘향전>을 입체창으로 하여 여러 사람이 배역을 나누어 연극에 가까운 공연물을 만든 것이다. 지금의 창극과는 훨씬 다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춘향전>이라는 판소리를 그냥 그대로 배역만 나누어 여러 사람이 창을 하는 음악극인 것이다. 그래서 그후에 등장하는 ‘창극’이란 말이나 ‘국극’이란 말이 다 판소리인들이 판소리를 바탕으로 하는 음악극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요즘은 ‘창극’이라는 말이 서양음악에서 사용하는 뮤지컬이나 오페라와 다른 우리 나라 음악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음악극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경․서도 명창들이 창작 창극으로 공연한 <남촌별곡(南村別曲)>도 창극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었고 경기명창들이 만들어 공연한 <장대장타령>도 역시 창극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창극’이라는 용어가 전통음악을 사용하는 음악극 모두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되어 가고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창극의 시발점 ‘협률사’ ‘협률사’라는 용어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 유명한 이화중선도 남원에 협률사가 들어와서 공연하는 것을 보고 집을 뛰쳐나와 판소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했고 많은 명창들이 협률사의 순회공연에 대단한 감동을 받고 명창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협률사라는 명칭도 처음에는 1902년에 국고에 해당하는 왕실의 내탕금(內帑金)으로 지은 극장 이름이었는데 나중에는 송만갑의 협률사처럼 창극의 공연 단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박황은 ‘협률사’라는 용어가 중국인들이 쓰는 ‘협률창희(協律唱戱)’에서 온 말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데 백현미도 협률사라는 용어의 한자가 ‘協律社’나 ‘協律司’로 쓰이고 있어서 그 뜻이 극장을 가리키는 것인지 무슨 회사와 같은 단체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조직의 한 부서를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고 한 바 있다. 어쨌든 협률사라는 용어는 우리네의 창극이 처음 출발하는 출발점과 함께 나타나는 중요한 용어이고 그 뜻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던 것은 틀림없다. 때문에 가능하면 협률사의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고 창극이라는 명칭도 제대로 알고 사용하면 좋으리라고 생각된다. 역사란 과거의 기록이지만 미래를 위하여 꼭 알아야 하는 것이다. 창극을 제대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반드시 창극이 걸어 온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창극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형성되었는지 미래의 창극은 어떻게 가꾸어 가야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창극이 걸어 온 역사를 재조명해 보고 반성하고 비판하면서 새 시대에 맞는 창극다운 창극 만들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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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31
  • 중국음악과 한국음악의 본질적 차이
    나는 어려서 한문을 배웠다. 어머니께서는 아침에 일어나서 글(한문)을 외우지 않으면 아침을 차려주시지 않을 정도로 매일 한문공부를 독려 하셨다. 그 덕분에 한문을 배운 것이 나의 일생에 큰 보탬이 되었는데 좀 더 열심히 배우지 않은 것을 늘 아쉽게 생각하고 후회스러워 한다. 한문은 그 글 자체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깨달음의 양이 축적되어 간다. 어쩌면 글을 통하여 깨달음의 기쁨을 맛보기 때문에 옛날 선비들은 끼니를 굶으면서도 독서삼매경에 빠질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런 나의 한문경험은 나의 음악생활에도 전이(轉移)되어 음악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 재미로 음악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악은 한문과 통하는 면도 많지만 체험을 계속할수록 많은 깨달음을 갖게 한다. 그래서 재미있고 재미있으니까 계속하게 되고 그러니까 나는 참 행복하게 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있을 당시 동료들과 함께 중국어를 공부한 적이 있다. 중국어를 배우면서 깨달은 것은 중국어가 우리말과 전혀 다르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말의 70%이상이 한문성어이기 때문에 중국말과 한국말이 비슷한 것으로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언어의 어법은 전혀 다른 것이 중국말과 한국말의 관계였다. 말과 음악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달한다는 것이 나의 시각이고 악학궤범의“노래는 말을 길게 하여 음률에 맞춘 것이다.”라는 구절도 그러한 나의 생각과 같은 맥락이므로 중국말과 한국말의 차이를 깨달으면서 바로 중국음악어법과 한국음악어법의 차이를 깨닫게 되어 꽤 큰 기쁨을 맛 볼 수 있었다. 중국말은 성조(聲調)가 있다. 사성(四聲)이라 하여 네 가지 성조로 나뉘는데 1성 2성 3성 4성하는 것이 바로 그 성조라는 것이다. 성조는 중국어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같은 소리라도 성조에 따라서 뜻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같은 “마”라도 성조에 따라서 뜻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뜻이 달라지면 한문의 글자도 달라진다. 그러니까 그냥 한글로 “마”라고만 써 놓으면 중국어로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되어있다. 반드시 성조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 그 만큼 성조가 중요한데 그 성조는 따지고 보면 음의 높낮이(高低)와 관계가 깊다. 4성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다섯 높이의 음을 편의상 계명의 ‘도’‘레’‘미’‘화’‘솔’로 대신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성은 ‘솔’‘솔’과 같은 식이어서 제일 높은 음역이고 2성은 ‘미’에서 ‘솔’쪽으로 밀어 올리는 소리이다. 3성은 ‘레’‘도’‘화’쯤으로 휘어져 내려오다가 올라가는 소리이고 4성은 ‘솔’‘도’와 같이 고음에서 저음으로 꺾어 내리는 소리이다. 결국 4성은 음의 높낮이(Pitch)와 관계가 깊은 것이다. 중국말은 같은 “마”라도 1성은 媽로 어미를 의미하고 2성은 麻로 삼베를 의미하고 3성은 馬로 타는 말을 의미하고 4성은 입구(口)두개 밑에 말마(馬)자를 쓴 글자로 꾸짖을 마 욕할 마로 읽는다. 그러니까 성조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의”라는 음도 마찬가지이다. 1성은 衣로 옷을 가리키고 2성은 夷로 오랑캐를 뜻하고 3성은 椅로 의자를 뜻하고 4성은 意로 마음에 의도한 뜻을 의미한다. 음악 하는 사람이 들었을 때에는 음의 고저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도 고저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중국의 방송을 들어 보라. “땅 땅 다다당 땅 땅 당 땅” 하면서 온통 한 박 단위로 진행한다. 우리음악의 리듬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작곡된 중국음악어법의 작품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문묘제례악이 바로 그런 작품인데 그 음악은 하루 종일 黃 - , 南 - , 林 - 하는 식으로 같은 길이로만 연주한다. 다른 길이는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악보를 만들 때 길이를 표시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율명(律名)만 적어놓으면 악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은 어떤가? 같은 소리라도 길이가 달라지면 뜻이 달라진다. 길게 “장-”하면 長이나 壯등의 글자를 써서 어른이나 씩씩한 것을 뜻하게 되고 짧게 “장”하면 場과 같은 글자를 써서 장소를 뜻하게 된다. 말하자면 같은 소리라도 길고(長) 짧음(短)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그래서 음악도 장단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한국음악은 장단만 있으면 되는 음악도 있다. 농악이 바로 그런 음악이다. 단-따 단-따 단-따 다단- / 다단- 다단- 단-따 다단- / 하고 쳐 나가는데 그 자체로서 훌륭한 음악이 된다. 장음과 단음의 비율은 2 : 1쯤 되는 것이어서 우리음악의 진행내용은 온통 장음과 단음의 조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농악은 장단만으로 이루어지는 음악이지만 노래도 가곡이나 시조는 5박 계통 장단과 8박 계통 장단으로 되어있는데 그것이 다 장음과 단음의 결합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음악이다. 중국음악과 한국음악의 기본적인 차이점은 중국말과 한국말의 차이처럼 중국음악이 고저중심의 음악인데 비하여 한국음악은 장단중심의 음악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중국의 음악이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화하는 과정도 고저중심의 음악어법이 장단중심의 음악어법으로 바뀌는 것이다. 고려 때 들어온 보허자(步虛子)나 낙양춘(洛陽春)이 그런 식으로 한국화한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 전통음악 가운데 중국음악어법의 음악과 한국음악어법의 음악을 구별하는 것은 아주 간단히 해결된다. 같은 유교제례의 음악이지만 문묘제례악은 중국음악어법으로 작곡한 음악이고 종묘제례악은 한국음악어법으로 작곡한 음악이다. 세종 때에는 유교음악을 중국식으로도 작곡할 수 있었고 한국식으로도 작곡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 한국음악어법으로 작곡할 수 있는 음악가가 얼마나 있을까? 우리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음악어법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음악어법을 발견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데 그런인식이 부족한듯하여 늘 안타까운 마음이다. 세종께서 훈민정음을 만들게 된 것은 우리말과 중국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동기이고 정간보를 만든 것은 그런 말을 바탕으로 발달하는 우리음악과 중국음악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동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서양말과 우리말의 다른 점을 아는 것이고 그런 말을 바탕으로 발달하는 서양음악과 우리음악의 다른 점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글의 소중함이나 국악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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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31
  • 한국음악의 정체성을 찾아야
    사람은 반성할 줄 아는 존재이고 반성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때 새로운 삶이나 창조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도 간단해 보이는 문화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세종께서는 우리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外來의 漢文을 우리글처럼 한국화하고 표준화할 수 없을가 하고 많은 학자들과 함께 심혈을 기우려 연구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연구와 토론을 거듭하는 동안에 세종은 중국글은 중국말을 적는 글이어서 중국말과 다른 우리말을 그대로 적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듯 하다. 그것이 훈민정음 서문 초두에 잘 나타나 있다. 중국문화의 정체성과 한국문화의 정체성이다르다 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다음에 취할 태도는 간단하게 결정될 수 있다. 우리말의 정체성에 맞는 우리글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훈민정음이라는 우리글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에대한 반성과 깨달음이 위대한 창조를 낳게 된 것이다. 국악관현악단의 설치와 운영에 대해서도 많은 반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국악관현악단은 서양의 심포니오케스트라를 흉내내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전에 김기수의 송광복 같은 작품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서양음악을 부러워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이후 한국의 국악관현악 운동은 그 조직․규모․운영방식․작품․연주에 이르기 까지 거의 모든 것을 서양 관현악단의 그것에 준해서 하게 되었다. 여민락이나 수제천과 베토벤의 교향곡은 엄청나게 다르다. 악기도 다르고 선율도 다르고 박자나 리듬도 다르고 연주하는 방식도 다르다. 기존의 우리 합주와 서양음악의 합주는 그렇게 다르다. 공통된 점은 여러사람이 악기를 가지고 함께 음악을 만들어 낸다는 것인데 그것도 서양은 지휘자 한 사람의 음악을 만드는 것이고 우리는 연주자 모두의 음악을 만드는 것이니까 그것마저 다르다. 이 처럼 다르게 발달한 것은 피차의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고 문화란 서로 다르게 발달하여 다양성을 갖는 것이 특징이다. 문화는 다양한 것이기 때문에 문화를 가꾸는 방법도 그 다양성을 최대한 살려서 서로 다른점을 부각시킬 때 문화가 발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저것을 흉내내고 저것이 이것을 흉내내면 이것도 저것도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영어는 영어대로 가꾸고 우리말은 우리말대로 가꾸어야지 영어와 우리말을 뒤 섞어놓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문화는 다른점․구별되는점․ 차별성․특징․개성등이 생명처럼 되어있는 것이고 그것을 살리면서 가꾸어 나갈때 문화가 발달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국악관현악은 어떤가? 거의 모든것을 서양관현악처럼 하고 있지 않은가?. 제일 중요한 작품이 서양음악어법으로 서양음악양식을 빌어 작곡한 것이 대부분이다. 악기만 국악악기를 사용하지 지휘자가 연습시키는 과정이나 사용하는 악보까지 서양의 기보법을 쓰고 있다. 악기까지 서양악기 비슷하게 바꾸어가며 서양음악에 가까운 국악관현악을 할려고 하는 의욕을 보이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 아닌가?. 국악악기를 써야할 타당한 이유마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악기란 음악을 하는 도구이지 그 자체가 음악의 목적도 아니다. 국악악기로 서양음악의 효과를 내고 싶고 국악관현악으로 서양음악식 작품을 하고 싶으면 서양악기를 써야지 왜 국악악기를 쓰는가?. 예술에는 완성도가 중요한 것이고 예술계에는 1등만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국악악기로 서양음악식 음악을 연주하는 관행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혹자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하고 오히려 이런말 하는 나를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할런지 모른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는 우리다운 우리의 <음악언어>가 있고 그것이 우리의 음악사상과 결합하여 발달시킨 대단히 수준높은 우리의 <음악미>가 있다. 우리의 음악언어로 우리의 음악미를 만들어내는데 도구로 쓰이는 것이 우리의 악기이다. 그래서 악기는 우리의 음악미를 표현하기에 좋도록 발달한 것이지 우리의 지능이 모자라서 악기가 덜 발달한 것이 아니다. 악기만으로 따진다면 악기는 하나의 도구이기 때문에 음악가가 우리의 음악미와 다른 서양식 음악미를 추구할 때에는 악기를 그렇게 바꾸든지 아예 서양악기를 사용하든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우리의 현실에 대한 인식은 나라고 하여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본다. 다만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의 작곡가들이 우리의 음악어법을 사용하여 우리의 음악미를 구현하는 작품을 작곡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 주었으면 한다. 음악어법과 음악미라는 필요조건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을 때에는 음악어법을 우리의 음악어법으로 사용하라고 권하고 싶다. 음악미란 경우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지만 음악어법만은 유사이래 우리의 음악어법을 계속 유지 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음악역사에는 중국음악을 수입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 중국음악어법의 궁중음악을 작곡하여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많은 중국음악어법의 음악이 지금은 ‘문묘제레악’ 하나만 남기고 다 없어지지 않았는가?. 중국에서 들어온 해금이나 아쟁등은 우리음악어법을 잘 표현하면서 우리악기로 자리잡았지만 이질적인 중국음악어법의 음악은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다 없어져 버렸다. 그 만큼 음악어법은 음악의 문화적동질성 (정체성)과 관계가 깊은 것이다. 이 땅의 음악은 우리문화와 동질관게에 있는 우리의 음악어법으로 된 것이 지속되고 외래음악일 경우 우리음악과 동질적 요소가 많으면 오래 살아 남지만 이질적요소가 많으면 한국식 음악어법으로 바뀌어 존속하던지 아니면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다가오는 21세기 정보화 시대는 동시에 문화경쟁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문화경쟁의 시대에는 고유성이 있는 자기문화를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지 남의 문화를 배워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각국은 자기나라의 문화언어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중인데 우리는 국악관현악단 마저도 우리음악언어를 버리고 남의 나라 음악언어로 음악행위를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우리의 음악언어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음악의 기본 조건이고 그 언어로 우리의 음악미를 표현할 때 완성도 높은 음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기도 마찬가지이다. 국악악기로 애국가를 연주하는 것이나 풀륫으로 청성곡을 연주하는 것은 발레 동작으로 살풀이 춤을 추는 것 만큼이나 완성도가 떨어져서 좋지 않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연주행위는 감동을 줄 수 없다. 우리의 국악관현악단이 무슨 무슨 명분을 내걸고 연주회를 해도 감동의 순간의 극히 적은 것은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우리 국악관현악단들이 당장 어떻게 해야 좋을까?. 우선은 생각을 바꾸어야 된다. 지금까지의 관행이나 음악행위에 대한 반성과 함께 패러다임을 바꾸는 사고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특히 서양음악에 대한 열등감을 떨쳐버리고 당장은 불편하더라도 우리의 음악언어를 가꾸고 우리의 악미를 표출할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형편을 핑계대고 편의주의로 적당히 땜질만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안일한 태도는 버려야 한다. 환골탈퇴의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생각을 바꾼 다음에 해야 할 일은 구체적으로 정체성이 있는 작품을 개발하는 일이다. 수제천과 같은 고양된 정서를 표현하는 작품도 시도해 보고 시나위처럼 흐드러지는 정한을 절절하게 표현하는 작품도 시도 해 볼 일이다. 줄풍류와 같은 음악도 시도해 보고 가곡이나 삼현육각과 같은 음악도 만들어 볼 일이다. 종합적으로는 굿판과 같은 공연물이나 제례악과 같은 공연물도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이렇게 권하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아직 버젓이 살아있는 우리음악의 모델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것들을 모델로 하여 작업을 하면서 우리의 현실에 맞는 우리스러운 작품을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다. 서양음악이론에 종속된 음악행위는 되도록 줄여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개발할 수 있는 작품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전개 될 수 있고 그야말로 무한히 열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가능성을 먼저 알고 각 국악관현악단들은 차별화 전략을 시도해야 되리라고 본다. 과거에도 정악위주의 연주단체와 민속악위주의 연주단체는 따로 있었다. 앞으로도 각 악단은 자기 악단의 여건에 걸맞으면서 가장 가능성 있는 작품장르를 몇 가지 선택하여 최고의 완성도 있는 음악을 만들어 가도록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된다. 요즘 막 쓰러지는 우리나라 기업들처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악단은 도태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지나칠 수 없는 것은 국악관현악단이 전통음악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기본은 전통음악을 하는 악단이어야 하고 새로운 시도로 창작품을 해야지 기왕에 있던 좋은 음악을 뒷전에 미루어 두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서양식음악만 계속하게 되면 악단의 수준 자체가 그렇게 떨어지고 만다. 때문에 악단 안에 민요반주 전문 가곡반주 전문 무용반주 전문등의 소 그룹의 운영도 필요하고 악단의 편성자체도 여러가지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조직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단순한 서양식 국악오케스트라가 아니라 국악악단의 다양하고 종합적인 면모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각 악단의 차별화에 앞서서 국악악단의 서양 악단과의 차별화 부터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21세기는 오리지낼리티(고유성)가 있는 문화여야 각광을 받을 수 있는 시대이다. 우리의 독창성이 강하면서 수준높고 다양하게 발달한 전통음악이 빛을 발하게 될 것이고 그런 음악언어로 된 새로운 작품의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미래를 대비한 우리의 국악관현악단의 전략이나 구조조정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에 대한 해답은 하나도 둘도 우리음악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고 우리의 음악언어와 우리의 음악미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고 溫古而知新의 정신으로 항상 현재성이 있는 우리음악을 창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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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31
  • 여류가객 변진심 (최종민의 국악칼럼)
    시조보급에 앞장 선 여류가객(歌客) 변진심한 집에 딸이 다섯이라 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입을 딱 벌릴 것이다. 어떻게 그 많은 여자아이들이 한 집에서 클 수 있을까?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8남매 10남매를 둔 가정이 많았고 여러 형제나 여러 자매가 함께 크는 경우가 많았다. 시조명창으로 여류 가객으로 크게 활동하는 변진심도 딸이 많은 집의 셋째 딸이다. 무엇보다 딸 다섯이 다 국악을 했다는 것이 화제가 될 만하다. 첫째는 변금자로 가야금을 전공하여 전주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둘째는 변영숙으로 역시 가야금을 전공했는데 딸 셋도 모두 국악을 시켜 ‘가야랑’이라는 연주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셋째가 변진심이고 넷째는 거문고를 전공한 한양대학교 변성금교수이다. 그리고 다섯째 역시 해금을 전공하고 서울대 등에서 가르치는 변종혁이다. 위로 오빠가 하나 있고 다음으로 내리 딸이 다섯인데 이처럼 모두 국악을 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이들은 부모가 국악인이어서 국악을 한 것도 아니다. 부모는 음악과 전혀 관계가 없는 분들이다. 다만 집에 피아노가 있을 정도로 환경이 좋았고 모두들 어린 나이 때 유치원을 다니게 한 것이 예능을 일찍이 개발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큰 언니 금자는 중학교 과정까지 무용으로 전주에서 날렸다. 헌데 키가 작으니까 무용보다는 가야금이 유리하겠다하여 전주여고 2학년 때부터 가야금을 하게 된 것이 가야금 전공으로 굳어졌다. 맏언니가 가야금을 하니까 그 밑으로는 자연스레 모두 가야금을 배우게 되어 넷째까지 모두 가야금을 잘 하게 되었다. 그 큰 언니가 가야금을 배우기 위해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국립국악원의 최충웅 등에게 배우고 대학의 여러 교수들에게도 배우는 동안 국악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어 동생들을 줄줄이 국악전공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다. 변성금은 전주에서 성심여중을 나왔는데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진학시켰다. 언니에게 가야금을 배워 가야금을 잘 했기 때문에 가야금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고2 때 학교에서 손 모양을 보고 거문고를 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전공을 바꾸었는데 거문고로 두각을 나타내어 한양대학교 국악과를 장학생으로 졸업한 다음 전주우석대학교 교수로 가 있다가 지금 모교인 한양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 아래 변종혁은 아예 초등학교 학생인 것을 서울로 전학시켜 나중에 국립국악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해금을 전공하고 국립국악원에 연주단원으로 있다가 지금은 대학에서 제자들 가르치는 일과 연주활동을 주로 하고 있다. 변진심은 1954년생이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해서 유명했다. 고등학교 때는 방송에도 나가고 학교행사에서도 독창을 하곤 했다. 시조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노래를 잘 했기 때문이다. 전주에 장상철이라는 분이 학원을 내어 가야금 거문고 시조 등의 국악을 가르치면서 발표회를 준비할 때인데 기악은 출연자가 많았지만 시조를 부를 출연자는 마땅치 않을 때였다. 고1학생인 변진심이 시조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한 달 밖에 안 되었지만 공연무대에 세웠다. 그 때 평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를 불렀는데 끝나니까 어른들이 “월하 월하” 하면서 시조의 명인 김월하 같은 소리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이 후 변진심은 월하라는 시조의 명인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 본인이 시조에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대학으로 진학할 때 시조나 가곡을 공부하는 국악과로 진학할 생각을 해 봤지만 그런 것을 전공할 수 있는 국악과가 얼른 눈에 띄지 않았고 본인도 국악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때였다. 그래서 그냥 성악으로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에 진학했다. 1973년 대학교 1학년 때 서울의 국립국악원에서 제2회 전국국악경연대회가 열렸을 때 변진심은 비전공부문으로 나가서 판소리, 경기창, 서도창 등의 출연자들을 제치고 1등을 차지할 정도로 실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더욱 시조나 가곡과 같은 정가에 관심을 많이 가질 때였는데 둘째 언니가 “성금이와 종혁이 두 어린 동생들을 서울로 데려다 놨는데 마음이 안 놓이니 진심이 네가 가서 밥도 해 주고 동생들 좀 돌봐라”해서 ‘74년 8월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오자마자 처음 찾아 간 곳이 김월하선생님 댁이었다. 인사를 드리고 시조를 했더니 “목소리 참 좋다”하시면서 제자로 받아 주셨다. 김월하선생이 ’73년에 여창가곡의 보유자 되고 고등학생인 김영기와 이승윤을 전수생으로 삼은 지 3개월 되었을 때였다. 변진심은 두 동생들을 돌보면서 가야금 개인지도로 약간의 돈을 벌어서 월하선생님에게 학채를 드리고 꾸준히 여창가곡을 공부했다. 그렇게 2년여 지났을 때 큰 언니(금자)가 와서 “앞으로는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 시대가 올 것이니 다시 복학하여 교사자격증을 받도록 해라”하면서 복학에 필요한 돈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변진심은 다시 전주로 내려가서 성악으로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를 3년 후배들과 함께 ‘80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곧 바로 충남 서산 대산중학교를 시작으로 전북 김제 북중과 여자 상업고등학교 음악교사를 ’84년까지 했다. 그 무렵 뉴질랜드의 웰링턴 대학에서 성악과 국악을 다 하는 변진심을 교환학생으로 초청하겠으니 오라고 했지만 가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좀 남는 일이다. 교직에 있으면서도 김월하선생에게 꾸준히 공부하여 ‘86년에 여창가곡을 이수하였다. 그리고 ’87년부터는 국악예술학교에 정가 강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주당 12시간을 맡아 3일간 학교에 나가 가르쳤다. 그 때 가르친 학생들 중 최진숙, 오정해, 강경아, 조주선 등은 판소리 전공학생들이었지만 지금까지 사제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 이 후 남원정보국악고등학교 강사도 하고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국악과의 여창가곡 강사도 오래 했다. 경연대회에도 몇 번 나갔다. ‘82년 국립국악원 대회 때는 1등인 금상을 받았었고 ’95년에는 제6회 KBS국악대경연대회 정가부문 금상을 받았다. 2005년에는 1년에 한 명씩 시상하는 KBS국악대상 가악상을 받았다. 그 동안 변진심 정가발표회만 3회를 했고 수 없이 많은 무대에서 여창가곡이나 시조를 공연했다. 음반도 CD 두 장을 냈는데 변진심 정가선집이 그것이다. 얼마 전에는 조금 새로운 시도로 기존의 서양 식 노래로 불리어지는 ‘성불사의 밤’같은 가사를 시조곡조로 불러서 발표회도 하고 음반도 만들었다. 지금은 전남대, 한양대, 추계예대 등에 나가 가르치는 한 편 과천문화원의 시조사범으로 나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국악FM방송 ‘국악이 좋아요’프로에 나가 매주 한 번씩 시조를 가르친 것이 10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변진심의 시조에 익숙한 애청자가 엄청나게 많아졌다. 고등학교 때 시작한 시조공부가 여창가곡 공부로 이어졌고 ‘91년에 다시 시조공부를 더 하게 되었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둘째 언니(영숙)가 시조와 가사·가곡을 잘 하는 김호성에게 변진심을 데리고 갔다. 평소에 언니와 잘 아는 사이여서 찾아간 것이었는데 노래를 해 보라하여 여창가곡 “버들은 실이되고 ~ ”로 시작하는 이삭대엽을 불렀더니 목이 좋고 꿋꿋하게 잘 부른다고 칭찬했고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에 김호성이 남창가곡을 하고 변진심이 여창가곡을 하는 기회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시조를 지도해 주기 시작하여 변진심은 경제시조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현재 시조의 판도는 석암(石庵) 정경태(鄭坰兌)가 악보와 함께 보급한 석암제가 전국으로 보급되어 경제(京制)시조는 배우는 사람이 드물정도가 되었다. 말하자면 석암제가 절대 우세하고 경제는 위축되었다. 변진심은 경제시조를 보급하고 선양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경제시조보존회를 만들고 2006년 2월 17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창단공연을 했다. 시조공연도 과거와 달리 완창공연이라 하여 평시조, 지름시조, 사설시조, 우조시조, 중허리시조, 사설지름시조, 온지름시조, 우조지름시조, 반각시조 등 12가지 시조를 전부 들려주는 식으로 공연을 하고 있다. 변진심은 여창가곡의 가객이지만 시조보급에 발 벗고 나선 사람이 되었다. 본인이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점이 많아 딸과 아들도 국악을 하도록 유도했다. 딸은 대금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했고 아들은 지금 가곡전공으로 추계예술대학 국악과를 다니고 있다. 본인은 숙대 앞에 경제시조보존회 회관을 만들어 놓고 전국에서 찾아오는 제자들을 위해 매일 출근하여 시조와 가곡을 가르친다. 과천문화원에 가는 일이나 전남대 출강 국악방송에 가는 일 공연 일정 등 엄청나게 바쁜 스케줄이지만 전혀 피곤한 줄 모르고 행복하게 정가의 가객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초에는 남편과 함께 한라산 백록담을 등반하고 올 정도로 건강하고 가끔 부부가 늦은 밤에 집에서 술을 한 잔씩 할 정도로 화목하게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소망을 물으니 경제시조를 잘 살리고 보급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스승인 김월하처럼 장학금을 많이 마련하여 더 많은 정가전공자들을 양성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변진심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최 종민 --> 최종민의 국악세상 (사진출처 : 국악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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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9
  • 세계적 음반사에서 국악 음반 낸 작곡가 임준희
    "클래식 전공했지만 국악에 끌려"메이저 음반사 소니뮤직이 처음으로 국악 작곡가의 음반을 냈다. 그동안 상업성이 없어 외면한 영역이다. 작곡가 임준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53)는 그 높은 문턱을 뛰어넘고 음반 `댄싱 산조`를 냈다. 그만큼 그의 작품이 호평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음반은 지난 10년 동안 그의 삶과 고뇌가 담긴 작품들로 채웠다. 임 교수는 "청중과 음반사들이 외면해 그동안 한국 작곡가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며 "이 음반이 힘들게 곡을 쓰는 작곡가들에게 힘을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악과 클래식 음악의 조화를 추구해왔다. 우리 가락으로 펼치는 오페라 `천생연분`과 한강의 전설과 역사를 담은 `한강 칸타타`, 바이올린과 피아노, 가야금이 어우러지는 `댄싱 산조` 등으로 청중을 사로잡아왔다. 오영진의 희곡 `맹진사댁 경사`를 토대로 쓴 오페라 `천생연분`은 2006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된 후 2007년 일본 도쿄문화회관, 2008년 베이징 세기극원 무대에 오르며 오페라 한류를 일으켰다. 임 교수는 "한국인의 얼을 담은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며 "독일 고전음악만 찬양하지 말고 국악도 사랑했으면 한다"고 작곡 배경을 설명했다. 그도 원래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다. 연세대 음대 작곡과와 미국 인디애나대학 박사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국악은 자연스레 그를 당겼다고 한다. "학창 시절 독일 현대음악을 작곡해야 학점을 받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작곡은 생각을 담아내는 예술이에요. 나는 한국사람인데 베토벤과 모차르트 어법으로 선율을 만들어내는 게 이상했어요." 대학 2학년에 국악연구반에 들어간 그는 본격적으로 우리 가락에 빠져들었다. 1981년 MBC 대학가곡제에서 영산회상 가락에서 영감을 얻은 `바람에 실은 가락`으로 금상을 수상했다. [매일경제 전지현 기자] -->기사 원문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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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9
  • 월하여창가곡보존회 '가곡 풍류방에서 놀다' - 변진심
    ▲ 월하여창가곡보존회(회장 김영기)는 '가곡 풍류방에서 놀다'를 다음 달인 11월 4일 오후 7시 서울 남산국악당에서 연다. 이번 공연은 가곡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지 1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다. '가곡원류(歌曲源流)'에 확립된 편가 형식을 바탕으로 가곡 17곡을 두 시간여 동안 노래한다. 최종민 동국대 교수 사회로 김경배, 이동규, 박문규(이상 남창 가객), 김영기, 이승윤, 변진심 등(이상 여창 가객)이 출연한다. 전석 초대이며 문의는 ☎02-2261-0515. 2011.10.29 매일경제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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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2
  • 사투리에 따라 달라지는 한국의 민요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1. 언어가 다르면 노래가 달라진다. 15세기 한국의 음악문화는 대단히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었다. 편경 편종과 같은 악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중국음악어법의 문묘제례악이나 한국음악어법의 종묘제례악악을 작곡하였는데 그 음악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음악학도 발달하여 그 당시의 음악이론을 집대성한 악학궤범(樂學軌範)같은 책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 악학궤범에 보면 노래에 대하여 “歌所以永言而和於律”이라고 간단히 언급한 구절이 있다. 이 말은 “노래란 말을 길게 하여 음율에 맞춘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말이 노래가 된다는 것이다. 하긴 인도노래는 인도말을 길게 하여 인도음율에 맞춘것이고 중국노래는 중국말을 길게 하여 중국음율에 맞춘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같은 논리로 우리나라 노래는 한국말을 길게 하여 우리나라의 음율에 맞춘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말이 노래가 되는 과정을 검증해 보자. 본격적인 노래가 아니면서 노래의 요소가 많은 언어현상을 찾아보자. 옛날 어머니나 할머니들은 아기를 재울때 “자장자장 자장자장 우리아가 잘도 잔다. 멍멍개야 짓지마라 우리아가 잘도잔다.”와 같이 읊조리면서 아기를 재웠다. 그런 소리에는 장단도 있고 곡조도 있으니까 노래의 요소가 많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어린학생들이 구구단을 외울때 “이이는 사 이삼은 육 이사 팔 이구 십팔”하고 외운다. 그 소리에도 장단과 곡조가 있다. 상인들이 외치는 소리에도 곡조가 있고 농부들이 소를 몰면서 하는 소리에도 곡조가 있다. 이런 소리들이 노래의 바탕이 된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우리노래의 모습은 어떨까?. 간단한 것으로는 ‘새야새야’와 같이 3음으로 되는 것이 있다. 완전4도 위에 장2도를 쌓아 올려 만들어지는 이 3음계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새야새야’의 곡조가 된다. 그런데 그 곡조도 처음을 하행으로 시작하여 “솔레라솔- 라솔레레- 라레라라- 라솔레레-”와 같이 하는 경우도 있고 처음을 상행으로 시작하여 “라레라라- 라솔레레- 솔레라솔- 라솔레레-”와 같이 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 두가지 곡조가 다 쓰인다. 또 가사를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로 해도 마찬가지이다. 말을 읊조리듯이 하여 만들어지는 간단한 민요는 3음만으로도 노래가 된다. 그런데 이 ‘새야새야’는 박자가 5박자이다. 서양음악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5박자가 우리노래에서는 가장 간단한 민요에도 사용되고 있다. 실제 우리나라의 노래에는 5박자가 많이 쓰인다. 농촌에서 모를 심을때 부르는 모심기 노래에도 “심어주게- 심어주게- 심-어주- 게---- 오-종조옹 줄-모르을 심-어주- 게---- ”와 같이 5박자로 부른다. 우리말이 석자나 넉자로 이루어지는 말이 많기 때문에 그 석자나 넉자를 우리가 말하는 식으로 읊조리면 5박자가 될 때에 편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5박자를 늘이면 8박자가 된다. 서양음악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5박자와 8박자가 우리음악에서는 아주 많이 사용하는 박자가 되어 있다. ‘시조’의 초장은 박자가 5․8․8․5․8 이니까 5박과 8박이 섞여 있는 박자인데 경기민요인 ‘노랫가락’도 그런식으로 되어 있다. ‘노랫가락’은 ‘시조’와 같은 3장형식의 시를 가사로 하는 노래인데 “청-산리- 벽게-수-야-- 수이---감을- 자랑-마- 라---- ” 와 같이 5박과 8박을 섞어서 박자로 쓰고 있다. 현행의 시조나 가곡이 다 5박구조와 8박구조로 되어있고 풍류로 연주하는 영산회상의 상영산이나 중영산 세령산이 다 5박구조이다. 많은 궁중음악이나 고려때 가요로 알려진 ‘가시리’ ‘사모곡’ ‘서경별곡’ 청산별곡‘ 같은 노래도 다 5박구조와 8박구조로 되어 있다. 서양음악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5박자와 8박자가 우리음악에서는 아주 흔하게 쓰이고 있다. 우리말이 그런 박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말에는 사투리가 있다. 음악이라는 두 글자도 전라도에서는 “으마악-”과 같이 발음하고 경상도에서는 “어막”과 같이 발음한다. 전라도의 사투리는 소리를 뒤로 밀면서 발음하기 때문에 소리의 세(勢)가 뒤쪽으로 계속 진행할려는 경향을 갖는데 반하여 경상도 사투리는 뒤가 끊어지면서 앞쪽에 액쎈트가 가게 된다. 그러면 두 지방의 민요도 그와 같이 발달하게 된다. 전라도 민요는 선율이 계속 진행할려는 경향을 갖기 때문에 ‘진도아리랑’의 첫부분이 “무운경- 새재애느은 웬 고오오갠가 - ” 하면서 뒤를 떨면서 지속하고 있다. 한편 경상도 민요는 “어막”이라는 말과 같이 앞에 액쎈트를 주면서 뒤는 곧 끊어지게 소리내기 때문에 ‘밀양아리랑’의 경우 “날쫌보소오 날쫌보소오”와 같이 부르게 된다. 사투리의 억양이 그대로 민요에 반영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투리에 따라서 민요의 구조나 특징이 달라지기 때문에 전라도민요 경상도민요 경기민요등의 갈래가 형성되게 되고 민요권이라는 것이 성립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땅덩이는 그리 크기 않지만 각 지방마다 독특한 사투리가 있어서 그와 같은 맥락의 특징있는 민요가 많이 발달 하였다. 내가 채집해 본 바로 우리나라의 민요는 제주도 한 도에서 300곡 이상이 나올 정도로 많은 민요가 발달하였다. 나는 그 중 170곡 정도를 골라 악보를 낸 적이 있다. 악학궤범의 언급대로 노래란 말을 바탕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말이 다르면 노래가 달라진다. 인도에는 인도식 노래가 중국에는 중국식 노래가 발달하는 것도 다 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안에서도 사투리가 다르면 다른 특징의 노래가 발달하지 않았던가?. 앞으로도 우리말을 절묘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노래문화를 창출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 더 많은 내용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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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18
  • 창극의 스타와 판소리명창
    창극은 스타의 산실이었다. 초창기에는 판소리로 이름 높은 명창들이 창극을 시도했기 때문에 김창환·이동백·송만갑은 그 자체 스타이고 명창이었다. 정정열까지도 명창이 스타가 된 경우이지만 오태석은 조금 달랐다. 오태석은 판소리명창으로 보다는 창극의 스타로 유명했다. 그가 출연한 춘향전(방자역)이나 수궁가(원숭이역) 등에서는 관객들이 오태석의 연기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여성국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박귀희·김소희(햇님·달님) 같은 스타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 후의 임춘앵이나 김진진·김경수도 명창이라기 보다는 스타성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반대로 임방울은 대단한 명창이었지만 창극에서는 스타가 되지 못한 경우이다. 하여 창극의 스타와 판소리명창은 약간 차이가 나는 개념이라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엮어 보기로 하겠다. 1962년 국립국극단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국립창극단이 만들어 질 때에는 영화나 TV 등 새로운 공연물이 늘어나면서 판소리와 창극이 극도로 위축된 시기였다. 이 무렵 김창구를 비롯한 국립극장 관계자들이 창극과 판소리를 함께 보호 육성할 방안으로 국립창극단을 만들었다. 김연수가 초대 단장을 맡고 당시 한 참 활동하던 김소희·박초월·박귀희·김경애·김득수·강종철·김정희·남해성·박봉선·박초선·임유앵·장영찬·정권진·한농선·한승호·허희 등이 단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몇 사람에 대해서는 창극과 판소리에 공헌한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단장을 맡았던 김연수(1907~1974)에 대한 얘기부터 해 보겠다. 김연수는 일제강점기 ‘쑥대머리’ 한 방으로 스타가 된 임방울과 쌍벽을 이루며 창극과 판소리 두 분야에 크게 공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 한문을 배워 유식한 편이었고 성격이 따지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품이라 많은 일화를 남긴 사람이다. 29세의 늦은 나이에 순천의 성군수 집에서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배울 때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수궁가의 가사가 틀렸다고 우겨서 유성준이 그 곳을 떠나게 했다는 얘기가 유명하고 그 일 때문에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성악연구회에 출입하게 되었다. 이 무렵 조선성악연구회에는 정정열이 있어서 창극좌를 만들어 창극을 재건하고 흥행에 성공을 거둘 때인데 김연수는 그 단체에 끼어 활동하면서 본인도 나중에 정정열처럼 창극을 각색·연출·작창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겠다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김연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후에도 늘 지도자의 위치에서 단체를 운영하기도 하고 판소리를 새롭게 만들어 보려 애썼는데 그 결실의 하나가 국립창극단이 출범했을 때 단장이 되어 판소리를 창극으로 각색·작창·연출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판소리도 본인의 미학에 맞게 사설과 곡조를 다시 짜서 새로운 판소리를 만들었다. 본인은 춘향가만 발표했었고 나머지는 모두 오정숙이 차례차례 완창으로 발표했는데 수궁가를 완창하기 직전 김연수는 작고하고 말았다. 오늘날 동초제 판소리라고 하는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 등은 오정숙이 공을 들여 퍼뜨려 전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퍼져나가고 있는데 오정숙의 제자 이일주·조소녀·민소완(성준숙)·김소영 등이 거점이 되어 활발하게 전수하고 있다. 김연수는 토막창극을 재미있게 각색하여 무대에 올린 것으로도 유명한데 지금 그런 작품은 대부분이 전승되지 않고 있다. 판소리로 1964년 인간문화재가 되기도 했던 김연수는 판소리 작품 여러 바탕을 남겼고 많은 창극작품을 무대에 올렸던 초대 국립창극단의 단장이었다. 김소희(1917~1995)는 13~4세 때부터 소녀명창으로 당시 경성방송국에서 판소리 한 대목을 방송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1935년 콜롬비아레코드에 취입하기 위해 정정열 일행으로 일본에 갈 때는 일행이 정정열·이화중선·임방울·박록주·신숙·한성준이었으니 김소희가 최연소 10대 후반의 나이였다. 김소희는 송만갑·정정열·박동실 등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가곡과 거문고·가야금·양금 등을 배워 국악전반에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무엇이든지 잘 하면서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한문과 서예를 신호열선생에게 배워 서예작품이 국전에 3년이나 입선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이런 학습과 경륜을 가진 김소희였기 때문에 창극과 판소리에 기여한 공적 또한 적지 않다. 해방 후 여성국극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박귀희와 김소희가 출연한 햇님·달님이라는 작품이었다. 그 작품은 실제 박귀희와 김소희를 모델로 하여 김아부가 대본을 만든 것으로 대중들의 대단한 성원을 받았고 박귀희는 남자역할로 굉장한 스타덤에 올랐었다. 박귀희를 실제 남자로 착각하고 사모하는 여성들이 줄을 이어 찾아다닐 정도로 유명했었다. 그처럼 여성국극 붐을 만들었던 김소희는 그 후 국립창극단의 여러 창극작품을 작곡하는 작창을 맡아 하기도 했다. 김소희가 한 일은 여러 방면에 걸쳐 참으로 다양하고 많다. 여성국악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했고 그들이 힘을 합쳐 국악예술학교를 만들고 이사장을 한 일이라든지 말년에 국악협회 이사장을 한 일 등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판소리의 격을 높이고 판소리를 국내·외에 선양한 일이라 하겠다. 해방공간에서는 건국의 핵심인사들과 미군정청 관계자들이 회식이라도 하게 되면 김소희·박귀희 등이 그런 자리에 나아가 판소리와 가야금병창을 들려주곤 했는데 그것이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또 1962년에는 한국민속예술단의 일원으로 파리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를 순회 공연했고 1964년에는 삼천리가무단의 일원으로 미국 여러 도시를 순회 공연했다. 1972년 봄 뉴욕 카네기홀에서는 판소리 연주도중 청중들이 기립박수를 할 정도로 크게 감동을 주기도 했는데 서울에 돌아 온 다음 나에게 “저들은 한국말을 모르면서도 판소리에 그처럼 감동을 받는데 한국 사람들은 왜 그런 음악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했었다. 김소희는 명창으로서의 프라이드도 대단했다. 그는 13세에 판소리를 시작한 것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63세되던 1979년이 국악생활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한국 최초로 김소희는 국악생활 50주년 기념공연을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최종민의 사회로 뜻 있게 잘 마쳤다. 그런데 그 후 김소희명창은 큰 무대에 서지 않으려 했다. 내가 왜 그러느냐고 말하면 “나는 명창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내 소리가 나의 마음을 따라 주지 않아 제대로 고음이 나지 않는데 나의 청중들에게 실망스러운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대에 서지 않으려는 것이니 그리 아세요.”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깨끗하고 고고한 김소희명창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제자 복이 없다고 한탄 한 적이 있다. 제자들 중 오정숙은 김연수에게 가고 성창순은 정응민에게 가고 안향련·김동애·박소영은 고인이 되었다. 신영희·안숙선·박윤초·유수정·이명희·한정하·이영태·오정해·김미숙 등이 판소리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국립창극단 출신의 명창을 꼽으라면 박동진을 빼 놓을 수 없다. 박동진은 1975부터 1979까지 제2대 국립창극단단장을 한 명창이다. 박동진도 어린 시절은 판소리를 공부했지만 먹고 살 방도가 없어 지방의 소리선생이나 여성국극단의 반주악사(장구)등을 하면서 살았지만 1962년부터 1972년까지 국립국악원 악사로 있으면서 정력적인 판소리독공을 계속하여 최초로 대중을 상대로 한 흥보가 완창공연을 통해 판소리 중흥에 불을 지핀 인물이다. ‘68년에 흥보가를 5시간에 걸쳐 완창하고 ’69년에는 춘향가를 8시간 동안 완창으로 명동국립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후 박동진은 언론이 주목하는 판소리의 대명사처럼 되었고 계속된 ‘70년 심청가(6시간),’71년의 수궁가(5시간), 적벽가(6시간)완창으로 그는 ‘73년에 판소리의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70년에는 성서판소리 ‘예수전’과 ‘팔려간 요셉’등을 발표하여 한국기독교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이 후 ‘성웅 이순신’ 같은 장편의 서사시는 직접 사설을 짓고 작창 하여 녹음하는 등 판소리 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많이 남겼다. 판소리를 들으러 오는 청중이면 어떤 청중들이라도 쉽고 재미있게 판소리를 감상할 수 있도록 현장에 맞는 소리를 척척 만들어 불러주는 창조능력을 가진 명창이었다. 청중을 울리고 웃기는 능력을 충분이 가지고 있었던 명창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가사를 만들고 내용을 꾸려서 멋지게 전달하는 실력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고의 명창이었다. 박동진에 버금가는 여류명창으로는 오정숙(1935~2008)을 꼽을 수 있다. 박동진이 완창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자 오정숙도 판소리 완창에 도전하게 된다. ‘72년에 춘향가, 73년에 흥보가, 74년에 수궁가, 75년에 심청가를 완창했는데 여류명창이 이처럼 여러 바탕의 판소리를 완창으로 발표한 것은 오정숙이 최초이다. 박동진이 본인의 판소리를 발표했다면 오정숙은 그의 스승 김연수의 작품을 발표한 것이 다를 뿐이다. 이 판소리들은 오늘날 김연수의 호를 따서 동초제 판소리라 부르고 지금 전주를 중심으로 오정숙의 제자들이 잘 전수하고 있다. 오정숙은 1977년부터 90년대 말까지 20여년 국립창극단에 있으면서 많은 배역을 멋지게 해 내었지만 특히 춘향가의 월매 역은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연기를 보여주는 명배우였다. 소리와 연기가 모두 완벽에 가까울 정도 야무지게 활동했던 명창·명배우였던 분이 바로 오정숙이라 할 수 있다. 조상현도 국립창극단 출신의 명창으로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1939년생인 그는 1971부터 1982까지 국립창극단에 있었고 늘 주연을 하며 창극의 대중화에 기여했었다. ‘70년대 말에는 MBC. TV에 창극 프로그램을 만들어 계속 출연하면서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그는 한국 최고의 명창이다. 정응민에게 배운 판소리 춘향가·심청가·수궁가를 주로 부르고 박녹주에게 배운 흥보가를 부를 수 있긴 하지만 정응민이 흥보가를 부르지 않아서인지 조상현도 흥보가를 자주 부르지는 않는다. 그의 장기는 춘향가·심청가·수궁가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떤 청중이라도 “야 - ! 판소리가 참으로 멋있구나.” 할 정도로 감동을 줄 수 있는 명창이다. 발성이 완벽에 가깝고 세세상청을 통성으로 낼 수 있는 유일한 명창이다. 배운 판소리의 작품성이 높기 때문에 본인이 손 댈 필요가 없기도 하지만 본인의 생각(미학)이 멋대로 뜯어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배운 그대로 부르는데 완성도가 높은 판소리를 부른다. 그는 광주광역시 국극단을 만들어 오래 단장으로 있었고 사단법인 판소리보존회 회장으로 역시 오래 활동했다. 다른 명창들처럼 판소리를 개인지도형식으로 한 사람씩 가르치는 교수보다는 다수를 모아놓고 그룹지도처럼 가르치는 강의 식 판소리 교습으로 유명한데 그렇게 가르친 제자들이 수 백 명에 이른다. 조상현은 판소리명창으로 최고의 명창이지만 창극의 배우로서도 최고의 배우라 할 수 있다. 춘향전의 이도령역이나 심청가의 심봉사역을 특히 잘 하고 무슨 역이든지 척척해내는 명배우이다. 내가 국립창극단 출신의 명창들을 몇 사람 소개하는 것은 지금의 후학들이 이런 선배들의 여러 가지 특징 중에 무엇이라도 참고하여 각자의 미래를 더 훌륭하게 설계하고 더 열심히 공력을 쌓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 소개하는 것이다. 지면관계로 너무 간략하게 다룬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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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15
  • 한국문화와 한국음악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Ⅰ. 월드컵 4강의 위업을 달성한 우리나라 우리는 월드컵 4강의 위업을 달성함으로서 국가의 인식과 위상이 높아지고 국가 브랜드가 높아졌다고들 말한다. 축구의 변방국가가 아니라 중심국가로 도약했다고도 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최고 우승국은 한국이라 하고 실제 넷티즌들의 투표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팀으로 한국팀이 뽑히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는 엄청난 이익을 얻는 성공한 월드컵을 치렀고 새로운 응원문화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대단한 모습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세계에 과시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을까? 참으로 감동적인 6월을 보낸 것이다. 이제 그 세계인과 함께 하는 월드컵 축제는 끝났다.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특히 교육에 종사하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가를 생각해야 할 계제인 것이다. 교육은 미래를 살아갈 후진들을 훈련시키는 일련의 활동이고 교육의 내용은 문화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정보화가 이루어지는 21세기는 문화가 중시되고 문화가 부(富)를 만들어 주는 시대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들은 그 문화에 대해서 아무런 논리도 문화의 시대를 대비한 아무런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해서 걱정이다. 문화를 가장 좁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술을 생각한다. 그러나 “자동차 대수는 많아졌는데 교통문화는 정착되지 못했다”하면 문화의 의미는 훨씬 달라진다. 요즘은 “화장실 문화를 개선해야 된다.”는 말도 자주 들을 수 있다. 문화라는 용어는 예술에서부터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 전체와 관련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이 문화를 전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 어느 정도 실감되리라고 본다. 문화를 예술로 보면 문화상품이 부가 가치가 높다는 것은 이해하기 쉬운 문제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고가의 그림이나 글씨라 하더라도 그것을 제작한 재료만 따진다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액수인가? 종이 한 장에 붓으로 먹을 묻혀 쓴 붓글씨나 동양화․유화 등은 그 작품의 재료로 따지면 가격이 얼마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팔릴 때는 그 가격의 액수는 재료비와 무관하게 작품성에 따라서 엄청난 가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부가가치가 높다는 것 아닌가? 문화가 돈이 된다는 얘기는 흔히 스필버그의 영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영화 한편을 만들어 벌어들인 돈이 자동차 수백만 대를 수출하여 벌어들인 돈 보다 많다고 하지 않는가? 정보화 시대에는 인터넷을 통하여 남이 갖지 않은 아이디어를 실용화하여 만인에게 필요한 무엇을 만들어 공급할 경우 또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결국 예술이나 지식이나 남과 다른 무엇을 가지고 남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문화상품을 만들 때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 것이 산업시대와 다르게 정보화 시대에는 더 빠르게 더 널리 활용되기 때문에 문화가 중요한 부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문화상품이 아니더라도 모든 상품에 문화 아이디어가 첨가되어야 그 만큼의 부가가치가 더 생긴다는 것도 상식적인 얘기에 해당한다. 때문에 앞으로의 교육은 문화와 관련되는 교육을 잘 하여야 한다. 지난 시대의 교육처럼 기술이나 기능만 강조하는 교육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미안이 있어야 하고 안목이 높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하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무엇을 할 수 있도록 훈련 시켜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가 있음으로 해서 대단한 문명과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 언어에는 일반적인 언어 즉 말과 함께 음악의 언어라든가 춤의 언어와 같은 문화언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교육계의 인사들이 문화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왜 음악을 가르쳐야 하고 왜 연극을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미래는 문화가 존중되고 문화가 부를 가져오는 세기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문화언어에 대한 인식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하면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말에 단어와 문법과 서술 내용이 있는 것처럼 문화언어에도 언어의 재료가 되는 음이나 춤사위와 그것을 엮어서 하나의 뭉뚱그려진 표현을 할 때의 표현 방법 즉 문화어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 그것을 통해서 무엇인가 사람이 생각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려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문화언어와 관련되는 사고를 할 줄 모르면 문화의 세기에 대비한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은 뻔-한 일이다. ‘대금산조’와 ‘베토벤의 교향곡’이 다른 것은 피차의 <음악언어>가 다른 때문이고 또 표현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Ⅱ. 우리문화는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로 되어있다. 문화의 바탕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내용이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비롯해서 언어라든지 사상이나 종교 등과 고급의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문화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를 중심으로 한 문화의 생성․발달과정을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는 고유문화가 있으면서 그 고유문화가 부단히 외부의 다른 문화와 교류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데 그 고유문화와 외부의 문화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문화가 된다. 그런데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다른 문화가 우리문화로 수용되는 경우 대개는 원 모습 그대로 우리 것으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소 변해서 우리문화로 수용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오래 전부터 문화의 근간이 된다고 할 수 있는 문자와 글을 중국의 한문을 가져다 사용하였다. 글자와 문법은 그대로 사용하였지만 뜻과 발음은 우리에게 맞도록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天이라는 글자도 우리말로 “하늘 천”하고 읽게 함으로서 새김 ‘하늘’은 뜻을 나타내고 발음 ‘천’은 음을 나타내도록 하여 사용하였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라는 건축양식은 서양에서 가져 온 것이다. 그런데 그 서양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가? 아니다. 전국의 아파트가 100% 온돌로 난방을 하게 짓고 있다. 온돌은 우리의 고유한 난방방법이 아닌가? 이와 같이 중국의 글도 우리 식으로 바꾸어서 사용하였고 서양의 건축양식도 온돌을 사용하여 우리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런 우리 식으로의 변화를 <한국화>라고 한다. 우리의 고유문화나 이전의 문화가 다음시대의 우리문화가 되는 과정에도 대개는 변화를 겪게 마련이다.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말도 늘 변하면서 우리말로 이어져 가고 있다. 우리는 한문을 오래 전부터 사용하였기 때문에 우리말의 70%이상이 한문 식으로 되어있다. 실제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일상 언어에 한문을 많이 사용했었다. 무식한 광대가 시골 대중을 상대로 소리를 하더라도 “천하대세(天下大勢)는 분구필합(分久必合)이요 합구필분(合久必分)이라”하면 대부분의 청중이 그 뜻을 알아들었다. 그렇게 한문 투의 말에 익숙해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산골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났을 때에도 먼저 발견한 사람이 한문 투로 말했다는 이런 우스개 소리 비슷한 얘기가 있다. “원산대호(遠山大虎)가 근산래(近山來)하니 지총자(持銃者)는 집총(執銃)하고 지창자(持槍者)는 집창(執槍)하고 속래속래(速來速來)”하고 외쳤다는 것인데 요즘 젊은이들 같으면 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그런 말이 일상적으로 통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우리말이 일제를 거치면서 일본말이 많이 섞여 사용되게 되었고 또 해방 후에는 영어가 많이 섞여 사용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매일매일 쓰는 한국말도 계속 변하면서 우리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동아리”나 “길라잡이”같은 토박이 우리말을 확산시켜 가더니 요즘 컴퓨터 통신에서는 또 다른 식의 우리말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말뿐만 아니라 우리의 김치 맛이나 된장 맛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판소리나 민속무용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다르게 공연할 수 있다. 그래서 고유문화나 이전의 문화가 지금 우리문화로 형성되는 과정에서의 변화는 <현재화>라는 말로 정의하고자 한다. 우리문화는 고유문화나 이전의 문화가 <현재화>하여 사용되는 것과 외부의 다른 문화가 <한국화>하여 수용된 것으로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이 부단히 수없이 계속되어 형성된 것이 현재의 우리문화라고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고유문화에 뿌리를 두고 현재화를 거듭한 문화가 <전통문화>이고 부단히 외부에서 들어와 한국화한 문화가 <외래문화>이다. 그래서 우리의 문화는 크게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로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동안의 우리교육은 이 두 종류의 문화 가운데 전통문화는 제쳐두고 외래문화 중심으로 교육을 했다. 우리의 젓가락질이나 밥 먹는 방법 등은 안 가르쳐도 서양의 식탁예절은 가르쳤을 정도이다. 나의 경험인데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서양의 식탁예절을 배웠다. 그 내용은 오른손에 knife(칼)를 들고 왼손에 fork(쇠스랑?)을 들고 오른손으로 썰어서 왼손으로 먹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정말 놀랐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부모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으면 “상놈된다”는 것이 크게 겁주는 소리였고, 밥 먹는 방법에 대해서는 어느 가정이나 오른손으로 먹도록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헌데 학교에서 서양 사람들은 왼손으로 먹는다고 가르쳤으니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때 “아하 서양 사람들은 모두 쌍놈인가 보다”하고 생각했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 때까지 양식을 먹어 본 적도 없고 구경을 해 본적도 없었다. 그런 시골학생에게 서양음식 먹는 방법은 가르치고 한국음식 먹는 식탁예절은 가르치지 않은 것이 우리의 교육이었다. 내가 너무 지나친 예를 들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교육내용을 따져보면 우리 것을 등한히 한 기간은 너무 오래 계속되었고 지금도 우리의 교육내용에 대한 반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교육개혁은 늘 교육방법에 대한 교육개혁이었고 그것도 다른 나라를 뒤따라가는 식이었지 우리 것을 우리방법으로 가르치지 않은데 대한 반성이나 개혁은 없었던 것으로 본다. 하긴 박정희 시대의 국적 있는 교육이나 국민의 정부에서 간헐적으로 나오는 국악을 더 가르치자는 정도의 주장이 있었지만 그것이 우리의 교육내용을 제대로 바꾸는 일은 하지 못했다고 본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의 교육은 외래문화 중심으로 해 왔다. 그 결과 상당한 서양화를 이룩하였고 또 경제성장도 앞당길 수가 있었다. 서양의 지식이나 기술을 받아 드렸고 서양예술의 방법도 열심히 배워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서양화 수준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면을 들여다 보면 우리 것인 우리의 전통문화를 모르게 되어 버린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남의 것을 배우고 외래문화를 발달시키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해서 무식하게 되었고 우리 것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얼른 보기에 지금까지는 별 문제 없이 잘 해 나온 듯이 보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 상태로 계속 미래를 향하여 직진해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정말 그럴까? 서양아류의 외래문화만 알고 우리고유의 전통문화를 모르는 채 우리라는 큰 집단이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국제 경쟁력이 있는 강한 나라로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을 까? 결론은 “안 된다”이다. 구조적으로 안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Ⅲ. 문화의 가치는 독창성에- . 우리나라의 지식인 가운데에는 우리문화와 서양문화의 차이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인사들이 많다. 우리 것이나 서양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기 때문에 서양 것만 가르쳐도 우리의 미래는 잘 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경우에 음악을 통해서 우리 것과 서양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곤 한다. 우리민족은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아주 오랜 옛날부터 노래하고 춤추면서 제사를 올리고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소질도 있고 음악을 좋아하는 민족이 되었다. 또 훌륭한 음악의 문화유산도 남기게 되었다. 그런 음악의 유산 가운데에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들도 많이 있기에 그 중 한 가지만 예로 들어보겠다. 우리는 음악을 기록하는 악보에 대한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세종 때에 창안하여 세종실록이나 세조실록 등에 악보를 많이 남기고 있는 정간보(井間譜)도 그런 악보중의 하나이다. 그 정간보의 구조를 보면 원고지처럼 여러 줄에 칸을 만들어 놓고 그 칸에 음 높이를 나타내는 율명(律名)을 적어 넣는다. 그러면 율명은 음의 높이(pitch)가 되고 칸의 수는 음의 길이(duration)가 된다. 악보란 음의 높이와 음의 길이를 나타낼 수 있으면 필요조건이 다 해결되는 것인데 정간보는 그렇게 하여 유량악보(有量樂譜)의 조건을 잘 갖춘 악보가 된 것이다. 이런 악보와 우리가 그 동안 가르쳐온 서양의 오선보를 비교해 보자. 오선보는 가로로 다섯줄을 긋고 그 줄이나 칸에 음표를 적어 넣어 음의 높이와 음의 길이를 나타낸다. 그런데 음의 높이는 음표의 머리가 공간의 어디에 위치하는가에 따라 다르고 음의 길이는 음표의 모양에 따라서 달라지게 되어있다. 우리의 정간보가 세로로 읽으며 부호가 음의 높이를 나타내고 공간이 음의 길이를 나타내는 것과 비교해 보면 똑 같은 유량악보인데도 그 나타내는 방법이 정반대로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세로로 읽는데 서양 것은 가로로 읽고 우리 것은 부호가 높이를, 공간이 길이를 나타내는데 서양 것은 부호가 길이를, 공간이 높이를 나타낸다. 완전히 반대로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발달된 시기는 우리 것이 15세기인데 서양의 오선보는 17세기나 되어야 요즘 수준의 오선보가 만들어진다. 하나 더 첨가할 것은 우리의 정간보는 초등학교 학생들도 몇 개월이면 배워서 혼자 볼 수 있는데 서양의 오선보는 수년이 걸려도 제대로 못 보는 학생들이 많다. 초등학교 중등학교에서 오선보를 계속 배우고 있지만 우리나라 국민의 몇%가 오선보를 제대로 볼 수 있는가?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지만 악보 하나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에게 훌륭한 악보가 있다는 것도 중요하고 그 악보가 편리한 악보라는 것도 중요한데 그 악보를 만든 연대가 서양악보보다 2세기나 앞선다는 것과 그 악보의 방법이 서양악보와 정반대로 되어있다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문화의 가치란 이와 같이 다르면서도 효율성이 있고 수준이 높을 때 그 가치가 증대되는 것이다. 우리음악의 실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문화유산 중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종묘제례악(보태평․정대업)은 그 음악의 됨됨이가 과거 중국의 음악과도 다르고 오늘날의 서양음악과도 다르면서 음악적 수준이 지고지순(至高至純)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대단한 것이다. 그래서 지난해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유산 걸작으로 인정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음악의 가치를 일본의 음악학자가 발견하여 살아남게 했다는 것은 많은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다나베 히사오(田辺尙雄)라는 일본 음악학자는 우리나라의 궁중음악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종묘제례악으로 쓰이는 전폐희문을 듣고 너무나 감동하여 “이런 음악이 없어지는 것은 조선의 아악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위대한 문화유산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지 반드시 보전되도록 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올려서 이왕직 아악부로 하여금 이 음악을 계속 이어가도록 했던 것이다. 만약 그 음악학자의 그러한 건의서가 없었던들 오늘날의 궁중음악은 지구상에서 없어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문화는 무슨 물량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로 평가되는 것인데 그 가치란 여기도 저기도 있는 흔해빠진 동류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흔치 않은 다른 것에서 찾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독특한 문화 다른 나라와 다른 문화가 오히려 더 큰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Ⅳ. 음악의 모국어 음악도 문화현상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다른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달한다. 노래는 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달한다는 악학궤범의 정의가 우리에게 많은 암시를 준다. “歌所以永言而和於律”이라는 구절이 그것인데 이것을 번역하면 “노래는 말을 길게 하여 음율에 얹은 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에 나라 이름을 앞에 넣어 다르게 읽어 보라. 예를 들어 “인도 노래는 인도 말을 길게 하여 인도 음율에 올린 것이고” “중국노래는 중국말을 길게 하여 중국 음율에 얹은 것이다”라고 해 보면 그 뜻이 더 명료하게 이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노래는 우리나라 말을 길게 하여 우리나라 음 체계에 맞게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면 또 하나의 멋진 정의가 된다. 그렇다. 우리나라에는 다른 나라와 다른 우리나라의 음악이 있고 그 음악은 우리나라 말과 우리나라 문화와 관계를 가지고 발달한 것이다. 아주 기초적으로는 어린아이를 재우면서 부르는 자장노래에서부터 논밭에서 일할 때 부르는 노동요가 다 그렇게 발달한 노래들이다. 그런 간단한 노래들도 지방에서 따라서 사투리가 달라지면 음악적인 내용이나 창법 또한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경기민요니 서도민요니 하는 민요의 지방적 특징이 나타나게 되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민요의 음악이 우리네의 문화 속에서 굿 음악으로 쓰일 때에는 굿의 의식에 맞도록 훨씬 규모가 확대되고 음악구조도 발달하여 보다 세련되고 수준 높은 음악구조를 갖게 된다. 또 다른 측면으로 선비들의 교양음악으로 쓰이게 되면 그들의 가치관에 맞게 음악의 군더더기가 다 덜어지고 마치 수양에 있어서 욕심을 덜어내듯 음악도 고답적으로 발달하여 정서적으로 한 없이 높은 수준을 향하여 끝없이 발달하게 된다. 말하자면 음악의 언어적인 방법이 이 땅의 가치관과 결합하여 우리다운 음악을 발달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판소리’가 그렇고 ‘줄 풍류’나 ‘가곡’이 그렇다. 많은 궁중음악 역시 예외가 아니다. 모두 우리의 음악언어와 우리의 음악가치관이 결합된 음악인 것이다. 이렇게 발달한 우리의 음악언어가 바로 우리의 음악적 모국어이다. 우리에게 ‘모국어’가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음악적 모국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인도에도 음악적 모국어가 있고 중국에도 음악적 모국어가 있다. 서양에도 이 말은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실제 음악적 모국어를 교육에서 중시한 것은 19세기 유럽에서였다. 당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민족단위의 국가를 건설하고 국가가 시행하는 의무교육을 실시하게 되는데 애국심을 길러야 하는 의무교육에서 중시한 것은 모국어와 음악의 모국어였다. 각 나라는 음악의 모국어를 가르치기 위해서 자기 나라 민요를 교재로 사용하였다. 독일은 독일민요를 교재로 사용하고 헝가리는 헝가리민요를 교재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보다 1세기나 늦게 의무교육을 하게 되는 우리나라는 어떻게 하였을까? Ⅴ. 음악의 외국어를 가르쳐 온 우리나라의 음악교육 우리나라의 음악교육은 음악의 모국어를 가르치는 서양의 음악교육과는 다르게 음악의 서양언어 즉 음악의 외국어를 가르쳐 온 것이다. 우리는 음악교육을 위해서 서양의 미국․영국․독일․이태리 등 몇 나라의 음악교과서를 수입하여 그 교과서에 실린 각 나라의 민요 등을 중심으로 음악 교과서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음악은 “만국공통어이다”라는 말과 함께 서양음악 중심의 음악교육을 해 왔다. 그 결과 서양음악에 대한 지식과 언어능력을 상당히 많이 습득하였고 서양에서도 인정받는 음악가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모두가 우리의 음악적 소질과 새로운 음악문화가 만나 이룩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음악언어능력을 가르치지 않음으로 하여 서양과 다른 우리음악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음악의 외국어는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음악의 모국어는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양의 음악언어는 서양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달했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영어의 The cat can get the rat. 이라는 구절이 있다고 하자. 이 문장에서 관사나 조동사는 중요한 단어가 아니고 명사나 동사가 중요한 단어이다. 때문에 노래로 작곡을 하기위해서는 소절을 만들어야 되는데 중요한 단어에 액쎈트가 가도록 소절 선을 그으면 다음과 같이 된다. The / cat can / get the / rat. 음악적으로 보면 약박으로 시작하는 못갖춘마디가 된다. 실제 우리 교과서에 실린 서양민요들을 보라. 대부분이 못갖춘마디로 되어있다. 영국민요 ‘올드랭자인’이나 ‘불어라 봄바람’ ‘앤리로리’ ‘아 목동아’ ‘어메이징 그레이스’등 다 못갖춘마디로 된 노래들이다. 독일민요 ‘오 탄덴바움’이나 ‘로렐라이’도 못갖춘마디이고 이태리의 오페라 아리아 ‘축배의 노래’도 못갖춘마디로 되어있다. 서양의 민요들은 대부분 못갖춘마디로 되어있는데 그 원인은 서양의 언어가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그런 서양민요를 가져다가 우리는 가사만 번역하여 가르쳐 왔다. 영어 가사를 번역하면 아래와 같은 식이 된다. The / cat can / get the / rat. 고양이/----------------/ 다. 노래 곡조의 액쎈트는 영어와 같은 식으로 붙어 있다. 그런데 가사를 번역하면 영어의 중요하지 않은 단어“the”의 위치에 우리말의 중요한 단어“고양이”가 가게 되고 또 반대로 영어의 중요한 단어 “rat”의 위치에 우리말의 어미 “다”가 오게 된다. 곡조의 액쎈트와 가사의 액쎈트가 서로 어긋나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노래로 부를 때에도 어려움이 많고 노래의 재미를 느끼기 어렵게 되어있다. 학교에서 그렇게 많은 노래를 가르치는데도 밖에 나가면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실상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음악교과서의 노래가 교재로서 적당하지 않은 명분도 영양가도 없는 노래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네의 음악교육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Ⅵ. 미래를 위한 문화전략 지피지기(知被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란 말이 있다.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면 모든 전쟁을 다 이긴다는 뜻이다. 어느 한 쪽만 알아 가지고는 싸움에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남을 아는 것도 아니고 남의 것을 아는데 급급하여 나의 것을 모르게 되었고 상대방의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목표를 잃은 교육을 해 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태로는 21세기 문화의 세기에 문화전쟁에서 참패할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전통을 교육내용에 많이 포함시키고 그 속에 스며있는 창조적인 삶의 방법을 다시 배우도록 해야 한다. 지금 교육개혁에서 외치는 열린 교육이나 창조성 개발도 교육내용을 전통적인 것으로 할 때 비로소 참 의미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놀이가 세계적으로 1만 명이상의 애호가(사물놀이를 배운 samulnorian)를 가지게 되고 연간 300 셋드 이상의 악기를 수출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 것을 세계화하는 것이 세계화의 방법이지 남의 것을 배우기만 하고 우리 것을 모르게 되는 것이 세계화여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우리 것을 배우는데 많은 노력을 기우려 보자.
    • 국악정보
    • 자료실
    2012-08-15

공연소식 검색결과

  • [국악공연] 9월 14일 경복궁 수정전 - 관현맹인전통예술단, 경복궁 특별기획공연 '세종의 마음'
    관현맹인전통예술단(단장 최동익)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소장 고정주)는 오는 9월 14일(목) 오후 3시 경복궁 수정전에서 경복궁 특별기획공연 ‘어진 눈을 가진 사람들 관현맹인이 빚는 고른 음률’ <세종의 마음> 공연을 개최한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us3RXmGVTnVmsjk51sW0Nw 관현맹인전통예술단 유튜브 http://oh-gukak.kr/ 관현맹인전통예술단 홈페이지 올해로 3회를 맞는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경복궁 특별기획공연은 전통과 현대가 고루 어우러진 음악들로 가을을 맞이한 아름다운 경복궁의 풍광을 곱게 물들이고 나아가 전통음악의 아름다움과 세종의 애민정신을 널리 알리는 귀한 순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이날 공연에서는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의 마음을 담아 작곡한 전통음악 ‘여민락(與民樂)’을 시작으로 태평성대의 소망을 담은 남녀창 가곡‘태평가’, 관현맹인의 대표 레퍼토리 중 하나인 크로스오버 앙상블 곡 ‘산책’, 서로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펼치는 특별한 타악합주 ‘천·지·인’, 판소리 수궁가 중 땅으로 나온 자라가 호랑이를 만나며 겪는 에피소드를 합창과 함께 연주하는 ‘범 내려온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요 ‘아리랑’ 등 다채로운 국악의 매력을 선보일 예정이다. 관현맹인이란“시각장애인 악사는 앞을 볼 수 없어도 소리를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세종실록 54권, 세종 13년)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궁중음악기관 장악원 소속 시각장애인 악사들에게 관직과 녹봉을 주며 지원한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반영된 제도이다.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은 이러한 관현맹인 제도를 계승하여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2011년 3월 창단했다. 본 공연은 경복궁 관람객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관람문의 및 자세한 내용은 관현맹인팀 (02-880-0690~7)을 통해 안내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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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2023-09-12
  • [국악공연] 9월 5일 서울돈화문국악당 - 가곡이수자 지민아 '가곡의 흐름 2'
    1. 공연명 : 가곡의 흐름 22. 장소 : 서울돈화문국악당 ▶ 지도보기3. 날짜 : 2023년 9월 5일 (화요일)4. 시간 : 오후 7시 30분 5. 티켓료 : 전석 20,000원6. 문의 : 02-3210-70017. 공연정보 더보기 ▶ 인터넷 예매하기◆ 출연진 : ▶ 지민아 프로필, 대금 배근우, 피리.생황 이나연, 타악 이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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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2023-08-31
  • [무료초대] 4월 29일 얼쑤마루 대공연장 - 무형유산 레지던시 기획공연 '숨가춤' (이노연,김미경,공민선 출연)
    1. 공연명 : 2023년 무형유산 공연제작 예능풍류방 레지던시 기획공연 숨(歌)가춤2. 장소 : 전북 전주시 국립무형유산원 얼쑤마루 대공연장 ▶ 지도보기3. 날짜 : 2023년 4월 29일 (토요일)4. 시간 : 오후 4시 5. 티켓료 : 전석 무료초대6. 문의 : 063-280-15247. 공연정보 더보기 ▶ 인터넷 예매하기◆ 출연 : 숨(歌)가춤은 부산시립무용단 수석안무자와 국립남도국악원 초대안무자를 역임한 ▲ 국가무형문화재 승무·살풀이춤 이수자 이노연, 한국전통가무악연구원을 운영하며 연출가로도 활동 중인 ▲ 국가무형문화재 가곡 이수자 김미경, 그리고 국립남도국악원 안무자를 역임한 ▲ 국가무형문화재 승무·살풀이춤·승전무 이수자 공민선의 진솔한 삶과 예술의 이야기를 담은 공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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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전라
    2023-04-25
  • [국악공연] 4월 11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 - 이아름 여창가곡 한바탕 '녹음방초'
    1. 공연명 : 이아름 여창가곡 한바탕 '녹음방초2. 장소 :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 ▶ 지도보기3. 날짜 : 2023년 4월 11일 (화요일)4. 시간 : 오후 6시 5. 티켓료 : 전석 10,000원6. 문의 : 02-786-14427. 공연정보 더보기 ▶ 인터넷 예매하기◆ 출연진 : ▶ 이아름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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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2023-04-05
  • 12월 31일 국립부산국악원 - 2022 송년공연 '전통에 대한 경의 special'
    12월 31일(토) 오후 3시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에서국립부산국악원의 송년선물!전통예술을 기반한 국악관현악 협주곡으로 임인년을 보내고 계묘년의 안녕을 기원한다.□ 국립부산국악원(원장 이정엽)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의 희망을 전하는 2022 송년공연<전통에 대한 경의 special>을 12월 31일(토) 오후 3시에 연악당에서 개최한다.전통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스페셜 무대를 만들다.□ 국립부산국악원은 2014년 제10회 기악단 정기연주회 ‘전통에 대한 경의 Ⅰ’을 개최한 이래, 전통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동․서양음악의 작곡가들과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강태홍류 가야금산조와 동래학춤, 부산농악, 부산 기장 오구굿 등 지역에 뿌리를 둔 무형문화재들을 중심으로 재탄생시킨 초연 작품들을 발표하고, 음반과 악보집을 발간하여 창작국악의 새로운 지표를 찾아가고 있다.□ 이번 송년공연은 <전통에 대한 경의 시리즈> Ⅰ~Ⅴ 중 관객의 찬사를 받은 창작곡을 한 자리에 모았다. 수룡음, 수체천, 태평가, 가야금산조, 부산 기장 오구굿과 같은 전통음악에 기반을 두었으며, 원영석(KBS 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 객원지휘자와 40여명의 국립부산국악원 단원이 함께하여 창작 국악관현악의 진수를 선사한다.전통과 현대가 교감하는 특별한 무대!□ 공연은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둔 국악관현악 협주곡이다. 남창가곡을 위한 국악관현악 「폭포수 아래 Ⅱ」, 여창과 거문고를 위한 국악관현악 협주곡 「태평성대」, 수제천 주제에 의한 대금 협주곡 「영원: Eternity」, 강태홍류 가야금산조 주제에 의한 가야금 협주곡 「파사칼리아」,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추는 바다」 등 총 5작품을 펼친다. 전통에 경의를 표하는 자리를 마련하다□ 국립부산국악원 이정엽 원장은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는 작곡자와 연주자의 창작활동으로 전통음악의 계승과 창조적인 국악발전을 모색하는 무대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공연관람은 취학아동이상으로 전석 10,000원이며, 국립부산국악원 누리집(http://busan.gugak.go.kr)에서 온라인예약 및 전화예약이 가능하다. 국립부산국악원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공연현장 관련 방역 지침이 잘 준수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문의) 051-81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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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경남
    2022-12-27
  • 12월 1일~16일 서울돈화문국악당 - 2022 국악대학전 '내일의 예인'
    서울남산국악당과 정가악회의 공동기획으로 선보이는<2022국악대학전>이 10월 31일(월)~11월 2일(수)에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진행되었다. 국악대학전은 2014년 ‘예인, 한옥에 들다’를 전신으로 하여, 2017년부터는 ‘가곡’, ‘판소리’, ‘산조’ 분야로 장르를 확장하여 현재까지 6년째 이어져오고 있는 국악분야 대표적 예술축제이다. 국악대학전은 전국의 국악전공 대학생을 대상으로 대학별 대표 소리꾼, 산조연주자, 가단을 선정하고 멘토링 및 다양한 워크숍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에게 예술가로 성장할 기회를 제공한다. 단순히 경쟁만으로 과열되는 것이 아닌, 출연자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발전된 모습을 선보임으로써 ‘건강한 축제의 장’을 마련한다.올해 국악대학전은 지난 7월 참가자 모집을 시작으로 7월 31일부터 8월 14일까지 유튜브를 통해 전문평가단의 평가와 관객의 투표로 이루어지는 <1차 동영상 무대>와, 8월 30일부터 31일까지 멘토가 직접 선정에 참여하는 <2차 대면 무대>를 통해 ‘가곡대학전’ 3팀, ‘판소리대학전’ 5팀, ‘산조대학전’ 10명의 출연자들을 선발하였다. 이후 9~10월 중 개별 멘토링과 10월 7일~10일 3박 4일간 필봉문화예술촌에서 열린 <정가악회 음악학교> 프로그램을 통한 합숙형 워크숍을 진행하였으며, 대망의 <2022 국악대학전 본 무대>에서 당일 관객투표와 심사위원 평가를 통해, 장르별 ‘내일의 예인’과 ‘음원 특전’을 선정하며, 선발된 출연자에게는 ‘멘토와 함께하는 개인 독주회’와 ‘온라인 음원 발매’ 특전이 주어졌다.국악대학전은 지금까지 관객과 함께하는 ‘축제’의 형태로 진행해왔다. 특히 본 공연에서 관객들의 현장 투표로 내일의 예인과 음원 특전을 선정하는 방식은 이슈가 되기도 했다. 본 공연 또한 라이브 생중계로도 동시에 진행하며 관객의 투표를 온라인으로 받아 관객들과의 새로운 소통방식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라이브 생중계는 정가악회 유튜브 채널을 통해 송출되었다.공연당일 결과를 통해 2022국악대학전 특전 선정자가 선발 되었다.내일의 예인에 선정된 특전자들은 12월1일~16일 19:30에 ▶ 서울돈화문국악당 에서 만날 수 있다. 산조대학전 내일의 예인 박수빈(서울대), 오대주(한예종), 이지수(서울대), 정혜원(한예종),온라인 음원 민지원(한양대), 박수빈(서울대), 원혜정(서울대), 이우현(한양대)
    • 공연소식
    • 서울
    2022-11-23
  • [무료초대] 11월 15일 평화문화진지, 가곡 이수자 이아름과 황신혜밴드 허동혁 협업 - 느림과 빠름 고민한 공연 ‘시-시(時-詩)’ 선보여
    1. 공연명 : 이아름의 정가 '시시'2. 장소 : 서울 도봉구 마들로 932 ▶ 지도보기3. 날짜 : 2022년 11월 15일 (화요일)4. 시간 : 오후 5시 5. 티켓료 : 무료초대6. 문의 : 010-2302-9029 ◆ 출연진 : ▶ 이아름 프로필 , 사운드 디자인- 황신혜밴드, 팔도보부상 멤버 허동혁 ‘시-시(時-詩)’라는 공연 타이틀을 생각한 계기에 대해 공연을 기획한 이아름은 “빠른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면 불안감을 조성하는 사회에서 느린 음악을 들을 때 시계를 보는 사람이 왜 많은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며 “느림이 인생의 특권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속도의 결정권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말했다. 프로그램1. 십이난간-심영경(조선 고종, 7언시)2. 북두칠성-작자미상3. 달은 반만-작자미상4. 임술지-작자미상5. 모란은-김수장(조선 숙종,영조)6. 반딧불-윤동주(1917-1945)7. 별 헤는 밤-윤동주(1917-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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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2022-11-08
  • 10월 31일~11월 2일 서울남산국악당 크라운해태홀 - '2022 국악대학전'
    1. 공연명 : 2022 국악대학전2. 장소 : 서울남산국악당 크라운해태홀 ▶ 지도보기3. 날짜 : 2022.10.31 ~2022.11.024. 시간 : <산조대학전> 10월 31일 (월) : 18시 30분 <가곡대학전> 11월 01일 (화) : 19시 00분 <판소리대학전> 11월 02일 (수) : 19시 00분 5. 티켓료 : 전석 12,000원6. 문의 : 02-583-99797. 공연정보 더보기 ▶ 인터넷 예매하기
    • 공연소식
    • 서울
    2022-10-20
  • 9월 14일~22일, 전통 바탕으로 색다른 창작 무대 이어가는 국립국악원 기획공연 ‘공감시대’ 선보여
    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이 전통을 바탕으로 관객과 공감할 수 있는 창작 예술가들의 기획공연 <공감시대>를 오는 9월 14일(수)부터 10월 20일(목)까지 총 10회에 걸쳐 풍류사랑방 무대에 올린다. 이번 <공감시대> 공연은 각 월별 장르별 무대로 꾸며, 성악과 기악 분야의 연주자를 중심으로 구성한 9월과 무용과 연희 분야로 꾸민 10월 공연으로 색을 달리해 선보인다.판소리합창으로 듣는 소리극 ‘판소리아지트놀애박스’정가 창법으로 듣는 서양가곡과 90년대 가요 리메이크 ‘장명서×안정아’9월 공감시대의 첫 무대는 전통 성악을 기반으로 한 창작 공연 두 작품으로 문을 연다. 14일(수) 첫 무대에서는 소리꾼 박인혜가 직접 각색과 연출, 작사, 작창, 음악감독까지 맡아 최근 다양한 무대를 통해 화제를 모은 바 있는 ‘판소리 합창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의 눈대목을 모아 선보인다. 15일(목)에는 젊은 가객 안정아와 장명서가 정가 창법을 통해 들려주는 서양 가곡과 90년 가요 등을 리메이크해 성큼 다가온 초가을 밤의 편안한 휴식 같은 시간을 선사한다.이것은 국악인가, 중동 음악인가? 국경 넘나드는 그룹 ‘TAAL’자유로운 즉흥의 하모니, 시나위로 형식 넘나드는 ‘앙상블시나위×김덕수’국악으로 색다른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두 단체의 9월 20일(화) 무대도 눈길을 끈다. 파키스탄의 전통음악인 까왈리(Qawwali)에 우리 전통음악인 경․서도소리를 더해 국경을 넘나드는 그룹 ‘TAAL’의 무대에서는 두 음악의 환상적인 조화를 통해 탄생한 색다르고도 놀라운 음악을 만날 수 있다. 이어서 장구의 김덕수 명인과 함께하는 앙상블시나위의 무대에서는 즉흥이라는 주제로 하모니를 이뤄가는 ‘길 위의 시나위’를 통해 음악적 형식을 넘어 쏟아내는 흥과 신명을 자유롭게 펼쳐낼 예정이다.익숙한 듯 생소한 전통 악기로 빚은 매력적인 음악‘한솔잎’의 철현금과 운라, ‘정영범’의 비파, ‘윤은화’의 양금9월 21일(수) 무대에서는 철현금, 비파, 양금 등 생소하지만 매력적인 음색을 지닌 악기들이 빚어내는 색다른 음악을 소개한다. 섬세하면서도 힘과 절도가 느껴지는 철현금과 운라, 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비파, 박진감 넘치는 타악기와 화려한 선율을 들려주는 현악기의 멋을 품은 양금과의 만남이다. 철현금 및 운라연주자 및 창작자 한솔잎과 우리나라의 첫 남성 비파 연주가인 정영범, 대표 양금 연주자 윤은화가 함께한다.바이올린, 하프 등 서양악기와 국악기가 만나 전하는 색다른 성음‘SaaWee’(바이올린×장구), ‘줄앙상블’(해금×비올라), ‘1247’(가야금×하프)9월 22일(목) 무대는 유럽과 미국을 주 무대로 국악기와 서양악기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는 예술가들의 무대다. 가야금과 하프의 만남 ‘1247’, 해금과 비올라의 조화 ‘줄앙상블’, 바이올린과 장구가 만나 다채로운 음악을 표현한 ‘SaaWee’가 무대에 오른다. 이 세 팀은 국립국악원에서 국내외 국악 콘텐츠 홍보 등을 위해 제작한 뮤직비디오 <국악人프로젝트>에서 발굴한 단체로 화면을 벗어나 실제 무대를 통해 관객과 만나는 뜻 깊은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국립국악원 기획공연 <공감시대> 9월 공연은 9월 14일(수)과 15일(목), 그리고 20일(화)부터 22일(목)까지 총 5회에 걸쳐 19시 30분,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선보인다. 국립국악원 누리집(http://www.gugak.go.kr)과 전화(02-580-3300)로 예매 가능하다. 전석 2만원 (문의 02-580-3300)
    • 공연소식
    • 서울
    2022-09-02
  • 9월 4일 오후 3시, 제10회 손정화 가야금독주회 METAVERS&GAYAGEUM (메타버스&가야금정악)
    9월 4일 오후 3시, 제 10회 손정화 가야금 독주회 METAVERS&GAYAGEUM (메타버스&가야금정악)이 이프랜드(IFLAND) 도란도란 공연장 룸에서 진행된다. ▶ 손정화 프로필 이프랜드(IFLAND)는 SKT에서 개발한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관객들은 핸드폰을 통해 입장하면 가상공간에서 실제 공연을 보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한국 전통음악의 여러 갈래 중 하나인 정악을 거문고, 대금, 피리, 생황 등과 함께 옴니버스 형식으로 선보일 예정이며, 궁중에서 연주된 연례악인 도드리와 천년만세, 수요남극지곡, 평조회상과 풍류방 음악인 여창가곡이 연주된다.손정화는 한양대학교에서 음악연주학 박사학위(D.M.A)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김병호류 가야금산조 보존회와 (사)한국가야금연주가협회, 양금연구회의 회원으로 활발한 연주활동과 더불어 국가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 이수자 및 6장의 음반 발매 및 저서 ‘전공자를 위한 12현 가야금 초견’을 발간하였다.출연자로는 손정화 외 장구 서수복(국립국악원 창작악단 단원)과 거문고 도경태 (KBS국악관현악단 단원), 대금/단소 이승엽 (국립국악원 정악단 부수석), 피리/생황 안형모 (KBS국립국악관현악단 단원)가 함께 참여하였다.공연 관람방법은 휴대폰 앱스토어에서 이프랜드를 다운로드 받은 뒤 회원가입 후 손정화 가야금 독주회 검색을 통해 입장할 수 있으며, 이프랜드 정원제에 따라 130명만 관람이 가능하다.
    • 공연소식
    2022-08-24

국악동영상 검색결과

국악인프로필 검색결과

  • 남수연 프로필 - 여창가객
    ☆ 남수연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정가, 가곡 수련과정ㅣ학력 부산대학교 한국음악학과 졸업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 과정 재학 중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전수장학생 활동 경력 수상 경력 2020 국악대학전 가곡 내일의 예인 부산대학교 남수연가단제1회 정가경창대회 대학부 대상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e9r57CMZWEc [남수연가단 - 환계락] 기타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악인프로필
    • 가,나,다
    2024-02-03
  • 최민서 프로필 - 가야금연주가
    ☆ 최민서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가야금 연주 수련과정ㅣ학력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졸업용인대학교 국악과 졸업 및 동대학원 수료 활동 경력 인천연수구립전통예술단 단원국립 정동극장 예술인턴 역임한국가야금연주가협회 정회원유대봉제 백인영류 가야금산조보존회 정회원인천시무형문화재 제7-1호 남창가곡 악사보존회 이사국립국악원 국악박물과 재개관 기념 기획공연 ‘젊은국악 풍류를 그리다’ 32Festival international jazz plaza CUBA . 아바나 국제재즈페스티벌 초청 공연Spain Barcelona 「World Routes 2017」 초청 공연Georgia ‘2020 국제현대예술13’ 개막공연kbs국악의 향기, kbs콘서트7080, Mnet더 마스터 출연 수상 경력 제12회 인천전국국악경연대회 기악부문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홈페이지ㅣSNS https://www.instagram.com/minseo_3070 [인스타그램]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Xlep7oqa8vo?si=BjZ1-zosdCHpnGY5 ['절영의 전설' (지휘: 한진, 25현가야금: 최민서)] 기타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악인프로필
    • 사,아,자,차
    2024-01-16
  • 박새한 프로필 - 피리연주가
    ☆ 박새한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피리, 태평소연주가, 장새납연주가 수련과정ㅣ학력 곽태규, 박영기, 이영, 이영훈, 이호진 선생 사사국립국악중학교 및 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한국예술영재교육원 수석 수료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재학 중 활동 경력 사단법인 경기음악연구회 동인국립국악원 국악 디지털 음원 피리, 태평소 실연자 수상 경력 2018 제17회 평택 지영희 전국국악경연대회 고등부 장원2018 제5회 화성시 전국청소년국악경연대회 대상2019 제35회 동아국악콩쿠르 학생부 피리부문 금상2020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상2022 제42회 온나라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 홈페이지ㅣSNS https://www.instagram.com/saehaniii [인스타그램]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wHZZZDnq7rQ [서용석류 피리산조]https://youtu.be/mNJc2Xh9CDY [피리독주 상령산풀이]https://www.youtube.com/@Taepyeongso [박새한 유튜브채널] 기타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피리수석이자 가곡 반주의 대가인 ▶ 박영기 선생의 아들이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악인프로필
    • 라,마,바
    2022-11-23
  • 김승란 프로필 - 정가
    ☆ 김승란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정가, 가사, 가곡 수련과정ㅣ학력 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 재학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전수자 활동 경력 수상 경력 2013년 제29회 동아국악콩쿠르 학생부 정가부문 금상2016년 제36회 온나라국악경연대회 정가부문 금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N8YeZ8Ipr7Q [가사 '수양산가'] 기타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악인프로필
    • 가,나,다
    2022-09-15
  • 정승준 - 정가
    ☆ 정승준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정가, 가곡 수련과정ㅣ학력 국립국악중학교 및 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졸업 (학사)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전수자 활동 경력 수상 경력 제25회 전국학생국악경연대회 시조부문 최우수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제8회 월하전국 정가경창대회 명가부 우수상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ZSW-ifw6PN4 [태평가 - 구민지, 정승준]https://youtu.be/mWVxDu4bFDA [남창가곡 편락 ‘나무도’]https://youtu.be/MX-X3gedynM [정승준 '북천이 맑다커늘' (풍류대장 1회)] 기타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악인프로필
    • 사,아,자,차
    2022-07-19
  • 안하윤 - 태평소, 피리연주가
    ☆ 안하윤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피리, 태평소연주가 수련과정ㅣ학력 배양현, 김경수 선생 사사부산대학교 한국음악학과 졸업부산대학교 일반대학원 한국음악학과 석사 졸업 활동 경력 가곡전수관 (마산) 국악연주단 '정음' 단원 역임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비상임단원 역임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일반전수생국악그룹 '뜨락' 피리,태평소 연주자창원국악관현악단 단원김해문화원 문화학교 및 국악관현악단 강사 수상 경력 제26회 부산국악대전 일반부 기악 장원제10회 포항전국국악경연대회 일반부 기악 대상 홈페이지ㅣSNS http://www.instagram.com/hayoonahn [인스타그램]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wvOvscnjx38 [피리협주곡 자진한잎 (작곡 이상규, 피리 안하윤)]https://youtu.be/T7PQ67eyEdk [e-끌림 콘서트 '육사씨미']https://youtu.be/RpmfwKNUCa8 [창작국악관현악 '맥을 잇다' (창원국악관현악단)] 기타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며, 공개된 정보를 수집, 정리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악인프로필
    • 사,아,자,차
    2022-07-12
  • 조윤영 프로필 - 정가
    ☆ 조윤영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정가 수련과정ㅣ학력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음악과 졸업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재학 활동 경력 현재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프로젝트 단원서울시청소년국악단 단원 수상 경력 2016 제32회 동아국악콩쿠르 학생부 은상2017 제16회 전국정가경창대회 일반부 전체대상 (국무총리상)2018 국악대학전 내일의예인 선정2020 제40회 온나라국악경연대회 정가 은상2022 제42회 온나라국악경연대회 정가 금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9ADnvhBEOgA [여창가곡 계면조 평롱 '북두칠성']https://youtu.be/qBGYlZybyuU [무엇찾니]https://han.gl/ssAtv [조윤영 유튜브채널] 기타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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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30
  • 신근영 - 거문고연주가
    ☆ 신근영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거문고 연주 수련과정ㅣ학력 대전예술고등학교 졸업추계예술대학교 졸업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 졸업 활동 경력 가곡전수관 연주단원 역임프로젝트팀 '더탄' 대표 수상 경력 전국난계국악경연대회 고등부 장려상전국학생국악경연대회 현악 대상 전국승달국악대제전 현악 일반부 최우수상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기타 싱글 디지털앨범 '인스툴(INSTOOL)' 발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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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아,자,차
    2022-01-17
  • 구민지 - 여창가객
    ☆ 구민지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정가, 가곡 수련과정ㅣ학력 국립국악중학교 및 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이화여자대학교 한국음악과 졸업이화여대대학교 일반대학원 한국음악과 석사과정 재학 활동 경력 서울시청소년국악단 단원음악그룹 '구이임' 동인 수상 경력 2017 제37회 온나라국악경연대회 정가부문 1등2020 제30회 kbs국악대경연 성악부문 은상 홈페이지ㅣSNS https://www.instagram.com/koominji_s2 [구민지 인스타그램] 동영상 보기 https://han.gl/3SlLM [구민지 유튜브채널]https://youtu.be/YUxI9pXVIC8 [구이임 프로젝트 - 나의 바다]https://youtu.be/jnDV_q8I_0Y [해음 (구민지,황혜영,하수연) - 싸구려 커피 (풍류대장 4회)] 기타 ‘구이임프로젝트'는 국립국악고등학교 동문 (구민지, 이채현, 임정완) 이 만나 2020년 결성된 정가, 가야금, 건반 및 미디사운드로 구성된 팀이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악인프로필
    • 가,나,다
    2021-11-20
  • 이성순 - 여창가객
    ☆ 이성순 프로필 사진 전공ㅣ분야 판소리, 정가, 가곡, 가사 수련과정ㅣ학력 조창훈, 김호성, 조순자, 이동규, 이준아 선생 사사판소리 송순섭, 민요 강송대 선생 사사동국대학교 불교문화예술대학원 석사 (가곡 전공)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 활동 경력 전통음악연구회 '소리무늬' 대표 수상 경력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7SSlkystVcw [사설시조 명년삼월] 기타 2019년 남도가객 '이성순 시조' 음반 발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악인프로필
    • 사,아,자,차
    202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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