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국악정보
Home >  국악정보  >  자료실

실시간

실시간 자료실

  • '애국가'와 '아리랑'에 대한 불편한 진실, 그리고 통일한국의 국가
    시사IN 고재열 기자가 쓴 아리랑에 대한 글입니다. 통일한국 국가로 '아리랑'이 '애국가'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http://poisontongue.sisain.co.kr/1922
    • 국악정보
    • 자료실
    2012-08-28
  • 부활하는 한국의 전통악기
    ☞ 자세히 보기 크로스오버, 퓨전, 융합 이라는 단어는 어떤 분야에서나 이슈가 되어 온지 오래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국악 역시 퓨전의 한 대상으로 또는 퓨전을 도약의 발판 삼아 대중에게 듣기 좋은 음악으로 파고들고 있습니다. 모 아파트 광고음악에도 연주곡을 제공했던 숙명가야금연주단은 이미 우리나라 최고의 비보이팀들과 함께 장기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재일교포 뉴에이지 음악가 양방언이 국악을 세련되게 접목한 곡을 듣고 기존 국악의 이미지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동서양의 음악을 해금으로 풀어내는 해금실내악단 ‘이현의 농’의 해금소리나 프로젝트락 등 젊은 국악인팀에 반한 젊은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서양 문화의 범람 속에서 국악이 새로운 형태로 그 개성과 가치를 빛내는 데에는 우리 전통악기 마다의 특색 있는 음색과 정서도 한 몫 한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전통악기의 분류 특색 있는 전통악기들
    • 국악정보
    • 자료실
    2012-08-26
  • 아리랑 - 이익우님 시
    아리랑 아라리요 언제부터 불렀던가 아리랑 아라리요 누가 먼저 읊었던가 아리랑 고개고개 얼마나 넘었던가 아리랑 아라리요 그 가락에 흥을 싣고 아리랑 아라리요 그 노래에 한을 담어 아리랑 고개고개 넘으면서 살아왔네 더 보기 --> blog.daum.net/leecj03/413
    • 국악정보
    • 자료실
    2012-08-26
  • [도서소개] 국악의 모든 것
    -->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605486 초등학생들에게 우리 음악의 역사, 우리 악기, 우리 장단과 갈래 등 국악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주는 책. 서양 음악과 우리 음악을 모두 전공한 저자가 어린이들이 국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장 하나하나 어린이들의 관심과 수준을 고려하면서 썼다. 교과서와는 다르게, 그림으로 만나는 국악 정보는 아이들에게 학습에 대한 새로운 재미와 흥미를 줄 것이다. 선사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우리 음악의 역사 이야기와 60여 가지 정도 남아 있는 우리 악기 중 거문고, 가야금, 장구, 꽹과리 등 지금도 많이 쓰이고 있는 우리 악기 이야기를 세세하게 들려준다. 세마치장단, 굿거리장단 등 음악 시간에 꼭 배우는 우리 장단과 종류도 담아내, 이 책 한 권이 국악 지식을 알려주는 정보서 역할을 제대로 할 것이다. [알라딘 제공]
    • 국악정보
    • 자료실
    2012-08-24
  • 사투리에 따라 달라지는 한국의 민요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1. 언어가 다르면 노래가 달라진다. 15세기 한국의 음악문화는 대단히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었다. 편경 편종과 같은 악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중국음악어법의 문묘제례악이나 한국음악어법의 종묘제례악악을 작곡하였는데 그 음악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음악학도 발달하여 그 당시의 음악이론을 집대성한 악학궤범(樂學軌範)같은 책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 악학궤범에 보면 노래에 대하여 “歌所以永言而和於律”이라고 간단히 언급한 구절이 있다. 이 말은 “노래란 말을 길게 하여 음율에 맞춘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말이 노래가 된다는 것이다. 하긴 인도노래는 인도말을 길게 하여 인도음율에 맞춘것이고 중국노래는 중국말을 길게 하여 중국음율에 맞춘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같은 논리로 우리나라 노래는 한국말을 길게 하여 우리나라의 음율에 맞춘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말이 노래가 되는 과정을 검증해 보자. 본격적인 노래가 아니면서 노래의 요소가 많은 언어현상을 찾아보자. 옛날 어머니나 할머니들은 아기를 재울때 “자장자장 자장자장 우리아가 잘도 잔다. 멍멍개야 짓지마라 우리아가 잘도잔다.”와 같이 읊조리면서 아기를 재웠다. 그런 소리에는 장단도 있고 곡조도 있으니까 노래의 요소가 많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어린학생들이 구구단을 외울때 “이이는 사 이삼은 육 이사 팔 이구 십팔”하고 외운다. 그 소리에도 장단과 곡조가 있다. 상인들이 외치는 소리에도 곡조가 있고 농부들이 소를 몰면서 하는 소리에도 곡조가 있다. 이런 소리들이 노래의 바탕이 된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우리노래의 모습은 어떨까?. 간단한 것으로는 ‘새야새야’와 같이 3음으로 되는 것이 있다. 완전4도 위에 장2도를 쌓아 올려 만들어지는 이 3음계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새야새야’의 곡조가 된다. 그런데 그 곡조도 처음을 하행으로 시작하여 “솔레라솔- 라솔레레- 라레라라- 라솔레레-”와 같이 하는 경우도 있고 처음을 상행으로 시작하여 “라레라라- 라솔레레- 솔레라솔- 라솔레레-”와 같이 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 두가지 곡조가 다 쓰인다. 또 가사를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로 해도 마찬가지이다. 말을 읊조리듯이 하여 만들어지는 간단한 민요는 3음만으로도 노래가 된다. 그런데 이 ‘새야새야’는 박자가 5박자이다. 서양음악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5박자가 우리노래에서는 가장 간단한 민요에도 사용되고 있다. 실제 우리나라의 노래에는 5박자가 많이 쓰인다. 농촌에서 모를 심을때 부르는 모심기 노래에도 “심어주게- 심어주게- 심-어주- 게---- 오-종조옹 줄-모르을 심-어주- 게---- ”와 같이 5박자로 부른다. 우리말이 석자나 넉자로 이루어지는 말이 많기 때문에 그 석자나 넉자를 우리가 말하는 식으로 읊조리면 5박자가 될 때에 편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5박자를 늘이면 8박자가 된다. 서양음악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5박자와 8박자가 우리음악에서는 아주 많이 사용하는 박자가 되어 있다. ‘시조’의 초장은 박자가 5․8․8․5․8 이니까 5박과 8박이 섞여 있는 박자인데 경기민요인 ‘노랫가락’도 그런식으로 되어 있다. ‘노랫가락’은 ‘시조’와 같은 3장형식의 시를 가사로 하는 노래인데 “청-산리- 벽게-수-야-- 수이---감을- 자랑-마- 라---- ” 와 같이 5박과 8박을 섞어서 박자로 쓰고 있다. 현행의 시조나 가곡이 다 5박구조와 8박구조로 되어있고 풍류로 연주하는 영산회상의 상영산이나 중영산 세령산이 다 5박구조이다. 많은 궁중음악이나 고려때 가요로 알려진 ‘가시리’ ‘사모곡’ ‘서경별곡’ 청산별곡‘ 같은 노래도 다 5박구조와 8박구조로 되어 있다. 서양음악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5박자와 8박자가 우리음악에서는 아주 흔하게 쓰이고 있다. 우리말이 그런 박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말에는 사투리가 있다. 음악이라는 두 글자도 전라도에서는 “으마악-”과 같이 발음하고 경상도에서는 “어막”과 같이 발음한다. 전라도의 사투리는 소리를 뒤로 밀면서 발음하기 때문에 소리의 세(勢)가 뒤쪽으로 계속 진행할려는 경향을 갖는데 반하여 경상도 사투리는 뒤가 끊어지면서 앞쪽에 액쎈트가 가게 된다. 그러면 두 지방의 민요도 그와 같이 발달하게 된다. 전라도 민요는 선율이 계속 진행할려는 경향을 갖기 때문에 ‘진도아리랑’의 첫부분이 “무운경- 새재애느은 웬 고오오갠가 - ” 하면서 뒤를 떨면서 지속하고 있다. 한편 경상도 민요는 “어막”이라는 말과 같이 앞에 액쎈트를 주면서 뒤는 곧 끊어지게 소리내기 때문에 ‘밀양아리랑’의 경우 “날쫌보소오 날쫌보소오”와 같이 부르게 된다. 사투리의 억양이 그대로 민요에 반영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투리에 따라서 민요의 구조나 특징이 달라지기 때문에 전라도민요 경상도민요 경기민요등의 갈래가 형성되게 되고 민요권이라는 것이 성립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땅덩이는 그리 크기 않지만 각 지방마다 독특한 사투리가 있어서 그와 같은 맥락의 특징있는 민요가 많이 발달 하였다. 내가 채집해 본 바로 우리나라의 민요는 제주도 한 도에서 300곡 이상이 나올 정도로 많은 민요가 발달하였다. 나는 그 중 170곡 정도를 골라 악보를 낸 적이 있다. 악학궤범의 언급대로 노래란 말을 바탕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말이 다르면 노래가 달라진다. 인도에는 인도식 노래가 중국에는 중국식 노래가 발달하는 것도 다 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안에서도 사투리가 다르면 다른 특징의 노래가 발달하지 않았던가?. 앞으로도 우리말을 절묘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노래문화를 창출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 더 많은 내용 자세히 보기
    • 국악정보
    • 자료실
    2012-08-18
  • 한국인들의 놀라운 음악재주
    최종민 교수는 1942년 강릉 태생으로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성균관 대학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68년 안동교육대학 교수로 출발 강릉대, 전남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를 거쳐 남원정보국악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후 국립창극단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민속음악>, <국악의 새로운 숨결>,<민요-이렇게 가르치면 제맛이 나요>, <한국전통음악의 미학사상> 등이 있다.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한국출신은 음악을 잘 한다. 보통사람들도 노래를 잘 하지만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음악가가 많다. 장한나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얼마 안 되어 세계적인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쿨에 나가 우승하는 영광을 안았다. , 장영주도 대단한 재능을 인정받고 세계적으로 크게 활동하고 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출신의 음악가들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정트리오를 비롯해서 김영욱 강동석 등의 기악분야도 그렇지만 요즘은 조수미 신영옥 홍혜경 등이 성악분야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작곡분야의 윤이상이나 비디오 아-트의 백남준 모두 뛰어난 한국인들이다. 서양음악을 접한 지 1세기 밖에 안 되고 본격적으로 서양음악을 공부한지 70년 정도 밖에 안 되는데 그렇게 서양음악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정말 우리민족은 음악에 놀라운 재주와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가장 국제 경쟁력이 있는 음악재주를 우리들은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네 대부분이 음악에 큰 재주를 타고 났다.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도 음악을 잘하고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도 음악을 잘한다. 조그마한 한인교회의 성가대들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메시야를 척척 하는 것이 미국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음악 실력이다. 그런데 우리민족의 이러한 음악재주에 대하여 왜 우리에게 그런 음악재주가 형성되었는가를 생각해 본 사람을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늘 노래하고 춤추며 살아왔다. 모를 심을 때에도 노래하면서 모를 심었고 김을 맬 때에도 노래하면서 김을 매었다. 농촌에서는 농사일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어촌에서는 배를 젓거나 그물을 치고 걷을 때에도 노래하면서 손발을 맞췄다. 노래 없이 하는 일은 거의 없을 정도로 모든 일에 노래가 불리어 졌다. 관리들이 근무하는 관아나 군대에도 악사들이 있었고 궁중에는 6세기부터 궁중악사제도가 있었다. 궁중의 모든 의례에는 반드시 음악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궁중악사의 수는 몇백 명에 이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생활은 온통 음악과 함께 하는 생활이었다. 생활의 내용 즉 삶의 내용을 문화라고 한다면 우리네의 문화는 온통 음악과 함께 하는 문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왕조에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 같은 제천대회 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그렇게 살아 온 것이다. 우리의 음악재주와 음악취미는 그렇게 오래 오래 지속되어 온 우리네의 생활 속에서 축적된 것이다.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체질적으로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을 잘 한다. 음악의 소질이 유전되어서 음악을 잘하고 또 생활환경이 늘 음악을 하면서 사는 환경이니까 음악을 잘 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음악가의 가정에서 태어나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라는 자녀들이 음악을 전공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옛날 우리들의 생활이 온통 음악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요즘의 음악가정 출신처럼 음악적인 소질과 취미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소질과 취미를 살리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고 극히 일부만이 그 소질을 개발하여 빛을 발하고 있다. 옛날의 음악환경은 아침에 일터에 나가면 자동적으로 노래를 하게 되고 풍물을 치게 되고 가사를 만들어 부르며 일하는 환경이었다. 남도의 큰 농가에서 모라도 심는 날이면 2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풍물을 치면서 길꼬냉이를 부르며 마을에서 들로 나간다. 일터에서는 모를 찔 때부터 노래를 하면서 모를 찌고 모를 심을 때에도 노래를 하면서 모를 심는다. 중간에 막걸리와 참을 먹는 시간이 되면 또 한 바탕 두레풍장을 치고 논 다음에 막걸리를 마시고 참을 먹는다. 일을 다 마치고 저녁에 마을로 돌아 올 때에도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면서 들어오고 마을에 도착한 다음에도 한 바탕 놀고 나서 헤어지게 된다. 요즈음으로 따지면 생활 자체가 음악적인 환경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노래를 할 때에도 일정한 곡조로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취향대로 높은 소리로 부르기도 하고 낮은 소리로 부르기도 한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도 않는다. 정말 자유롭게 노래를 메기고 받아주며 일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늘 음악과 함께 살아 온 우리여서 그토록 음악의 재능과 취미를 타고 난 것인데 오히려 현대의 생활이 마음껏 음악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도록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한 동안은 술 마시는 기회에 젓가락으로 상 언저리를 두드리면서 노래하곤 하더니만 이제는 그런 관행도 사라지고 노래방에 가서야 노래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능동적으로 노래를 하고 여럿이 어울려 노래하기란 퍽 어렵게 되어 버렸다. 가사나 곡조를 창조적으로 만들어 가면서 부르는 것은 엄두도 못 내는 풍토가 되어버렸다. 음악을 전공하여 우리네의 음악재주를 개발하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재능이나 기질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도 많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민족 구성원들에게는 오랜 세월 우리의 생활에서 형성된 음악의 재주가 얼마든지 잠재해 있다. 이 재주를 갈고 닦아서 세계적인 음악가를 많이많이 길러내어야 한다. 우리는 놀라운 음악의 재주를 타고 난 민족이니까.
    • 국악정보
    • 자료실
    2012-08-15
  • 창극의 스타와 판소리명창
    창극은 스타의 산실이었다. 초창기에는 판소리로 이름 높은 명창들이 창극을 시도했기 때문에 김창환·이동백·송만갑은 그 자체 스타이고 명창이었다. 정정열까지도 명창이 스타가 된 경우이지만 오태석은 조금 달랐다. 오태석은 판소리명창으로 보다는 창극의 스타로 유명했다. 그가 출연한 춘향전(방자역)이나 수궁가(원숭이역) 등에서는 관객들이 오태석의 연기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여성국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박귀희·김소희(햇님·달님) 같은 스타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 후의 임춘앵이나 김진진·김경수도 명창이라기 보다는 스타성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반대로 임방울은 대단한 명창이었지만 창극에서는 스타가 되지 못한 경우이다. 하여 창극의 스타와 판소리명창은 약간 차이가 나는 개념이라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엮어 보기로 하겠다. 1962년 국립국극단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국립창극단이 만들어 질 때에는 영화나 TV 등 새로운 공연물이 늘어나면서 판소리와 창극이 극도로 위축된 시기였다. 이 무렵 김창구를 비롯한 국립극장 관계자들이 창극과 판소리를 함께 보호 육성할 방안으로 국립창극단을 만들었다. 김연수가 초대 단장을 맡고 당시 한 참 활동하던 김소희·박초월·박귀희·김경애·김득수·강종철·김정희·남해성·박봉선·박초선·임유앵·장영찬·정권진·한농선·한승호·허희 등이 단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몇 사람에 대해서는 창극과 판소리에 공헌한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단장을 맡았던 김연수(1907~1974)에 대한 얘기부터 해 보겠다. 김연수는 일제강점기 ‘쑥대머리’ 한 방으로 스타가 된 임방울과 쌍벽을 이루며 창극과 판소리 두 분야에 크게 공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 한문을 배워 유식한 편이었고 성격이 따지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품이라 많은 일화를 남긴 사람이다. 29세의 늦은 나이에 순천의 성군수 집에서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배울 때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수궁가의 가사가 틀렸다고 우겨서 유성준이 그 곳을 떠나게 했다는 얘기가 유명하고 그 일 때문에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성악연구회에 출입하게 되었다. 이 무렵 조선성악연구회에는 정정열이 있어서 창극좌를 만들어 창극을 재건하고 흥행에 성공을 거둘 때인데 김연수는 그 단체에 끼어 활동하면서 본인도 나중에 정정열처럼 창극을 각색·연출·작창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겠다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김연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후에도 늘 지도자의 위치에서 단체를 운영하기도 하고 판소리를 새롭게 만들어 보려 애썼는데 그 결실의 하나가 국립창극단이 출범했을 때 단장이 되어 판소리를 창극으로 각색·작창·연출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판소리도 본인의 미학에 맞게 사설과 곡조를 다시 짜서 새로운 판소리를 만들었다. 본인은 춘향가만 발표했었고 나머지는 모두 오정숙이 차례차례 완창으로 발표했는데 수궁가를 완창하기 직전 김연수는 작고하고 말았다. 오늘날 동초제 판소리라고 하는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 등은 오정숙이 공을 들여 퍼뜨려 전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퍼져나가고 있는데 오정숙의 제자 이일주·조소녀·민소완(성준숙)·김소영 등이 거점이 되어 활발하게 전수하고 있다. 김연수는 토막창극을 재미있게 각색하여 무대에 올린 것으로도 유명한데 지금 그런 작품은 대부분이 전승되지 않고 있다. 판소리로 1964년 인간문화재가 되기도 했던 김연수는 판소리 작품 여러 바탕을 남겼고 많은 창극작품을 무대에 올렸던 초대 국립창극단의 단장이었다. 김소희(1917~1995)는 13~4세 때부터 소녀명창으로 당시 경성방송국에서 판소리 한 대목을 방송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1935년 콜롬비아레코드에 취입하기 위해 정정열 일행으로 일본에 갈 때는 일행이 정정열·이화중선·임방울·박록주·신숙·한성준이었으니 김소희가 최연소 10대 후반의 나이였다. 김소희는 송만갑·정정열·박동실 등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가곡과 거문고·가야금·양금 등을 배워 국악전반에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무엇이든지 잘 하면서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한문과 서예를 신호열선생에게 배워 서예작품이 국전에 3년이나 입선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이런 학습과 경륜을 가진 김소희였기 때문에 창극과 판소리에 기여한 공적 또한 적지 않다. 해방 후 여성국극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박귀희와 김소희가 출연한 햇님·달님이라는 작품이었다. 그 작품은 실제 박귀희와 김소희를 모델로 하여 김아부가 대본을 만든 것으로 대중들의 대단한 성원을 받았고 박귀희는 남자역할로 굉장한 스타덤에 올랐었다. 박귀희를 실제 남자로 착각하고 사모하는 여성들이 줄을 이어 찾아다닐 정도로 유명했었다. 그처럼 여성국극 붐을 만들었던 김소희는 그 후 국립창극단의 여러 창극작품을 작곡하는 작창을 맡아 하기도 했다. 김소희가 한 일은 여러 방면에 걸쳐 참으로 다양하고 많다. 여성국악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했고 그들이 힘을 합쳐 국악예술학교를 만들고 이사장을 한 일이라든지 말년에 국악협회 이사장을 한 일 등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판소리의 격을 높이고 판소리를 국내·외에 선양한 일이라 하겠다. 해방공간에서는 건국의 핵심인사들과 미군정청 관계자들이 회식이라도 하게 되면 김소희·박귀희 등이 그런 자리에 나아가 판소리와 가야금병창을 들려주곤 했는데 그것이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또 1962년에는 한국민속예술단의 일원으로 파리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를 순회 공연했고 1964년에는 삼천리가무단의 일원으로 미국 여러 도시를 순회 공연했다. 1972년 봄 뉴욕 카네기홀에서는 판소리 연주도중 청중들이 기립박수를 할 정도로 크게 감동을 주기도 했는데 서울에 돌아 온 다음 나에게 “저들은 한국말을 모르면서도 판소리에 그처럼 감동을 받는데 한국 사람들은 왜 그런 음악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했었다. 김소희는 명창으로서의 프라이드도 대단했다. 그는 13세에 판소리를 시작한 것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63세되던 1979년이 국악생활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한국 최초로 김소희는 국악생활 50주년 기념공연을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최종민의 사회로 뜻 있게 잘 마쳤다. 그런데 그 후 김소희명창은 큰 무대에 서지 않으려 했다. 내가 왜 그러느냐고 말하면 “나는 명창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내 소리가 나의 마음을 따라 주지 않아 제대로 고음이 나지 않는데 나의 청중들에게 실망스러운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대에 서지 않으려는 것이니 그리 아세요.”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깨끗하고 고고한 김소희명창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제자 복이 없다고 한탄 한 적이 있다. 제자들 중 오정숙은 김연수에게 가고 성창순은 정응민에게 가고 안향련·김동애·박소영은 고인이 되었다. 신영희·안숙선·박윤초·유수정·이명희·한정하·이영태·오정해·김미숙 등이 판소리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국립창극단 출신의 명창을 꼽으라면 박동진을 빼 놓을 수 없다. 박동진은 1975부터 1979까지 제2대 국립창극단단장을 한 명창이다. 박동진도 어린 시절은 판소리를 공부했지만 먹고 살 방도가 없어 지방의 소리선생이나 여성국극단의 반주악사(장구)등을 하면서 살았지만 1962년부터 1972년까지 국립국악원 악사로 있으면서 정력적인 판소리독공을 계속하여 최초로 대중을 상대로 한 흥보가 완창공연을 통해 판소리 중흥에 불을 지핀 인물이다. ‘68년에 흥보가를 5시간에 걸쳐 완창하고 ’69년에는 춘향가를 8시간 동안 완창으로 명동국립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후 박동진은 언론이 주목하는 판소리의 대명사처럼 되었고 계속된 ‘70년 심청가(6시간),’71년의 수궁가(5시간), 적벽가(6시간)완창으로 그는 ‘73년에 판소리의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70년에는 성서판소리 ‘예수전’과 ‘팔려간 요셉’등을 발표하여 한국기독교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이 후 ‘성웅 이순신’ 같은 장편의 서사시는 직접 사설을 짓고 작창 하여 녹음하는 등 판소리 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많이 남겼다. 판소리를 들으러 오는 청중이면 어떤 청중들이라도 쉽고 재미있게 판소리를 감상할 수 있도록 현장에 맞는 소리를 척척 만들어 불러주는 창조능력을 가진 명창이었다. 청중을 울리고 웃기는 능력을 충분이 가지고 있었던 명창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가사를 만들고 내용을 꾸려서 멋지게 전달하는 실력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고의 명창이었다. 박동진에 버금가는 여류명창으로는 오정숙(1935~2008)을 꼽을 수 있다. 박동진이 완창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자 오정숙도 판소리 완창에 도전하게 된다. ‘72년에 춘향가, 73년에 흥보가, 74년에 수궁가, 75년에 심청가를 완창했는데 여류명창이 이처럼 여러 바탕의 판소리를 완창으로 발표한 것은 오정숙이 최초이다. 박동진이 본인의 판소리를 발표했다면 오정숙은 그의 스승 김연수의 작품을 발표한 것이 다를 뿐이다. 이 판소리들은 오늘날 김연수의 호를 따서 동초제 판소리라 부르고 지금 전주를 중심으로 오정숙의 제자들이 잘 전수하고 있다. 오정숙은 1977년부터 90년대 말까지 20여년 국립창극단에 있으면서 많은 배역을 멋지게 해 내었지만 특히 춘향가의 월매 역은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연기를 보여주는 명배우였다. 소리와 연기가 모두 완벽에 가까울 정도 야무지게 활동했던 명창·명배우였던 분이 바로 오정숙이라 할 수 있다. 조상현도 국립창극단 출신의 명창으로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1939년생인 그는 1971부터 1982까지 국립창극단에 있었고 늘 주연을 하며 창극의 대중화에 기여했었다. ‘70년대 말에는 MBC. TV에 창극 프로그램을 만들어 계속 출연하면서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그는 한국 최고의 명창이다. 정응민에게 배운 판소리 춘향가·심청가·수궁가를 주로 부르고 박녹주에게 배운 흥보가를 부를 수 있긴 하지만 정응민이 흥보가를 부르지 않아서인지 조상현도 흥보가를 자주 부르지는 않는다. 그의 장기는 춘향가·심청가·수궁가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떤 청중이라도 “야 - ! 판소리가 참으로 멋있구나.” 할 정도로 감동을 줄 수 있는 명창이다. 발성이 완벽에 가깝고 세세상청을 통성으로 낼 수 있는 유일한 명창이다. 배운 판소리의 작품성이 높기 때문에 본인이 손 댈 필요가 없기도 하지만 본인의 생각(미학)이 멋대로 뜯어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배운 그대로 부르는데 완성도가 높은 판소리를 부른다. 그는 광주광역시 국극단을 만들어 오래 단장으로 있었고 사단법인 판소리보존회 회장으로 역시 오래 활동했다. 다른 명창들처럼 판소리를 개인지도형식으로 한 사람씩 가르치는 교수보다는 다수를 모아놓고 그룹지도처럼 가르치는 강의 식 판소리 교습으로 유명한데 그렇게 가르친 제자들이 수 백 명에 이른다. 조상현은 판소리명창으로 최고의 명창이지만 창극의 배우로서도 최고의 배우라 할 수 있다. 춘향전의 이도령역이나 심청가의 심봉사역을 특히 잘 하고 무슨 역이든지 척척해내는 명배우이다. 내가 국립창극단 출신의 명창들을 몇 사람 소개하는 것은 지금의 후학들이 이런 선배들의 여러 가지 특징 중에 무엇이라도 참고하여 각자의 미래를 더 훌륭하게 설계하고 더 열심히 공력을 쌓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 소개하는 것이다. 지면관계로 너무 간략하게 다룬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 국악정보
    • 자료실
    2012-08-15
  • [PDF] 교육용 국악용어 표준안
    ↑ 다운로드 받으세요. 교육용 국악용어 표준안 표준용어 선정 기준 o 분류/장르를 통틀어 일관성 있게 용어를 채택한다. o 초․중등학교 교육에 적합한 쉽고 흥미로운 용어를 위주로 선정하되 용어의 범위는 국악을 별도로 학습하지 않은 일반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 이론적 깊이는 대학 국악과 1학년 실기 전공자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맞춘다. o 아래 기준을 차례로 만족하는 용어를 표준용어로 선정한다.
    • 국악정보
    • 자료실
    2012-08-15
  • [PDF파일] 국악연감 2009 (Gugak Year Book 2009)
    ↑ 다운로드 받으세요
    • 국악정보
    • 자료실
    2012-08-15
  • 한국문화와 한국음악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Ⅰ. 월드컵 4강의 위업을 달성한 우리나라 우리는 월드컵 4강의 위업을 달성함으로서 국가의 인식과 위상이 높아지고 국가 브랜드가 높아졌다고들 말한다. 축구의 변방국가가 아니라 중심국가로 도약했다고도 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최고 우승국은 한국이라 하고 실제 넷티즌들의 투표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팀으로 한국팀이 뽑히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는 엄청난 이익을 얻는 성공한 월드컵을 치렀고 새로운 응원문화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대단한 모습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세계에 과시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을까? 참으로 감동적인 6월을 보낸 것이다. 이제 그 세계인과 함께 하는 월드컵 축제는 끝났다.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특히 교육에 종사하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가를 생각해야 할 계제인 것이다. 교육은 미래를 살아갈 후진들을 훈련시키는 일련의 활동이고 교육의 내용은 문화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정보화가 이루어지는 21세기는 문화가 중시되고 문화가 부(富)를 만들어 주는 시대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들은 그 문화에 대해서 아무런 논리도 문화의 시대를 대비한 아무런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해서 걱정이다. 문화를 가장 좁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술을 생각한다. 그러나 “자동차 대수는 많아졌는데 교통문화는 정착되지 못했다”하면 문화의 의미는 훨씬 달라진다. 요즘은 “화장실 문화를 개선해야 된다.”는 말도 자주 들을 수 있다. 문화라는 용어는 예술에서부터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 전체와 관련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이 문화를 전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 어느 정도 실감되리라고 본다. 문화를 예술로 보면 문화상품이 부가 가치가 높다는 것은 이해하기 쉬운 문제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고가의 그림이나 글씨라 하더라도 그것을 제작한 재료만 따진다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액수인가? 종이 한 장에 붓으로 먹을 묻혀 쓴 붓글씨나 동양화․유화 등은 그 작품의 재료로 따지면 가격이 얼마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팔릴 때는 그 가격의 액수는 재료비와 무관하게 작품성에 따라서 엄청난 가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부가가치가 높다는 것 아닌가? 문화가 돈이 된다는 얘기는 흔히 스필버그의 영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영화 한편을 만들어 벌어들인 돈이 자동차 수백만 대를 수출하여 벌어들인 돈 보다 많다고 하지 않는가? 정보화 시대에는 인터넷을 통하여 남이 갖지 않은 아이디어를 실용화하여 만인에게 필요한 무엇을 만들어 공급할 경우 또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결국 예술이나 지식이나 남과 다른 무엇을 가지고 남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문화상품을 만들 때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 것이 산업시대와 다르게 정보화 시대에는 더 빠르게 더 널리 활용되기 때문에 문화가 중요한 부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문화상품이 아니더라도 모든 상품에 문화 아이디어가 첨가되어야 그 만큼의 부가가치가 더 생긴다는 것도 상식적인 얘기에 해당한다. 때문에 앞으로의 교육은 문화와 관련되는 교육을 잘 하여야 한다. 지난 시대의 교육처럼 기술이나 기능만 강조하는 교육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미안이 있어야 하고 안목이 높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하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무엇을 할 수 있도록 훈련 시켜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가 있음으로 해서 대단한 문명과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 언어에는 일반적인 언어 즉 말과 함께 음악의 언어라든가 춤의 언어와 같은 문화언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교육계의 인사들이 문화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왜 음악을 가르쳐야 하고 왜 연극을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미래는 문화가 존중되고 문화가 부를 가져오는 세기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문화언어에 대한 인식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하면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말에 단어와 문법과 서술 내용이 있는 것처럼 문화언어에도 언어의 재료가 되는 음이나 춤사위와 그것을 엮어서 하나의 뭉뚱그려진 표현을 할 때의 표현 방법 즉 문화어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 그것을 통해서 무엇인가 사람이 생각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려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문화언어와 관련되는 사고를 할 줄 모르면 문화의 세기에 대비한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은 뻔-한 일이다. ‘대금산조’와 ‘베토벤의 교향곡’이 다른 것은 피차의 <음악언어>가 다른 때문이고 또 표현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Ⅱ. 우리문화는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로 되어있다. 문화의 바탕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내용이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비롯해서 언어라든지 사상이나 종교 등과 고급의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문화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를 중심으로 한 문화의 생성․발달과정을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는 고유문화가 있으면서 그 고유문화가 부단히 외부의 다른 문화와 교류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데 그 고유문화와 외부의 문화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문화가 된다. 그런데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다른 문화가 우리문화로 수용되는 경우 대개는 원 모습 그대로 우리 것으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소 변해서 우리문화로 수용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오래 전부터 문화의 근간이 된다고 할 수 있는 문자와 글을 중국의 한문을 가져다 사용하였다. 글자와 문법은 그대로 사용하였지만 뜻과 발음은 우리에게 맞도록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天이라는 글자도 우리말로 “하늘 천”하고 읽게 함으로서 새김 ‘하늘’은 뜻을 나타내고 발음 ‘천’은 음을 나타내도록 하여 사용하였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라는 건축양식은 서양에서 가져 온 것이다. 그런데 그 서양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가? 아니다. 전국의 아파트가 100% 온돌로 난방을 하게 짓고 있다. 온돌은 우리의 고유한 난방방법이 아닌가? 이와 같이 중국의 글도 우리 식으로 바꾸어서 사용하였고 서양의 건축양식도 온돌을 사용하여 우리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런 우리 식으로의 변화를 <한국화>라고 한다. 우리의 고유문화나 이전의 문화가 다음시대의 우리문화가 되는 과정에도 대개는 변화를 겪게 마련이다.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말도 늘 변하면서 우리말로 이어져 가고 있다. 우리는 한문을 오래 전부터 사용하였기 때문에 우리말의 70%이상이 한문 식으로 되어있다. 실제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일상 언어에 한문을 많이 사용했었다. 무식한 광대가 시골 대중을 상대로 소리를 하더라도 “천하대세(天下大勢)는 분구필합(分久必合)이요 합구필분(合久必分)이라”하면 대부분의 청중이 그 뜻을 알아들었다. 그렇게 한문 투의 말에 익숙해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산골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났을 때에도 먼저 발견한 사람이 한문 투로 말했다는 이런 우스개 소리 비슷한 얘기가 있다. “원산대호(遠山大虎)가 근산래(近山來)하니 지총자(持銃者)는 집총(執銃)하고 지창자(持槍者)는 집창(執槍)하고 속래속래(速來速來)”하고 외쳤다는 것인데 요즘 젊은이들 같으면 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그런 말이 일상적으로 통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우리말이 일제를 거치면서 일본말이 많이 섞여 사용되게 되었고 또 해방 후에는 영어가 많이 섞여 사용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매일매일 쓰는 한국말도 계속 변하면서 우리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동아리”나 “길라잡이”같은 토박이 우리말을 확산시켜 가더니 요즘 컴퓨터 통신에서는 또 다른 식의 우리말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말뿐만 아니라 우리의 김치 맛이나 된장 맛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판소리나 민속무용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다르게 공연할 수 있다. 그래서 고유문화나 이전의 문화가 지금 우리문화로 형성되는 과정에서의 변화는 <현재화>라는 말로 정의하고자 한다. 우리문화는 고유문화나 이전의 문화가 <현재화>하여 사용되는 것과 외부의 다른 문화가 <한국화>하여 수용된 것으로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이 부단히 수없이 계속되어 형성된 것이 현재의 우리문화라고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고유문화에 뿌리를 두고 현재화를 거듭한 문화가 <전통문화>이고 부단히 외부에서 들어와 한국화한 문화가 <외래문화>이다. 그래서 우리의 문화는 크게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로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동안의 우리교육은 이 두 종류의 문화 가운데 전통문화는 제쳐두고 외래문화 중심으로 교육을 했다. 우리의 젓가락질이나 밥 먹는 방법 등은 안 가르쳐도 서양의 식탁예절은 가르쳤을 정도이다. 나의 경험인데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서양의 식탁예절을 배웠다. 그 내용은 오른손에 knife(칼)를 들고 왼손에 fork(쇠스랑?)을 들고 오른손으로 썰어서 왼손으로 먹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정말 놀랐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부모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으면 “상놈된다”는 것이 크게 겁주는 소리였고, 밥 먹는 방법에 대해서는 어느 가정이나 오른손으로 먹도록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헌데 학교에서 서양 사람들은 왼손으로 먹는다고 가르쳤으니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때 “아하 서양 사람들은 모두 쌍놈인가 보다”하고 생각했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 때까지 양식을 먹어 본 적도 없고 구경을 해 본적도 없었다. 그런 시골학생에게 서양음식 먹는 방법은 가르치고 한국음식 먹는 식탁예절은 가르치지 않은 것이 우리의 교육이었다. 내가 너무 지나친 예를 들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교육내용을 따져보면 우리 것을 등한히 한 기간은 너무 오래 계속되었고 지금도 우리의 교육내용에 대한 반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교육개혁은 늘 교육방법에 대한 교육개혁이었고 그것도 다른 나라를 뒤따라가는 식이었지 우리 것을 우리방법으로 가르치지 않은데 대한 반성이나 개혁은 없었던 것으로 본다. 하긴 박정희 시대의 국적 있는 교육이나 국민의 정부에서 간헐적으로 나오는 국악을 더 가르치자는 정도의 주장이 있었지만 그것이 우리의 교육내용을 제대로 바꾸는 일은 하지 못했다고 본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의 교육은 외래문화 중심으로 해 왔다. 그 결과 상당한 서양화를 이룩하였고 또 경제성장도 앞당길 수가 있었다. 서양의 지식이나 기술을 받아 드렸고 서양예술의 방법도 열심히 배워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서양화 수준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면을 들여다 보면 우리 것인 우리의 전통문화를 모르게 되어 버린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남의 것을 배우고 외래문화를 발달시키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해서 무식하게 되었고 우리 것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얼른 보기에 지금까지는 별 문제 없이 잘 해 나온 듯이 보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 상태로 계속 미래를 향하여 직진해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정말 그럴까? 서양아류의 외래문화만 알고 우리고유의 전통문화를 모르는 채 우리라는 큰 집단이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국제 경쟁력이 있는 강한 나라로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을 까? 결론은 “안 된다”이다. 구조적으로 안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Ⅲ. 문화의 가치는 독창성에- . 우리나라의 지식인 가운데에는 우리문화와 서양문화의 차이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인사들이 많다. 우리 것이나 서양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기 때문에 서양 것만 가르쳐도 우리의 미래는 잘 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경우에 음악을 통해서 우리 것과 서양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곤 한다. 우리민족은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아주 오랜 옛날부터 노래하고 춤추면서 제사를 올리고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소질도 있고 음악을 좋아하는 민족이 되었다. 또 훌륭한 음악의 문화유산도 남기게 되었다. 그런 음악의 유산 가운데에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들도 많이 있기에 그 중 한 가지만 예로 들어보겠다. 우리는 음악을 기록하는 악보에 대한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세종 때에 창안하여 세종실록이나 세조실록 등에 악보를 많이 남기고 있는 정간보(井間譜)도 그런 악보중의 하나이다. 그 정간보의 구조를 보면 원고지처럼 여러 줄에 칸을 만들어 놓고 그 칸에 음 높이를 나타내는 율명(律名)을 적어 넣는다. 그러면 율명은 음의 높이(pitch)가 되고 칸의 수는 음의 길이(duration)가 된다. 악보란 음의 높이와 음의 길이를 나타낼 수 있으면 필요조건이 다 해결되는 것인데 정간보는 그렇게 하여 유량악보(有量樂譜)의 조건을 잘 갖춘 악보가 된 것이다. 이런 악보와 우리가 그 동안 가르쳐온 서양의 오선보를 비교해 보자. 오선보는 가로로 다섯줄을 긋고 그 줄이나 칸에 음표를 적어 넣어 음의 높이와 음의 길이를 나타낸다. 그런데 음의 높이는 음표의 머리가 공간의 어디에 위치하는가에 따라 다르고 음의 길이는 음표의 모양에 따라서 달라지게 되어있다. 우리의 정간보가 세로로 읽으며 부호가 음의 높이를 나타내고 공간이 음의 길이를 나타내는 것과 비교해 보면 똑 같은 유량악보인데도 그 나타내는 방법이 정반대로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세로로 읽는데 서양 것은 가로로 읽고 우리 것은 부호가 높이를, 공간이 길이를 나타내는데 서양 것은 부호가 길이를, 공간이 높이를 나타낸다. 완전히 반대로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발달된 시기는 우리 것이 15세기인데 서양의 오선보는 17세기나 되어야 요즘 수준의 오선보가 만들어진다. 하나 더 첨가할 것은 우리의 정간보는 초등학교 학생들도 몇 개월이면 배워서 혼자 볼 수 있는데 서양의 오선보는 수년이 걸려도 제대로 못 보는 학생들이 많다. 초등학교 중등학교에서 오선보를 계속 배우고 있지만 우리나라 국민의 몇%가 오선보를 제대로 볼 수 있는가?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지만 악보 하나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에게 훌륭한 악보가 있다는 것도 중요하고 그 악보가 편리한 악보라는 것도 중요한데 그 악보를 만든 연대가 서양악보보다 2세기나 앞선다는 것과 그 악보의 방법이 서양악보와 정반대로 되어있다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문화의 가치란 이와 같이 다르면서도 효율성이 있고 수준이 높을 때 그 가치가 증대되는 것이다. 우리음악의 실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문화유산 중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종묘제례악(보태평․정대업)은 그 음악의 됨됨이가 과거 중국의 음악과도 다르고 오늘날의 서양음악과도 다르면서 음악적 수준이 지고지순(至高至純)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대단한 것이다. 그래서 지난해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유산 걸작으로 인정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음악의 가치를 일본의 음악학자가 발견하여 살아남게 했다는 것은 많은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다나베 히사오(田辺尙雄)라는 일본 음악학자는 우리나라의 궁중음악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종묘제례악으로 쓰이는 전폐희문을 듣고 너무나 감동하여 “이런 음악이 없어지는 것은 조선의 아악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위대한 문화유산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지 반드시 보전되도록 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올려서 이왕직 아악부로 하여금 이 음악을 계속 이어가도록 했던 것이다. 만약 그 음악학자의 그러한 건의서가 없었던들 오늘날의 궁중음악은 지구상에서 없어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문화는 무슨 물량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로 평가되는 것인데 그 가치란 여기도 저기도 있는 흔해빠진 동류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흔치 않은 다른 것에서 찾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독특한 문화 다른 나라와 다른 문화가 오히려 더 큰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Ⅳ. 음악의 모국어 음악도 문화현상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다른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달한다. 노래는 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달한다는 악학궤범의 정의가 우리에게 많은 암시를 준다. “歌所以永言而和於律”이라는 구절이 그것인데 이것을 번역하면 “노래는 말을 길게 하여 음율에 얹은 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에 나라 이름을 앞에 넣어 다르게 읽어 보라. 예를 들어 “인도 노래는 인도 말을 길게 하여 인도 음율에 올린 것이고” “중국노래는 중국말을 길게 하여 중국 음율에 얹은 것이다”라고 해 보면 그 뜻이 더 명료하게 이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노래는 우리나라 말을 길게 하여 우리나라 음 체계에 맞게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면 또 하나의 멋진 정의가 된다. 그렇다. 우리나라에는 다른 나라와 다른 우리나라의 음악이 있고 그 음악은 우리나라 말과 우리나라 문화와 관계를 가지고 발달한 것이다. 아주 기초적으로는 어린아이를 재우면서 부르는 자장노래에서부터 논밭에서 일할 때 부르는 노동요가 다 그렇게 발달한 노래들이다. 그런 간단한 노래들도 지방에서 따라서 사투리가 달라지면 음악적인 내용이나 창법 또한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경기민요니 서도민요니 하는 민요의 지방적 특징이 나타나게 되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민요의 음악이 우리네의 문화 속에서 굿 음악으로 쓰일 때에는 굿의 의식에 맞도록 훨씬 규모가 확대되고 음악구조도 발달하여 보다 세련되고 수준 높은 음악구조를 갖게 된다. 또 다른 측면으로 선비들의 교양음악으로 쓰이게 되면 그들의 가치관에 맞게 음악의 군더더기가 다 덜어지고 마치 수양에 있어서 욕심을 덜어내듯 음악도 고답적으로 발달하여 정서적으로 한 없이 높은 수준을 향하여 끝없이 발달하게 된다. 말하자면 음악의 언어적인 방법이 이 땅의 가치관과 결합하여 우리다운 음악을 발달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판소리’가 그렇고 ‘줄 풍류’나 ‘가곡’이 그렇다. 많은 궁중음악 역시 예외가 아니다. 모두 우리의 음악언어와 우리의 음악가치관이 결합된 음악인 것이다. 이렇게 발달한 우리의 음악언어가 바로 우리의 음악적 모국어이다. 우리에게 ‘모국어’가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음악적 모국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인도에도 음악적 모국어가 있고 중국에도 음악적 모국어가 있다. 서양에도 이 말은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실제 음악적 모국어를 교육에서 중시한 것은 19세기 유럽에서였다. 당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민족단위의 국가를 건설하고 국가가 시행하는 의무교육을 실시하게 되는데 애국심을 길러야 하는 의무교육에서 중시한 것은 모국어와 음악의 모국어였다. 각 나라는 음악의 모국어를 가르치기 위해서 자기 나라 민요를 교재로 사용하였다. 독일은 독일민요를 교재로 사용하고 헝가리는 헝가리민요를 교재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보다 1세기나 늦게 의무교육을 하게 되는 우리나라는 어떻게 하였을까? Ⅴ. 음악의 외국어를 가르쳐 온 우리나라의 음악교육 우리나라의 음악교육은 음악의 모국어를 가르치는 서양의 음악교육과는 다르게 음악의 서양언어 즉 음악의 외국어를 가르쳐 온 것이다. 우리는 음악교육을 위해서 서양의 미국․영국․독일․이태리 등 몇 나라의 음악교과서를 수입하여 그 교과서에 실린 각 나라의 민요 등을 중심으로 음악 교과서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음악은 “만국공통어이다”라는 말과 함께 서양음악 중심의 음악교육을 해 왔다. 그 결과 서양음악에 대한 지식과 언어능력을 상당히 많이 습득하였고 서양에서도 인정받는 음악가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모두가 우리의 음악적 소질과 새로운 음악문화가 만나 이룩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음악언어능력을 가르치지 않음으로 하여 서양과 다른 우리음악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음악의 외국어는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음악의 모국어는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양의 음악언어는 서양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달했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영어의 The cat can get the rat. 이라는 구절이 있다고 하자. 이 문장에서 관사나 조동사는 중요한 단어가 아니고 명사나 동사가 중요한 단어이다. 때문에 노래로 작곡을 하기위해서는 소절을 만들어야 되는데 중요한 단어에 액쎈트가 가도록 소절 선을 그으면 다음과 같이 된다. The / cat can / get the / rat. 음악적으로 보면 약박으로 시작하는 못갖춘마디가 된다. 실제 우리 교과서에 실린 서양민요들을 보라. 대부분이 못갖춘마디로 되어있다. 영국민요 ‘올드랭자인’이나 ‘불어라 봄바람’ ‘앤리로리’ ‘아 목동아’ ‘어메이징 그레이스’등 다 못갖춘마디로 된 노래들이다. 독일민요 ‘오 탄덴바움’이나 ‘로렐라이’도 못갖춘마디이고 이태리의 오페라 아리아 ‘축배의 노래’도 못갖춘마디로 되어있다. 서양의 민요들은 대부분 못갖춘마디로 되어있는데 그 원인은 서양의 언어가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그런 서양민요를 가져다가 우리는 가사만 번역하여 가르쳐 왔다. 영어 가사를 번역하면 아래와 같은 식이 된다. The / cat can / get the / rat. 고양이/----------------/ 다. 노래 곡조의 액쎈트는 영어와 같은 식으로 붙어 있다. 그런데 가사를 번역하면 영어의 중요하지 않은 단어“the”의 위치에 우리말의 중요한 단어“고양이”가 가게 되고 또 반대로 영어의 중요한 단어 “rat”의 위치에 우리말의 어미 “다”가 오게 된다. 곡조의 액쎈트와 가사의 액쎈트가 서로 어긋나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노래로 부를 때에도 어려움이 많고 노래의 재미를 느끼기 어렵게 되어있다. 학교에서 그렇게 많은 노래를 가르치는데도 밖에 나가면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실상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음악교과서의 노래가 교재로서 적당하지 않은 명분도 영양가도 없는 노래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네의 음악교육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Ⅵ. 미래를 위한 문화전략 지피지기(知被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란 말이 있다.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면 모든 전쟁을 다 이긴다는 뜻이다. 어느 한 쪽만 알아 가지고는 싸움에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남을 아는 것도 아니고 남의 것을 아는데 급급하여 나의 것을 모르게 되었고 상대방의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목표를 잃은 교육을 해 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태로는 21세기 문화의 세기에 문화전쟁에서 참패할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전통을 교육내용에 많이 포함시키고 그 속에 스며있는 창조적인 삶의 방법을 다시 배우도록 해야 한다. 지금 교육개혁에서 외치는 열린 교육이나 창조성 개발도 교육내용을 전통적인 것으로 할 때 비로소 참 의미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놀이가 세계적으로 1만 명이상의 애호가(사물놀이를 배운 samulnorian)를 가지게 되고 연간 300 셋드 이상의 악기를 수출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 것을 세계화하는 것이 세계화의 방법이지 남의 것을 배우기만 하고 우리 것을 모르게 되는 것이 세계화여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우리 것을 배우는데 많은 노력을 기우려 보자.
    • 국악정보
    • 자료실
    2012-08-1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