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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謹弔] 국악인 '박정아' 명창 암 투병 끝 별세… 김태연, 스승 마지막 길 지킨다
    국악인 박정아(49) 명창이 유방암 투병 끝에 2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가수 김태연(11)은 장례위원으로 스승의 마지막 길을 지킨다. ▶박정아 프로필 박정아 명창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이수자다. ‘미스트롯2′에 출연한 국악 신동 김태연을 비롯해 많은 국악 인재를 길러냈다. 2000년 보성소리축제 전국대회 명창부 대통령상을 받았다. ‘국악신동’으로 알려진 김태연이 박정아 명창의 제자다. 고인은 생전 김태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2020년 채널A ‘아이콘택트’에 출연해 암 투병 중 사실을 고백하며 “제자들이 떠날 때 암 선고받을 때보다 더 힘들었다”며 “태연이가 ‘선생님 다 떠나도 저는 안 떠날 거다’고 위로해 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한테는 태연이가 특별한 제자다. 아픈 손가락”이라고 했다. ▶ 해당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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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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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개토사물놀이예술단 권준성 단장 “국악 원하는 젊은이에게 길라잡이 되고파”
    국악의 길을 걷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길라잡이 역할을 하고 싶다는 권준성 단장.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마포구 합정동 광개토사물놀이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환한 미소로 기자를 반겼다. 권 단장은 초등학교 시절 다니던 학교가 ‘전통음악 시범학교’로 선정돼 먼저 단소로 사물놀이를 접했다. 이어 중‧고등학교 때는 특별활동을 통해 사물놀이를 접하게 되는 등 사물놀이와 끊을 수 없는 우연들이 항상 있었다. 그런 우연들 덕도 있었겠지만 국악에 흥미를 느낀 그는 대학전공도 국악을 선택하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국악에 몸담은 그는 외환위기(IMF)시절 사물놀이의 길에서 갈등하며 달동네 편의점 알바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공연을 하자고 찾아왔고 편의점에 오시는 손님들의 ‘꿈을 찾아 가라’는 말에 다시 사물놀이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광개토사물놀이예술단을 결성하게 된 계기에 대해 “지난 2004년 중국 공연에 갔다가 그들의 ‘동북공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대륙을 호령했던 광개토대왕을 이어받아 문화로 대륙에 진출하는 꿈을 꾸면서 예술단을 창단했다”고 말했다. 예술단은 국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젊은이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퓨전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사물놀이와 비보이를 접목시켰다. ‘비빔밥’이라는 세계인이 좋아하는 음식도 ‘고추장’이 중심이듯 사물놀이와 비보이를 접목시켰다고는 하지만 그 중심이 사물놀이가 돼야 한다는 생각은 확고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비보이나 힙합과의 연계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이에 권 단장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예술단은 기본에 대한 공부를 철저히 하고 뿌리를 굳건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힙합을 좋아하는 그는 비보이와 비트박스를 사물놀이에 접목시켜 대중들에게 다가갔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의 국악인들이 모여 이루어진 광개토사물놀이예술단은 전통을 고수하면서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예술단으로 대중들에게 비춰지길 원했다. 예술단의 매력과 관련해 그는 “이름 따라 가는 것 같다. 힘과 젊은이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 해당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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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1-30
  •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외국 연출가가 판소리 연출 맡는다
    “그동안 가진 기술을 버리고 전통판소리만 보던 분들은 이게 무슨 창극이냐, 하시는 분들도 있을거예요. 하지만 더 넓은 지평을 여는 거고요. ’이게 정답이다’ 가 아니라 ’이런 다양한 작품들도 할 수 있는 거다’ 인거죠.”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최근 막을 올린 파격적인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의 평가에 대해 내심 걱정하는 눈치를 보이면서도 그의 말 끝엔 창극의 변화에 대한 의지가 묻어 있었다.“배우들이 고생하는 거 보면 고맙다”는 김 감독. 그만큼 이번 작품을 통해 대중적으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기원하는 눈치였다.지난 23일 만난 그는 몸이 좋지 않아 힘들어 하면서도 막바지 공연준비에 한창인 무대를 방문해 진행상황을 지켜보려 하고 있었다.사실 그는 올해 안식년을 맞았다. 하지만 그저 흘러가는대로 일 할 수 없고 그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펼쳐보여야 하니 일이 만만치 않다.그가 지난 3월 예술감독 부임이후 가장 먼저한 것은 소통의 부재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부임 직후 2달은 단원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1대1 면담에 주력하고 매 달 단원대표와 회의를 했다. 몸이 뻣뻣한 단원들에게 고전무용을 추게 하는 등 분위기도 바꿔보고자 했다.그는 유난히도 창작 신작에 집중한다. 이번 ‘장화홍련’부터 국립레퍼토리시즌으로 준비하는 작품들은 모두 신작이다. 새로운 레퍼토리 개발 전까진 심청전을 6년 간 같은 연출가, 음악감독, 스탭과 함께했다. 창의보단 가진 기술을 풀어가는 것이 익숙했던 이들에게 신작은 창작에 대한 긴장감과 도전의식을 만들어줬다. 단원들도 지금까지 잘 따라줬다.상반기 못했던 작품활동을 만회하려는 듯 ‘장화홍련’이 끝난 다음엔 바로 다음달 8일부터 ‘배비장전’을 공연한다. 판소리의 어법과 다른 파격넘치는 ‘장화홍련’과는 달리 전통어법과 흥겨움을 지닌 ‘배비장전’은 창극단의 작품성향의 균형을 유지한다. 내년 3월엔 윤호진 연출과 ‘서편제’를, 5월엔 그리스 희곡 ‘메디아’, 6월엔 청소년 창극시리즈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 김성녀 프로필 관련기사 더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112&aid=0002366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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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1-28
  • [謹弔] 전북 판소리의 산증인, 추담 홍정택 명창 별세
    전북 판소리의 산증인인 추담 홍정택 명창(본명 홍웅표)이 25일 새벽 숙환으로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92세. 부안에서 태어난 홍 명창은 정정렬의 제자인 이기권(1905~1951)의 수제자로 판소리 다섯 바탕을 익혔다.22세에 조선창극단과 김연수창극단에 입단해 민족의 망국한을 소리에 담아낸 고인은 판소리가 절멸의 위기에 처했던 1970년대 전주의 판소리를 외롭게 붙들었다. 최승희 조소녀 전정민 조영자 윤소인 김소영 명창 등이 처음 소리를 시작할 때 그에게 배웠을 정도로 판소리 후학들을 길러내 소리 문화의 전통 계승에 앞장섰다. 뒤늦게 동학농민혁명 후예로 알려진 고인은 명고수이기도 했다. 그의 사촌형 홍용호도 명고수였다. 대통령상을 수상한 외손녀 김세미(추담판소리보존회이사장)·김선미 명창 등을 배출해 판소리로 일가를 이뤘다. 관련기사 더보기 ☞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45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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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1-26
  • 황용주,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예능보유자를 만나다.
    요즘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빌보드차트 2위까지 오르며 대한민국 문화의 힘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는 한류바람이 불고있다. 하지만 우리의 소리는 점차 살아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묵묵히 58년을 우리의 소리를 지키며 계승발전에 온 힘을 쏟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있는 우리소리 지킴이 황용주선생을 소개한다. 어린 시절 배운 한학을 바탕으로 국악 사설을 정리하고 음악적 이론을 정립한 이론가이기도 한 황 명창은 ‘한국고전음악선집’, ‘한국 경·서도 창악대계(상·하권)’, ‘한국 경·서도 창악산타령’등 세권의 저서를 펴냈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 황 명창이 선소리산타령에 입문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지난 1937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그는 일자리를 찾으려고 고등하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왔다. 동대문에서 양품도매상 점원으로 일하던 그는 국립국악원에서 시조 강습생 모집 공고를 접하면서 故 이주환선생께 시조를 배우게 됐다. 그 뒤에 바로 故 벽파 이창배선생을 만나서 가사, 시조, 경·서도 창 및 선소리산타령을 사사받았고 지난 1968년 4월 경기·서도 선소리산타령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을 받은 후 전수 장학생으로 선정돼 고 벽파 이창배선생의 뒤를 이어 경·서도 선소리산타령의 전승교육에 힘을 쓰고 있다.근래에 급격히 밀려들어오는 서구 문화의 내습으로 인해서 우리의 전통음악은 뒷전으로 밀려 인멸의 위기까지 이르렀으나 정부의 우리의 전통음악과 문화 창달의 시책에 힘입어 전승보급 발전에 힘이 되고 세계문화유산에 일부가 등재되기까지에 이른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경기지방에서 전승되어 오는 경기선소리산타령과 서도지방에서 전승되어오는 서도선소리산타령은 입창(立唱)형식, 즉 서서 부르는 노래이며, 경기12잡가와 서도좌창은 앉아서 부르는 노래로서 이 세 장르가 경·서도 소리의 대표적인 악곡이라고 할 수 있다.그 중 경기선소리산타령은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잦은산타령’, ‘개구리타령’이요, 서도선소리산타령은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경발림’ 등을 기본틀로 이어 부르는 노래이다.그런데 옛날 우리들의 스승님과 선배님들의 시대에는 경기창과 서도창을 아울러서 같이 전승을 시킨 관계로 경·서도창이라고 명칭을 하고 또한 경·서도인이라고 부르며 경·서도창을 같이 전승시켰는데 요근래와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을 시키면서 경기민요(경기좌창, 제57호), 서도좌창(제29호), 경·서도선소리산타령(제19호) 등으로 분류되어 지금의 현실과 같이 분류되었던 것이다. ▶황용주 프로필 ☞ 관련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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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1-23
  • 가야금 앙상블 '소리애' - 전통·현대 녹인 퓨전 가락 “국악 대중화 우리 손으로”
    "잔잔한 호수에 갑자기 성난 파도가 일자 사위가 별안간 어두워지고 한가로이 떠다니던 백조와 오리떼는 순식간에 날아가버렸다. 하지만 어디선가 청아하고 은은한 가락 소리가 들려오자 먹구름 사이로 찬란한 햇살이 비추고 성난 파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이내 후두둑 거리며 호수를 떠났던 백조와 오리떼가 다시 돌아와 사랑을 속삭이며 평화를 만끽했다.” 마치 무협지에 등장하는 무림의 고수처럼 가야금을 옆에 끼고 청아하고 맑은 가락으로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여걸(?)들이 화제가 되고 있다. 주혜경(36) 단장을 중심으로 우연희(31)·홍민주(29)·홍영주(32)·홍기숙(33) 단원 등 5명으로 구성된 가야금 앙상블 '소리애'가 한국 고유의 전통가락을 대중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특히 단원들은 단순한 취미생활이 아닌 가야금을 전공한 전문가들로 충남에서는 유일한 가야금 앙상블이다.문화체육관광부 소속으로 현재 충남외고·신방중·천안중·두정초 등 충남지역 초·중등학교에서 파견 음악 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단원들은 결성부터 이색적인 탄생 비화를 담고 있다. 주혜경 단장은 소리애는 우연처럼 얽혀 운명처럼 시작된 사조직(?)이라고 말한다. “문광부에서 한해 몇 차례씩 연수를 받게 되는데 한 방에 모였던 5명이 지금의 소리애 단원이 됐어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5명 모두가 천안, 아산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우연치고는 너무 뜻밖이라고 다들 생각했지요. 민주와 영주, 기숙이는 원래 천안에 거주하고 있었고 저와 연희는 천안에 사는 남편을 만나 제2의 고향이 됐죠. 이후 자연스럽게 만남이 이어졌고 작은 힘이지만 국악의 대중화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보자는데 의견을 모아 지난해 3월 '소리애'를 결성하게 됐어요. 지금도 전통을 기반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퓨전 공연을 기획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요.”가야금 전문가들로 구성된 앙상블이 없었던 탓에 소리애는 결성 이후 빠르게 인지도가 올라갔다. 2011년 3월 결성해 7월 창단 공연을 한 후 매년 10여 차례 이상의 공연을 펼치고 있을 정도다. 지난 17일 천안예술의전당 소공연장에서 열린 2번째 정기연주회도 400여 석의 객석이 모두 찼을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번 정기연주회에서는 악기를 혼자서 연주하는 형식의 가야금 산조를 비롯, 25현 가야금을 위한 4중주 도라지, 시작은 웅장하고 흥겨우면서 신명 나게 마무리되는 실내 악곡 '배 띄워라' 등 다양한 가락을 연주했다. 또 가야금 연주에 맞춰 프로 댄스 스포츠 선수들이 열정적인 댄스를 선보여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날 공연의 압권은 가야금으로 듣는 영화·드라마 OST 공연이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메인 테마곡인 '눈의 꽃'과 '신사의 품격'의 '하이하이' 등 대중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음악들을 직접 편곡하고 초연해 열화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기도 했다. 관련기사 더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5&aid=0002236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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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1-23
  • 한국무용가 정혁준, 한국무용춤사위로 세계를 누비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는 인간의 수명이 길어봤자 100년 이쪽저쪽인데 반해 위대한 예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불멸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봄볕이 언 땅을 녹이듯이 예술은 메마른 인간의 마음에 윤기를 흐르게 하고, 각박한 삶에 여유와 부드러움을 안겨준다. 여기에 몸을 움직여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춤 예술을 빼놓을 수 없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춤은 궁중예악으로 정제되었고, 무속신앙에 자자들고, 탈춤이나 마당극으로 드러나 있다. 여기에 서양의 발레와 현대무용이 더해져 풍성한 확장성까지 갖추게 된다. 우리 무용계도 이런 역사만큼이나 역동적이고도 개성 있는 무용인들이 적잖게 배출되는 시기가 오래 전부터 계속되고 있다. 이 같은 때 한국무용가 정혁준씨를 만나 그의 춤 인생의 향취를 맡아보자 아홉 살에 시작된 정혁준의 춤 길 정혁준은 9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동네 무용학원을 처음 찾았고, 무용학원 원장과의 첫 만남에서 소고춤을 추게 된다. 홀이 좁다는 듯이 뛰어다니며 열심히 춤을 추는 어린 혁준을 바라보던 선생님은 ‘넌 천생 춤꾼이구나!’하는 말로 혁준과 첫 대면을 하게 된다. TV를 보며 연예인들의 흉내를 곧잘 내는 막내아들을 어머니는 이미 1년 전부터 아동극단에 데리고 다녔고, 소고춤은 혁준이 거기서 익힌 춤이다. 동네 무용학원을 어머니와 함께 찾은 그 발걸음이 혁준으로 하여금 30년을 한 결 같이 춤인생으로 치닫게 한 시작점이 될 줄을 그 누가 알았으랴. 저 유명한 서정주의 ‘귀촉도’라는 시를 보면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라는 구절이 있다. 혁준처럼 춤에 죽고 춤에 사는 진정한 춤꾼에게 이처럼 딱 들어맞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한恨과 신명에 취해서 제 갈 길을 열심히 가는 예인들을 생각하면 이심전심의 감흥이 절로 밀려들지 않을 수 없다. 관련기사 더보기 ☞ http://kookminnews.com/atc/view.asp?P_Index=4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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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1-21
  • ‘서편제’ 데뷔 20년 오정해
    ‘큰 소리꾼이 되어라, 마음의 한을 품어라, 큰 소리꾼이 되어라.’ 20년 전 영화 ‘서편제’는 그렇게 심금을 울렸다. 아버지가 딸을 진정한 소리꾼으로 만들기 위해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이다. 앞이 안 보이는 딸은 ‘이제는 소리밖에 할 수 없지요.’라고 애절하게 울부짖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국 영화 최초 100만 관객 돌파라는 신기록을 세우면서 그야말로 영화의 한 ‘신드롬’을 일으켰다. 판소리와 소리꾼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들도 이 영화를 통해 새롭게 이해하게 됐다. 그만큼 사회적 이슈였고 눈부신 영상에 녹아든 여주인공 송화의 목소리에 울고 감동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정서와 한을 토해내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이 영화는 1993년 상하이영화제 최우수감독상(임권택), 최우수 여우주연상(오정해), 제31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감독상, 제14회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남우주연상(김명곤), 제4회 춘사영화예술상 대상·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오정해), 청룡영화제 최다관객상·대상·작품상·촬영상·신인여우상·남우주연상·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오정해(41)씨에게는 요즘 ‘서편제’(아래 사진)가 각별하게 다가온다. 20년 전 미스 춘향 ‘진’으로 뽑히면서 임권택 감독에 의해 ‘서편제’ 여주인공으로 발탁됐다. 얼떨결에 출연했지만 영화가 대박을 터뜨릴 줄 몰랐다. 지금 생각해도 울면서 연기를 했던 기억이 선하다고 말한다. 연기 생활 20년을 맞은 그를 만났다. 지난 13일 오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경기 안양의 한 중국집 2층에서 마주 앉았다. 중국집은 ‘퓨전 중식’ 메뉴로 남편이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남편을 도와 중식당에 가끔 나왔지만 지금은 바빠서 거의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 오씨와는 구면이어서 오랜만이라고 인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월이 좀 지났는데도 얼굴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자 “저는 숫자를 잘 몰라요, 나이를 세면 뭐해요.”라며 웃는다. 그는 원래 솔직 털털한 성격이다. 책 읽는 것, 조근조근 대화하는 것도 좋아한다. “지난주 토요일 경기 광주에서 ‘오정해의 소리이야기’(부제, 당신이 있어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관객들과 편하게 만났습니다. 그때 그랬지요. 지난 세월을 살아오면서 데뷔 20주년이라는 말을 처음 꺼냈습니다. 전화를 주시지 않았으면 그조차도 잊고 살았을지 몰라요(웃음).”원래부터 숫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는 “나이든 몇 월 며칠 세는 것이 중요한지 모르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얼마 전 결혼 15주년인 것도 잊었었고 생일도 가끔 ‘까먹는’ 경우가 있단다. 정말 그렇게만 지냈을까. 따지고 보면 세월의 무게, 세월의 힘이란 무시할 수 없다. 최근 철학박사 학위를 땄고 ‘오정해의 소리이야기’라는 새로운 무대도 시작했다. 또 판소리 다섯 마당과 아리랑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자료수집 등 책자 발간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오씨와 만나면서 ‘서편제’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였기 때문이다. 그 영화를 떠올릴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서편제는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른 것 같아요. 자기 안에서 찾는 영화의 장면이 달라요. 화면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요. 제 개인적으로는 영상과 음악이 아주 잘 어울리는 완벽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의 한과 정서가 잘 함축된 음악, 그리고 북을 치는 동호와 회포 푸는 장면 등 제가 불과 22살 때 겪었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합니다.”그는 당시가 더 어른스러웠다며 웃는다. 지금은 아이 낳고 엄마가 되었지만 그때는 뭣도 모르고 자신만만하게 모든 일을 했던 것 같다고 술회한다. 또한 주위에서 많이 이끌어 주었기에 더욱 그랬단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미스 춘향’ 시절로 돌아갔다. 타고난 노래 솜씨를 보이던 그는 주변의 권유로 판소리를 시작했다. 13살 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에서 최연소로 장원을 하면서 명창 김소희(1995년 작고)의 제자가 됐다. 이후 KBS 국악마당에 두 번 출연하면서 한복 연구가 허영(2000년 작고)과 인연을 맺었다. 결국 한복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칭찬에 ‘미스 춘향’ 대회에 나가게 되면서 ‘서편제’를 찍게 됐다. ☞ 오정해 프로필 관련기사 더보기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111502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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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1-15
  • 정년퇴임 맞은 '시국춤' 이애주 교수
    "우리 춤의 진면목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 세계 만방에 알리고 싶어" 올해로 춤 인생 60년: 71년 국립무용단 24개국 순방.."서양춤 흉내" 평가에 충격 받아 우리 춤 정통 살리려 무용계도 떠나87년 시국춤 '바람맞이춤': 박종철 고문치사 등 춤으로 표현… 그 후 입으로만 일하는 이들에 실망 10년간 승무에 매진, 인간문화재로퇴임 후의 계획은: 싸이·김연아·손연재가 주는 감동 우리 춤의 역동성과 닿아 있기 때문 춤대학 만들어 제대로 가르치고파이애주(65) 서울대 체육교육학과 교수가 정년을 맞았다. 87년 민주화 운동의 현장마다 불을 붙였던 춤꾼. 서울대 교수이면서 맨발로 마당춤을 마다 않았던 민주화 운동의 상징. 그러나 88년을 끝으로 한동안 그는 현장 춤에서 멀어졌다. 그 대신 중요무형문화재 27호인 한성준-한영숙류 승무를 익혀 99년에는 인간문화재가 됐다. 그 후에는 우리 춤의 뿌리를 찾아 고조선 강역과 바이칼호수 주변을 다니고 홍역(한학자 야산 이달이 주역을 개혁한 역서)을 공부하고 천부경을 외며 동방문화진흥회에서 전통사상에 빠져 들었다. 좌에서 우로 급선회하면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과거와 결별하는 것일까. 아니었다. 그는 본질로 들어가서 인간의 몸이 가장 자연스런 상태로 해방감을 주는 우리 춤 자체를 널리 알리고자 했다. 그가 거부한 것은 사람보다 목적이 우선인 운동과 그의 춤이 수단만 되던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_갑자기 활동이 많아졌네요. "지난 목요일에는 정년퇴임을 기념해서 서울대학교 문화관 중강당에서 특강과 공연을 했고요, 12일 저녁은 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승무 발표회가 있어요. 13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조계사 옆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저의 춤세계를 학술적으로 풀어보는 학예굿을 해요. 이이화 선생 채희완 유홍준 교수등이 발제하고 김명곤 전 장관이 축사를 해요. 마지막에는 제가 직접 춤을 추면서 이야기도 하고요. 18일 홍성에서 한성준 선생을 기리는 승무를 춥니다. 그 동안도 꾸준히 춤을 췄는데 요즘은 기획사가 안 끼면 공연장 얻기도 힘들고 신문에 기사도 안 나서 그렇지요." _올해로 춤 인생 60년이라고요? "엄마가 경기고녀를 나왔는데 어렸을 때 천도교 수운회관 자리에서 방정환 선생님한테 노래하고 유희를 배웠대요. 피아노 바이올린도 할 줄 알고. 다섯째인 내가 다섯살 때부터 동네 어른들이 민요를 부르면 춤을 곧잘 추니까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창덕궁 옆의 국립국악원엘 데려갔어요." ☞ 이애주 프로필 관련기사 더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232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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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1-13
  • 한국 대금산조 맥을 잇는 이광훈 연주가
    찬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묵직한 대금 소리가 그립다. 휘영청 뜬 달을 바라보면서 곡주 한 잔 기울이면 촉촉하게 마음을 적셔오는 대금 소리가 절로 귀에 착착 감긴다. 자연의 품에 안긴 가을은 격렬한 박자의 로큰롤이나 화려한 클래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잠시 일상을 놓고, 지친 영혼의 휴식을 위해 신묘한 대금산조 선율에 빠져본다. "30대 중반까지 제 이름이 없었지요."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 음악만큼 사람의 감정 상태를 잘 대변하는 예술은 없기 때문이다. 낙엽이 나뒹구는 쓸쓸한 계절이 찾아오니, 평온과 청량감이 무엇보다 필요했던 모양이다. 도시 생활에서 사나워지는 마음을 항상 촉촉하게 채워주는 대금산조가 생각난다. 이광훈의 대금산조가.한국에서 대금산조 최고의 명인은 인간문화재 죽향 이생강 선생이다. 이광훈은 이생강 선생의 아들이자 이생강류 대금산조 전승후계자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활발한 연주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광훈은 부친으로부터 오늘의 산조원형을 올곧게 전수받은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대금산조는 우리 국악 중 기악 독주 음악의 하나로 고대로부터 전해온 남도소리의 시나위와 판소리의 방대한 가락을 장단에 실어 연주하는 곡이다. 특히 이생강류 대금산조는 진양, 중머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엇모리, 동살푸리, 휘모리의 장단변화로 구성된 국악의 백미다. "이생강류 대금산조는 장단도 장단이지만 짜임새가 기가 막힙니다. 서양음악 하시는 분들도 감탄할 정도로 화성악과 선율구조가 다양하다고 하시죠. 삼라만상, 우주, 자연의 소리가 이생강류 대금산조에 담겨져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120분짜리를 작곡하셨죠."아버지라는 큰 산이 가끔은 그에게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듯싶다. 아무리 잘해도 이생강의 아들이라는 주위의 선입견은 그가 앞으로 커 가는데 그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있어 고맙고 또 든든하다. "30대 중반까지 제 이름이 없었지요. 항상 이생강 아들 이광훈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제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었고요. 지금은 오히려 더 편안합니다. 아버지께서 계시니까 활동하기도 든든하고 항상 제가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시니 감사드리지요. 제 곁에 오래 계셔야 할 텐데.""아버지 앞에서는 절대로 연습을 하지 않는다."이광훈 연주가는 태어나면서부터 대금 소리를 듣고 자랐다. 아버지 때문이다. 똑같은 이유로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금을 생활 안에서 배우게 됐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항상 접하다보니 머릿속에 온통 한국전통민속음악 뿐이었습니다. 10살 즈음에 우연히 아버지 대금을 입에 대서 불었는데 바로 소리가 났지요. 연습 없이 처음에 소리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바로 머릿속에 있는 아리랑을 연주했습니다. 저도 불면서 신기했지요."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광훈도 마찬가지다. 특히 대금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국악을 하지 않았다면 그도 음악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과 같다. 관련기사 더보기 ☞ http://www.vop.co.kr/view.php?cid=A00000555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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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1-12
  • '국민소리꾼' 장사익 씨 "소리 인생 18년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지…"
    15, 16일 이틀간 단독 무대 "시인들에게 빚지며 살죠" ‘어머니 꽃구경 가요/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하략)’ 김형영의 시 ‘따뜻한 봄날’ 전문에 곡을 붙인 노래 ‘꽃구경’. 지난 봄 소리꾼 데뷔 18년 만에 처음 출연한 TV 프로그램 녹화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리꾼 장사익 씨(63)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고려장을 빗대 어머니의 자식 사랑을 담아낸 노랫가락이 슬퍼서만은 아니었다. “아, 저놈 참 행복허게 노래를 부르더구만요. 지가 지 모습을 보는 건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얼매나 삶이 반갑고 고맙고 기쁘던지요.” ‘국민소리꾼’ 장사익 씨가 오는 15~16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두 번째 단독 공연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를 연다. 그의 공연은 수년째 유료 객석 점유율이 97%를 넘는 스테디셀러. 지난달 31일 북악산을 코앞에 둔 서울 홍지동 집에서 그를 만났다. 앞마당의 풍경들은 제법 쌀쌀해진 바람 소리를 담아내고 있었지만 햇살만큼은 눈부시게 따사로웠다. “시월도 마지막날이네유, 가을 드세유.” 그가 건넨 건 빨갛게 잘 익은 홍시. 하나 먹으면 정 없다고 기어이 홍시를 하나 더 건네는 그에게서 구수한 시골의 향이 느껴졌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 삼봉마을에서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가 정식 소리꾼으로 데뷔한 건 마흔여섯이 되던 해. 소문난 장구재비였던 아버지에게서 음악적 기질을 이어받았지만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서울 선린상고에 진학했고, 생명보험회사에 취직했다. 직장생활 3년 후 공병으로 군에 입대,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31사단 문선대에서 근무했다. 제대 후 무역회사, 전자회사 영업사원, 카센터, 노점상을 전전했다. “가수가 열여섯 번째 직업이네요. 그때는 어느 한 곳에도 발을 못 붙이던 힘든 시기였는데 그때 그 인연들까지 노래를 할 수 있는 힘이 됐지요.” 정악 피리와 태평소를 독학으로 익힌 그는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을 따라 전국을 떠돌기 시작한 1993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공주농악’으로 장원에 올랐고,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결성농요’로 대통령상을 탔다. 1994년 11월 주위의 권유로 신촌에서 연 첫 공연이 대성황을 이뤘다. 지금까지 총 7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 장사익 프로필 관련기사 더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5&aid=0002779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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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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