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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祝] 제20회 구례전국가야금경연대회 대상 (대통령상) 에 이승아씨 수상
    구례군(군수 김순호)이 주최하고 (사)가야금병창보존회(이사장 강정숙)가 주관하는 제20회 구례전국가야금경연대회가 지난 6월 18일부터 19일까지 2일간 섬진아트홀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또한, 지난 17일 대회 20주년을 기념하는 축하공연이 더해져 더욱 풍성하고 뜻깊었다. 예선은 비대면 동영상심사로 진행됐으며, 본선은 대면심사로 진행됐다.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 모든 심사과정은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전국 초‧중‧고등부, 신인부, 대학부, 일반부에서 가야금 산조, 병창, 창작 등 총 14개 부문에서 284팀 328명의 역대 최대 인원이 참가했으며, 심사는 김해숙(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명예교수) 심사위원장을 비롯한 12명의 심사위원이 맡았다. ▶ 이승아 프로필 영예의 대통령상(일반부 대상)은 이승아(40, 성남)씨에게 돌아갔다. 대통령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1000만 원과 부상으로 국가무형문화재 고흥곤 국악기연구원의 산조 가야금 1대가 주어진다. ▶ 해당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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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3
  • [祝] 제30회 대전전국국악경연대회, 김두수(농악) 종합대상 영광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대전광역시지회(지회장 이환수)는 2022년도 ‘제30회 대전전국국악경연대회’를 지난 18일과 19일 이틀간 대전예술가의 집에서 개최하고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이번 대회는 관악, 현악, 가야금병창, 농악, 판소리, 전통성악, 무용 등 7개 부문에서 개인과 단체 220여 명이 참가해 열띤 경쟁을 펼쳤다. 이환수 지회장은 "올해로 제30회를 맞이하는 大田전국국악경연대회는 30년이라는 대회 운영으로 훌륭한 국악예술인들을 배출하여 활동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오늘의 수고와 노력이 개인의 수상에만 그치지 않고 훗날 대한민국의 국악의 미래를 이끌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해 경연에 임해주시길 당부 드린다."라며 인사말을 했다. * 수상자 명단 - 일반부 종합대상(국회의장상): 김두수(농악부문), 대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임종완(관악), 이정은(현악), 김진경(가야금병창), 홍성지(무용) 대상(대전광역시장상): 임하정(전통성악) - 학생부 종합대상(교육부장관상): 오상석(국립전통예술고-농악 ) 대상(대전광역시교육감상): 신성자(광주예술고-판소리), 김서윤(충남예술고-현악), 박서진(경북예술고-관악), 김태린(송우중-가야금병창) 대전광역시의회장상: 이유정(부산예술고-전통성악), 임규희(대전예술고-무용) - 장애인부 대상(대전광역시장상): 강재희(판소리) 신인부대상(대전광역시의회의장상): 정동식(무용), 최낙문(판소리), 한종순(전통성악) - 단체부 대상(대전광역시장상): 한울소리회(이명자 외 9명/전통성악) ▶ 해당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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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2
  • 정성숙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 선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정성숙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겸임)가 6월 14일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다. ▶ 정성숙 프로필 임기는 2년으로 2022년 6월 14부터 2024년 6월 13일 까지 이다. 정성숙 교수(겸임)는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이수자와 국가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이수자이며, 문체부 산하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현재 서울시 무형문화재 위원, 강원도 무형문화재 위원,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위원,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위원, 국립국악원 운영 자문위원, 우리춤협회 부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성숙 위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전통연희 전문극장이었던 광무대 자리에 전통공연예술인들을 위한 창제작 거점인 창작마루를 조성하여 개관하는 등 전통공연예술의 진흥과 전통공연예술인들을 위한 많은 업적을 이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와 한국무용협회 및 전통춤협회로부터 문화예술특별공로상 등을 수상한바 있다. ▶ 해당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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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5
  • [祝] '제33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위재영 씨 대통령상 수상
    제33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위재영(국립국악관현악단 단원) 씨가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 위재영 프로필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종합국악경연대회인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는 (사)한국국악협회 대구광역시지회가 주관하는 행사다. 기악‧판소리‧무용‧민요(가야금병창 포함) 4개 분야에서 명인부, 일반부, 중고등부, 초등부로 나눠 진행한다. 지난 6월 11, 12일 이틀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올해 대회엔 전국에서 162명이 참가해 열띤 경연을 펼쳤다. 명인부 기악 부문에 참가해 대통령상을 받은 위재영 씨에겐 상금 1천만원이 수여됐다. 위 씨는 이날 경연에서 음정이 안정적이며 힘 있는 연주로 표현력이 뛰어났고, 절제된 조화로움이 돋보였다는 심사위원 평가를 받았다. 일반부 종합대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은 기악 부문의 고아라(전통소리마을진흥회) 씨가, 중고등부 종합대상(교육부장관상)은 무용부문에 참가한 오나연(국립전통예술고) 양이 수상했다. ▶ 해당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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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5
  • [祝] `제22회 명창박록주 전국국악대전` 성황리에 마쳐~ 조아람씨 대통령상 수상
    구미출신 명창 박록주를 기리기 위해 매년 개최되는 국악인 최고의 등용문인 '제22회 명창박록주 전국국악대전'이 지난 6월 11일부터 12일까지 2일간 고아읍 행정복지센터 일원에서 열렸다. 올해로 22회를 맞이한 대전은 동편제 판소리의 거장 명창 박록주선생의 예술혼과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국악문화의 저변 확대와 미래 국악을 이끌어 갈 젊은 국악인의 등용문으로서 구미시가 주최하고, (사)박록주기념사업회가 주관한 가운데 매년 열리고 있다. 대회 첫날인 11일, 고아읍 행정복지센터 광장에서 유명 국악인 박애리의 사회로 진행된 축하공연은 쑥대머리, 너영나영 공연과 박록주 선생의 1대 제자인 이옥천의 한량무, 한두레풍물단의 대북공연과 사물놀이 등 다양한 공연이 펼쳐져 시민과 함께하는 국악축제의 장이 됐다. 11일 부문별 예선, 12일 본선으로 진행된 이번 대회에는 명창부, 일반부, 신인부, 고등부로 나눠 판소리, 관악, 현악 3개 부문에 전국에서 95팀, 120여명이 참가해 이틀간 열띤 경연을 펼쳤다. ▶ 조아람 프로필 ▶ 함수연 프로필 <주요 수상자> •명창부 대상(대통령상): 조아람(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명창부 최우수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함수연(한국판소리보존회 청주지부) •일반부 종합대상(국무총리상): 김은경(중앙대학교 대학원) •고등부 종합대상(교육부장관상): 최세론(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신인부 대상(구미시장상): 나경희(교사) ▶ 해당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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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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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에 터잡은 채상소고춤 김운태 명인
    채상소고춤 --> 다음카페 바로가기 "전통무대공연 개발..공연예술인 키우겠다" "앞으로 제주도는 물론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전통무대공연을 개발하고 싶습니다. 제주는 전통예술부흥은 물론 공연예술인을 키우는 메카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동영상 뉴스보기 전립(모자)에 흰 띠를 달아 돌리면서 추는 채상소고춤의 명인 김운태(48)씨가 9일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제주민속촌박물관 공연장에서 나긋한 춤동작을 시작하자 관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호남·영남·경기의 독특한 장단과 함께 다양한 춤사위가 흘러나왔고, 엇박으로 띠를 빠르게 돌리며 기예에 가까운 동작을 선보일 때마다 관객들은 신이 나 저절로 어깨를 들썩였다. 소고춤을 통합한 젊은 예인으로 이름난 그는 벌써 2년 넘게 제주도에 머물며 하루에 세 차례 공연을 하고 있다. 제주의 전문예술공연단체인 '전통노리안 마로'와 함께 '전통예술흥행프로젝트-명인'의 예술감독을 맡은 김씨는 지난 1일 이정희(김숙자류 매헌춤보존회 회장)의 도살풀이춤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이날 역시 19일 있을 국립국악원 공연을 앞두고 예기(藝妓)인 장금도(83.여) 명인의 민살풀이춤에 고수로 나서 호흡을 맞추는 중이었다. 2009년 두달만 머물고자 제주에 내려온 그는 퓨전 열풍에 밀려 외면받고 있는 전통예술을 부흥하기 위해 마로의 젊은 예인들과 함께 제주도에 남은 인생을 걸어 보기로 의기투합했다. 공연장과 가까운 곳에 민박집을 통째로 빌려 먹고 자며 관객과 예술가 모두 감동과 흥을 누릴 수 있는 무대를 연구하고 있다. 지천명(知天命)을 앞둔 그에겐 아침저녁으로 운동하며 체력관리를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서울에는 예술가가 예술만 하고 살기가 힘들지만 제주도는 다릅니다. 국내외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이 늘 있기 때문에 관객을 확보하기 쉽고, 옛날 예인들처럼 살 수 있어 문화 자체가 상품이 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죠." 삶이 춤에 녹아내려 자연스럽게 몸에 배야 한다고 믿는 그에게 삶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는 제주는 그야말로 '황금밭'이었던 셈이다. 예술의 기운이 샘솟는 천혜의 자연조건에서 작품을 잘 만들고 사람을 잘 키우면 일본의 가부키를 능가하는 문화상품을 만들 수 있다는 그는 2013년께 제주시내권에 전용극장을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다. 이곳에서 제주도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속예술작품을 상시공연하고 나아가 정재(궁중무용) 등 궁중예술도 볼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또다른 목표는 제주에서 전통예술의 대를 이을 인재를 키우는 것. 어린 시절 호남여성농악단의 일원으로 공연장에서 자란 그는 후학들에게도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한바탕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단다. 무대와 관객을 중심으로 풍부한 현장경험을 쌓은 공연전문예술인을 양성하는 것이 그가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다. (제주=연합뉴스) 김지선 기자 -->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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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한국 신무용의 대표적인 인물 - 최승희와 조택원
    피카소가 후원한 최승희보석 휘감은 '보살춤' 인기…美·유럽 공연 500회 넘어해방 후 월북…말년에 숙청개인 발표회 먼저 한 조택원피아노 반주로 승무 창작춤…최승희 제자와 같이 공연도韓-日 문화외교에 큰 역할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한국 신무용은 일제 식민지 강점기에 태어났다. 춤으로 사상을 표현할 수 있다고 깨달은 지식층 젊은이들이 서양식 테크닉에 조선의 문화를 접목해 신무용이라 했다. 가장 암울한 시대에 태어난 한국춤인 만큼 신무용은 억압받는 조선인들에게 즐거움은 물론 긍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조선의 춤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 일본과 중국 관객들에게, 세계 2차대전의 포연 속에서 이 춤을 본 바다 건너 서구 관객들에게도 황홀함과 감동을 선사했다.◆ 함흥군수의 아들과 양반가의 딸 한국 신무용의 대표적인 인물이 최승희(1911~1967)와 조택원(1907~1976)이다. 이 두 사람은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학과성적도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예체능과 글재주 등 다방면에 출중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기대와 촉망을 한몸에 받았다.함흥군수인 조부와 대한제국 군인 부친을 둔 조택원은 소학교 시절부터 러시아 혁명에 쫓겨 함경북도 타국까지 피난 온 러시아인들을 가까이서 접했다. 비운의 현실 속에서도 밤만 되면 자신들의 민족 춤을 추며 시름을 달래는 러시아인들을 보고 춤에 대한 꿈을 품기 시작했다.정승판서 가문에, 아버지는 진사에 합격한 양반가 출신 최승희는 열여섯 살 되던 1926년, 경성의 공회당에서 처음으로 춤 공연을 보게 됐다. 당시 조선에 처음으로 공연 온 일본의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춤을 관람했는데, 조국의 현실을 생각나게 한 ‘사로잡힌 사람’이 그를 매료시켰다. 공연이 끝나고 최승희는 무대 뒤에서 이시이 바쿠를 만나 춤을 배울 결심을 했다. 네 살 위의 조택원이 춤을 먼저 알았지만, 본격적 수련은 최승희가 먼저 시작한 셈이다. 최승희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도망치듯 춤을 배우러 일본으로 간 지 1년 만에 인기를 얻었다. 조택원은 이시이 바쿠의 두 번째 조선 공연에서 역시 ‘사로잡힌 사람’을 보고 그의 문하생이 됐다.◆ 같은 스승…불교 소재로 춤 창작최승희와 조택원은 같은 스승 아래에 있는 동료로서 함께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조택원은 1933년 독립해 첫 번째 개인 발표회를 가졌다. 그중 하나가 승무를 소재로 만든 창작춤 ‘승무의 인상 (1933)’이다. 이 춤 제목은 1943년 시인 정지용에 의해 ‘가사호접’으로 바뀌었다. 전통적 고깔과 장삼을 입고 춤을 추되 국악기가 아닌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를 반주로 하는 ‘가사호접’의 춤과 제목은 조택원을 대표하는 상징작이 됐다.같은 해 개인 발표회를 연 최승희도 한국적 창작춤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여기서 공연한 ‘에헤라 노아라’라는 한량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최승희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최승희를 대표하는 작품은 맨몸에 보석을 휘감은 채 손으로만 표현하는 ‘보살춤 (1937)’이다. 둘 다 불교적 소재로 자신의 대표작을 만든 것이 공통점이다. 훗날 조택원이 미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그를 후원해준 미국의 신무용가 루스 세인트 데니스 역시 ‘보살춤’과 아주 흡사한 ‘콴인’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해외에서 더 유명했던 조선 무용가최승희가 미국의 흥행사 휴록의 기획으로 세계 공연을 떠났을 때, 조택원은 국내에서 개인 공연을 위해 같이 춤을 출 여자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최승희는 대부분 혼자서 춤을 췄지만 여자치고는 기골이 장대해서 남녀듀엣이 필요한 경우, 최승희가 남자역을 도맡아서 했기 때문에 남자 무용수가 필요없었다. 남자인 조택원의 경우는 달랐다. 그때 생각해 낸 것이 최승희의 제자 김민자였다. 그녀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토슈즈를 신을 줄 알았던 실력 있는 무용수였지만 최승희의 그늘에 가려 빛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최승희가 해외 장기 공연을 떠나버려 기약없이 몇 년간 스승의 집안일만 돌봐야 했던 차에 조택원의 러브콜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 이상이었을 것. 김민자는 선뜻 요청을 수락했고 해외에서 이 사실을 들은 최승희는 불같이 화를 내며 국제전화를 걸어 조택원과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 자기 허락도 없이 외간남자(?)와 춤 파트너가 된것도 모자라 단독 공연까지 감행한 제자의 당돌한 행위는 당시의 정서로는 용납이 안 되는 배신행위나 다름없었다. 이 일로 김민자는 근신조치를 받게 됐고, 결혼을 핑계로 스승의 곁을 떠났다. 소유욕과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최승희가 자기의 제자를 데려간 조택원을 좋게 보았을 리는 없었겠다는 추측이다.조택원은 1937년 프랑스로 건너가 공연을 시도했다. 해방 직후엔 미국에 머무르면서 현대 무용사의 거장 루스 세인트 데니스의 후원 아래 미국 순회공연을 했다. 조선춤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각각 500여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예술적 감각은 물론 조선의 춤이 얼마나 경쟁력 있는 것이었는지 새삼 일깨워준다.뛰어난 외모를 겸비한 이들은 영화에도 출연했다. 최승희는 자전적 영화 ‘반도의 무희’와 ‘대금강산보’에 출연하고 ‘이태리 정원’ 앨범을 취입했는데, 지금은 음반밖에 남지 않았다. 조택원은 영화 ‘미몽:죽음의 자장가(1936)’에서 바람난 유부녀 애순(문예봉)이 사모하는 무용가로 출연했다. 이 필름은 현존 조선의 유성영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문화재에 등재됐다. 시중에서도 구할 수 있어 젊은 조택원의 춤과 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국경을 초월해 그들을 아끼는 유명 후원인들도 있었다. 최승희에게는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테일러나 피카소 등이 있었고, 조택원에게는 펄벅 여사가 있었다.◆ 해방 직후 남과 북으로 갈린 운명이들의 운명은 해방 이후 희비가 엇갈렸다. 문화말살정책 속에서도 당당히 ‘코리안’을 표기하며 조선춤만으로 활동했던 최승희는 막바지에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는 비난으로 남한에서 버티지 못한 채 해방 직후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했다. 조택원은 위문공연을 피해 미국으로 갔지만 친일색이 짙은 무용시 ‘부여회상곡(1942)’을 올렸다는 이유와 미국에서 이승만 정권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정부 수립 이후에도 한동안 귀국하지 못하는 풍운을 겪었다. 사랑 없는 결혼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결혼과 이혼을 거듭했던 ‘모던보이’ 조택원은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반면 ‘신여성’ 최승희는 가족에게만큼은 ‘여필종부’였다. 결국 한 사람은 남에서, 한 사람은 북에서 조선의 춤을 발전시키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월북한 최승희는 김일성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탄탄대로를 달렸다. 지금의 옥류관을 무용연구소로 하사받았고, 총천연색 춤 영화 제작까지 지원받았다. 조택원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입국금지를 받아 오랜 방랑 끝에 1960년 13년의 타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이듬해부터 그는 한국 무용협회 고문이 되며 문화훈장을 받는 등 일생 동안 한국춤 발전을 위해 활동했다. 최승희는 많은 후원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사회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며 험난한 길을 자처했다. 주체사상이 도입되면서부터 남편이 먼저 숙청되고 자신의 모든 관직도 박탈당했다. 심지어 딸 안성희가 대중 앞에서 자신을 공개 비판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안정적인 말년을 살았던 조택원은 후세 사람들에게 최승희만큼의 강렬함은 남기지 못했다. 그의 뒤를 이을 제자를 키우거나 자신의 춤을 계승할 이론을 많이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승희의 매니저를 자처한 남편은 그녀를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포장해 스타마케팅에 성공했다. 조택원은 그럴만한 매니저를 두지 못했지만, 세련된 매너와 사교성으로 독자적인 외교를 펼쳐나가 문화예술계는 물론 일본의 정·관계 인사들까지 인맥을 형성해 대한민국 외교사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결국 최승희는 1967년께 반동으로 몰려 숙청당해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조택원은 예술인들의 애도 속에 1976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남과 북으로 상징될 수 있는 조택원과 최승희의 일생은 한국 근대사의 슬픈 단면이기도 하다. [무용평론가 이 동우] --> 한국경제 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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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군산의 마지막 권번 출신 기생(妓生) 김난주 할머니
    "기생질 허고 싶어 시집서 두 번 도망쳤지" [인터뷰] 군산의 마지막 권번 출신 기생(妓生) 김난주 할머니동네 회갑연에 초대되어 헌수를 도와주는 김난주(좌) 45세 때 모습. 윤기 흐르는 머리가 시선을 끈다.(1971년) 칼바람이 볼을 때리던 지난 2011년 12월 15일. 군산의 마지막 권번(가무를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곳) 출신 기생(妓生) 김난주(85) 할머니를 찾았다. 60년 가까이 이웃으로 살아온 김 할머니 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골목 끝 집이었다. 좁고 짧았지만, 6~7가구가 오무래 오무래 살던 골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떠나고 김 할머니네 한 집만 남아 고요가 흐르는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금방 갈아놓은 먹물처럼 번들번들하던 기와지붕이 세월의 풍상에 시달리다 깨지고 탈색되어 마음을 짠하게 했다. 대문을 여는 순간 옛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생'을 천시하던 시절 김 할머니 댁은 동네에서 조카 이름을 딴 '정선이 고모네 집'으로 통했다. 허물없이 가깝게 지내는 어른들은 '난주네 집'이라 불렀으며, 아이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금단의 구역으로 '기생네 집'이라고도 했다. 누가 들을까 봐 쉬쉬하면서. "안녕하셨어요?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아~니, 이게 누구랑가···. 그랴 맞어, 나는 누군가 했제.(웃음) 추운 날 어쩐 일이당가. 어여 안으로 들어와. 우리 집을 다 찾아오고, 참말로 별일이네!" 꼬부랑 할머니가 된 김 할머니는 처음엔 "누구랑가?"하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3초도 지나지 않아 알아보고는 반가워하며 안방으로 잡아끌었다. 김 할머니는 예상대로 홀로 외롭게 살고 있었다. 옛날에는 친정어머니와 장애인 남동생, 조카 둘, 해서 다섯 식구였다. "그전에는 마당에 장독대랑 샘이랑 있었는데 모두 사라졌네요." "그~라제 조카사위가 고쳐줬어. 그나저나 웬 날이 이렇게 추워, 다리 밑에 거지들 모다 안 얼어 죽었는지 모르겠네. 그쪽은 차니께 이리~이리 아랫목으로 내려오라고. 커피 타줄까? 여그 귤도 하나 먹어보고. 참, 점심은 먹었능가?"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목소리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해학과 풍자가 깔려있고, 끌리듯 당기듯 튕기듯 하면서도 애틋함이 묻어났다. 약간의 수다스러움은 판소리 춘향가에서 월매가 야밤에 찾아온 이몽룡을 반기는 대목을 떠오르게 했다. 평생을 소리(唱)와 함께 살아왔으니 그 여운이 어찌 남아있지 않으랴. "가시네 때 '바람피던' 생각만 나고 못 살겠드라고" ▲ 일본어 교육을 받는 일제강점기 권번 기생들.(김중규의 <군산역사 이야기> 스캔) 김난주(金蘭珠)는 본명으로 1927년 전북 순창 산골에서 태어났다. 예능에 기질을 타고난 그는 어려서부터 기생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스무 살까지 '바람'을 피웠단다. 이곳저곳으로 가무를 배우러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강권으로 결혼식을 올려야 했다. "남원의 안(安)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디, 남편은 집에서 글이나 읽는 학자였어. 그리도 어떻게 혀. 그럭저럭 살다 보니께 애기를 하나 낳았는디 어렸을 때 죽어 버렸어. 가시네 때 바람피던(가무 배우던) 생각만 나고 못 살겠드라고. 기생질 허고 싶어서 도망쳤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스스로 생과부를 택한 김난주는 스물두 살 되던 해 군산으로 이사한다. 변두리에 방 두 개를 얻어 친정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곧바로 소화권번에 입소하여 이기권, 김준섭 등에게 판소리와 장구를 배웠다. 그때 만난 장금도(84, 민살풀이 전승자)와는 60년 넘게 친구로 지내오고 있다. ▲김난주 20대 모습. 우리 소리가 좋아서 기생이 되려고 했다고. 김난주는 동료들에게 '타고났다!'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구음(口音) 구사를 잘했다. 춤을 추거나 악기를 배울 때 입으로 "나니나~ 나~나니~ 나리룻···" 하며 장단을 맞추다가 그 자체가 음악이 된 구음은 춤판이나 잔치판 등의 흥을 돋워주는 최고의 반주가 되었다. 스물네 살부터는 명월관, 근화각, 동해루, 쌍성루 등 큰 요릿집은 물론, 잔칫집으로 '밤 마실'을 나가기도 했다. 권번의 원칙은 4년을 마치고 시험을 거쳐 허가증을 받아야 하지만 워낙 목(소리)이 좋고 장구 솜씨가 뛰어나 권번에서 눈감아주었다. 김난주 인기는 대단했다. 집에서 곱게 화장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권번소속 예기 양성소에서 보낸 인력거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명월관 방마다 영화배우 닮은 김난주를 찾는 손님이 넘쳐났고, 마루에서 '뽀이'(boy)들이 서로 당기는 바람에 저고리가 찢어지기도 했다. "팁은 한 시간에 기본 2원이었제.(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6원) 그러나 두 시간 놀고도 50시간 100시간으로 달아주는 고마운 손님도 있었어. 이런 얘기는 쪼까 거시기 헌디, 손님이 연애를 걸어오기도 혔는디, 마음에 들믄 잠자리를 하기도 했제. (웃음) 하룻밤 사랑이 10년, 30년, 평생을 가는 경우도 있었응께. 그란디 지금은 다 흘러간 꿈이 돼야 뿌렀어!" 다섯 식구 '가장'으로 살아온 인생... 상갓집에서 초대 받기도 ▲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인 20대 후반 김난주의 모습. 김난주는 동네에서도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인기 영화배우였던 이경희와 빼닮은 미인으로 알려졌었기 때문. 동료 기생들은 물론 요릿집 손님들은 영화배우 이경희 언니가 행차했다고 반기며 서로 옆에 앉히려고 다툼이 일기도 했다. 20대에 가장이 된 김난주는 열심히 노력했다. 인기 '짱'이었던 그는 1년 남짓 모은 돈으로 'ㄱ'자 기와집도 장만하고. 몸이 불편한 남동생도 장가를 들였다. 친정어머니 수발도 극진히 했다. 조카를 둘이나 보면서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였다. 올케가 남편(동생)과 젖먹이 딸 둘을 놔두고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친정어머니가 있다고 하지만, 직장과 집, 양쪽으로 시달려야 했다. 올케가 없는 빈자리를 메워 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조카들 엄마 노릇을 하면서 애처롭게 살아왔다. 그래도 결혼해서 50대 중반이 된 조카들이 엄마처럼 대한단다. ▲ 충청도 광천 부잣집 환갑잔치 마당에서 장구로 흥을 돋우는 김난주.(1973년) 1960~1980년대 김난주는 주로 환갑이나 잔칫집에서 초청을 받고 외출을 나갔다. 동료 기생 2~3명이 함께 가서 자식들이 차례로 부모에게 술잔을 올릴 때 옆에서 도와주며 유창한 선율로 "받으시오, 받으시오, 이 술~ 한~잔을 받으시오"로 시작하는 권주가를 불렀다. 부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헌수(獻壽)가 끝나면 차일이 쳐진 마당에서 놀이판이 한바탕 벌어졌다. 놀이판에서는 장구, 북, 창, 구음 등으로 분위기를 잡아주었고, 손님들과 환갑을 맞은 본인이 소반에 팁을 놓아주며 흥을 돋우었다. 군산뿐 아니라 김제, 부안, 전주, 이리(익산), 충청도 등지에서도 초청을 받았다. 1박을 해야 하는 충남 대천이나 광천, 부여 등에는 친구이자 민살풀이 일인자인 장금도와 함께 다녔는데, 군산에서 왔다는 기생들을 보려고 몰려든 구경꾼이 잔칫집 마당을 가득 메웠다. 상가(喪家)에서 초대를 받기도 했다. 일반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내지만, 망자가 생전에 벼슬을 했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출상하는 날 기생을 불렀다. 애절한 소리로 저승으로 향하는 망자의 친구도 되어주고 길잡이도 돼주기 때문이었다. 기생이 요령잡이를 한다는 소문이 초상마당에 돌면 서로 상두꾼을 하려고 모여들었다. 머리에 흰 끈을 질끈 동여맨 기생이 상여에 올라 요령을 흔들면서 청아한 목소리로 만가를 선창하며 이끄는 꽃상여는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였으며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 옛날 나비들도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어!" ▲ 1960년대 중반 여름 피서지에서 동료들과 함께. 맨 앞이 장금도. 세월의 변화는 물의 흐름과 같아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법. 40대 후반부터는 외출(잔칫집 행사)이 잦아졌다. 미제 깡통문화에 길들여진 한량들로 세대교체 되면서 우리의 전통 창(唱)에서 벗어나 신식가요를 즐기는 손님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구음 구사가 뛰어나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악기 다루는 솜씨가 능숙해지고 창법도 원숙해지면서 50~60대에는 학원을 개설해서 후배를 가르치기도 하고, 선후배 기생들과 모임을 만들어 내장산, 속리산 등으로 야유회를 다니며 덧없는 세월에 허전해진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호호백발이 된 김난주 할머니가 기억하는 기생 동료는 민살풀이 일인자 장금도를 비롯해서 금선이, 옥주, 채선이, 혜영이, 난영이, 도심이 등. 그러나 대부분 죽거나 타지로 나가 살고, 장금도만 군산에 살면서 전화로 소식도 전하고 사는 얘기도 나눈단다. 권번에 발을 늦게 들여놓아 기생 경력이 짧지만, 애틋한 사랑을 주고받았던 남자도 몇 된다고 털어놓는 김난주 할머니. 그러나 "지금은 시든 꽃이 돼 뿌렸고, 그 옛날 날아들던 나비들도 모두 저 세상 사람 되었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오마이뉴스 기사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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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지음지교를 꿈꾸며] 연극인 이윤택 씨와 중요무형문화재 하용부 씨
    --> 밀양백중놀이 다음카페 바로가기 밀양 춤꾼 어깨춤에 팍 꽂힌 비주류 작가 “평생 같이 갈 겁니다” 밀양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춤만 추고 살았던 춤꾼 하용부 씨(57·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와 부산에서 태어난 문인 출신 연극인 이윤택 씨(60). 얼핏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삶의 궤도는 1988년 부산의 가마골 소극장에서 우연히 교차했다. 둘은 이 만남이 자신들의 삶의 궤도를 바꿔 놓았다고 말한다. “거기서 특별 공연으로 춤을 췄어요. 공연 뒤 까맣고 자그마한 사람이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다가오더니 대뜸 ‘같이 연극 해보지 않을래요?’ 묻는 거예요. ‘저 놈이 미쳤나? 춤추는 사람이 연극을 왜 하냐’라고 속으로 웃어넘겼죠. 연극판에서 이름깨나 날리던 이윤택이란 건 전혀 몰랐죠.”(하 씨) 이 씨는 연극에서 진정한 모국어의 율격과 이미지를 찾으려 모색하던 중 하 씨의 춤과 마주쳤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 문학계는 ‘해체’와 ‘실천’의 두 축이 있었는데 그는 ‘해체’ 쪽이었다. 권위주의로부터의 해체, 근대성, 식민주의, 사대주의로부터의 해체를 그는 모색했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왜곡되고 굳어 있다고, 현대시가 신라의 향가, 고려 속요보다 못하다고 봤다. “우리 고유의 리듬, 움직임을 찾으려고 굿판도 기웃거렸는데 그때 그의 춤을 본 거예요. 교방춤은 형식미를 추구하는데 그의 춤은 삼박자로 움직이는 게 굉장히 자유로웠어요. 호흡만 가지고 어깨춤을 추는데, 와∼. 그의 표정, 어깻짓, 발짓. 제가 찾는 게 다 있었죠.”(이 씨) 그 이듬해 하 씨를 설득하려고 밀양까지 찾아갔다. 선물이라며 커다란 괘종시계를 품에 안고 온 모습을 하 씨는 생생히 기억한다. 워크숍에서 배우들에게 강의 한번 해달라는 부탁을 하 씨가 수락하면서 시작된 두 사람의 ‘예술적 동거’가 올해로 24년째다. 9일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밀양연극촌을 찾았다. 극단 연희단거리패를 이끌던 이 씨가 1999년 단원 50여 명을 이끌고 만든 연극 공동체다. 서울도 자주 오가는 두 사람을 굳이 밀양에서 만난 것은 두 사람의 예술적 터전인 밀양에서 인터뷰를 하는 게 마땅하다는 하 씨의 고집 때문이었다. 서울과 부산에 극장을 두고 활동하던 이 씨가 밀양에 연극촌을 세운 것도 하 씨가 이곳 토박이이기 때문이다.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서로에게 풍성한 예술적 자양분이 됐다. 이 씨는 하 씨를 통해 한국적 몸짓을 연극에 접목한 ‘이윤택의 연기론’을 완성했고 지난해 이를 집대성한 책 ‘영혼과 물질’을 펴냈다. “우리는 변증법적 관계예요. 전 춤을 못 추지만 하용부의 춤을 보고 그 원리를 깨달았어요. 호흡의 원리도 깨쳤고 연극에 적용했죠. 그런데 정작 하용부는 그걸 몰라. 할배 모방춤이거든. 나는 현상에서 개념을 발견하고 이걸 하용부에게 다시 넣어준 거지. 그냥 춤꾼이던 그가 (나 덕분에) 창조적 아티스트가 된 거야. 하하.”(이 씨) 하 씨는 다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 하보경 옹(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1997년 별세)에게서 춤을 배웠다. “맞아요. 사람들에게 ‘이윤택이 하용부의 스승’이라고 합니다. 그를 못 만났으면 춤이나 추고 (인간)문화재나 되려고 했겠죠. 한번은 그가 제 춤을 보더니 ‘하 선생, 허리가 너무 구부정해. 허리를 펴야지’ 하는 거예요. 제가 춤을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께 배웠으니 자세가 저도 모르게 노인처럼 구부정했던 거죠. 춤에 앞서 신체의 개념으로 보니까 제 춤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하 씨는 이 씨가 연출한 작품 대부분의 안무를 맡았고 ‘오구’, ‘햄릿’ 등 주요 작품에는 배우로도 출연했다. 하 씨의 춤 공연에는 이 씨가 적극적인 조언자 역할을 했다. 2009년 초 프랑스 파리의 ‘상상축제’에 초청된 하 씨가 바스티유 오페라원형극장에서 단독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을 할 때도 그랬다. “하용부가 무대에서 춤을 다 춘 다음 처음에 앉아 있던 의자로 다시 돌아가 앉더라고요. 그래서 ‘그건 우리 방식이 아니다’고 그랬어요. ‘객석으로 나가 관객에서 손을 내밀라’고.” 하 씨는 이 말대로 객석으로 내려가 할머니 한 분을 일으켜 함께 춤을 췄다. 기립박수가 쏟아졌고 현지 신문들은 호평을 쏟아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한국문화는 ‘풀이’라고 했어요. 우리 문화는 풀어내는 것이지 완결성이 아니라는 건데 이게 정말 맞거든. 무대에서 풀어낸 걸 객석에 안겨주니까 감동받는 거지. 그게 바로 소통이라니까요.”(이 씨) 성격적으로도 두 사람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이윤택은 성격이 ‘지랄’ 같고 저는 이 선생 때문에 화난 사람들을 달래는 역할을 하다 보니 외부 사람들이 ‘하용부는 좋은 사람, 이윤택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사실은 아니에요. 배우와 스태프에게 제가 그럽니다. ‘이윤택은 욕을 하면서도 너희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책임 못 진다’고.” 2008년 밀양연극촌에서 독립해 ‘밀양전통예술촌’을 운영하던 하 씨는 지난해 이 씨의 부탁으로 다시 연극촌 촌장을 맡았다. “우리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이죠. 티격태격하더라도 결국은 평생 같이 갈 겁니다. 하하.”(하 씨) 동아일보 밀양=김성규 기자 --> 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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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권오춘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의 양평 한옥 초은당
    다섯 번 옻칠한 대청… 그 위에서 사뿐사뿐 선비춤 드디어 초은당에 간다. 여러 자리에서 여러 입으로 분분하게 소문이 나부꼈던 집이다. 옻칠을 아홉 차례나 하면서 돈을 종이처럼 처발랐다느니, 한강 이남의 경복궁이라느니, 부석사 무량수전의 살림집 버전이라느니! 과격하고 선정적인 소문들이었다. 금강송을 켜 옻칠한 대문 앞에 서니 얼굴에 잔뜩 웃음을 문 주인이 고무신 발로 뛰어나온다. 신만 고무신이 아니다. 명주 누비 바지저고리에 역시 솜 두고 누빈 조끼를 입었다. 지난해 파주 헤이리의 한 축제에서 그가 추는 선비춤을 구경한 적 있다. 한옥에 한복 입고 살면서 선비춤을 추는 사람. 신명 많고, 입담 좋고, 생각 굳은 이 집 주인 권오춘(61)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이다. 그는 지금 전통문화의 르네상스를 위해 앞장서서 달리는 중이다. 소득 3만 달러가 되면 다들 전통정신을 찾을 수밖에 없을 텐데 막상 한옥과 한복과 한식과 전통공예가 다 사라지면 큰일 날 일 아니냐며 자신의 삶으로 철저하게 한국인의 문화를 지키겠노라고 선언한 사람이다. 먼저 집 이야기부터! 초은당이 앉은 곳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야트막한 언덕이다. 눈앞에 북한강 줄기가 펼쳐지고 뒤로는 둥두렷한 산이 막아서 있다. 좌우로는 거인의 두 팔인 양 산줄기가 흘러내려와 집터를 포근하게 껴안는 형국이다. 풍수를 모르는 까막눈의 입에서도 ‘배산임수’ ‘좌청룡우백호’ 같은 말이 절로 튀어나올 길지다. 원래 이 집은 문화재 전문위원이기도 한, 홍근옥 명지대 공예과 교수가 박물관을 할 요량으로 맘먹고 지었다고 한다. 도집례(都執禮·의례를 맡아보는 사람)는 봉정사 극락전, 백제문화단지 같은 국보급 문화재를 복원했던 인간문화재 최기영 선생이 맡았다. 그런데 짓는 중에 그만 외환위기가 터졌다. 급히 새 주인을 물색하던 홍 교수와 마땅한 한옥을 찾고 있던 권 이사장이 만났다. “이 집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계약하자고 했어요. 당시 집사람은 미국에 머물던 중이었는데 전화로 상의했더니 한옥에 살겠거든 이혼하자고 하데요. 금방 설득할 일은 아니다 싶어 일단 계약부터 했지요.” 그때가 2004년이었다. 당시 사지 말라던 부인이 이젠 팔지 말라고 한다니, 그의 설득 작업이 효과가 있었던 듯싶다. 그러나 아직 100% 성공은 아니다. 부인은 잠실의 아파트에 살고 양평집엔 사랑주인만 일주일에 삼사 일씩 혼자 내려와 맥반석 구들 위로 군불 때면서 살고 있다. 한옥이 현대 한국인에게, 특히 살림을 맡은 안주인에게 얼마나 천대 받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실이다. “한옥에 살면 불편한 줄 알지만 막상 익숙해지면 심신이 아주 편안해져요. 이렇게 과학적이고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건축양식이 있었던가 새삼 놀랍니다. 남방문화인 마루와 북방문화인 구들이 만난 것도 그렇지만, 창호지·문얼굴·창호의 치수 같은 것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휴머니즘에 입각해 있는지요. 한옥은 우주 철학을 포괄하는 집이에요. 추녀의 원·기둥과 마루와 방 마루의 네모, 지붕의 세모가 합해 원방각(圓方角) 천지인(天地人) 철학을 품고 있습니다. 한복 또한 마찬가지예요. 집과 옷이 우주 원리에 두루 부합해요. 사람도 소우주니 집에 들어앉으면 성품이 활달해질 수밖에! 그러면서 또 언행은 신중하게 만들거든요.” 초은당 지붕은 여느 한옥과는 다르다. 처마가 길게 빠져나와 기와지붕이 내려앉은 모습이 새가 비상하는 형상이되 이건 까막까치 같은 잡새의 날개가 아니다. 적어도 독수리나 봉황쯤은 될 듯하다. “처마가 긴 것은 고려시대 건축양식이랍니다. 남성적이고 우람하지요.” 그 한옥을 그냥 두지 않고 그는 공들여 옻칠을 했다. 그냥 옻칠 정도가 아니라 인간문화재 옻칠장인 정수화씨를 초빙해 기둥엔 아홉 번, 바닥엔 다섯 번씩 덧발랐다. 초은당은 그래서 마루장도 기둥도 빛을 반사하는 거울면이 됐다. “옻칠은 세계에 자랑할 우리 보물입니다. 옻칠을 제대로 하면 불에 타지도 않고 원적외선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나온답니다. 옻나무로 차를 달여 먹으면 조기엔 암도 치료할 수 있대요. 유리컵에 우유를 담아놓으면 하루를 넘기지 못하지만 옻칠한 나무 컵에 우유를 담으면 일주일을 가도 상하지 않는 걸 내 눈으로 봤으니깐요.” 그의 한옥과 한복 예찬은 기운차고 재미있고 격조 있고 끝 간 데를 모른다. 그는 안동권씨 부정공파 35대 손으로 경북 안동에서 나고 자랐다. 태생적으로 선비정신이 몸에 밴 사람이다. 10여 년 전에는 하회 마을 인근 구담 마을에 60칸짜리 ‘구담정사’를 장만해 어머니를 모셨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이곳 양평의 북한강 물길은 안동의 낙동강까지 닿았었다. 배를 타고 그렇게 흘러간 기록이 여기저기 보인다. 지금 여기 양수리 북한강가 초은당 앞을 맴도는 전통문화의 물길이 안동 하회에 이르러 구담정사까지 흘러가기를 그는 꿈꾼다. 초은당은 본채 27칸, 별채 3칸 해서 모두 서른 칸의 집이다. 깔고 앉은 대지는 3300㎡(1000평). 마당 초입에는 들어서는 사람을 향해 절을 하는 형상의 향나무를 심었다. 또 봉화에서 가져온 금강송을 심었고, 마당으로 올라서는 계단은 문경에서 실어나른 목화문석으로 만들었다. 들여다보면 돌 속에 목화 송이가 툭툭 벙근다. 대문 앞엔 한쪽엔 초(招), 다른 쪽엔 은(隱)이라고 새겨진 와당을 박아넣었다. 초은은 숨어있는 사람을 부른다는 의미의 당호이고, 집주인 권오춘의 호다. 한복 입고 한옥에 사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몇 해 전 그는 영남춤의 명인인 박경랑 선생을 모셔와 선비춤을 배웠다. 손이 오면 거울같이 윤나는 대청에서 그는 너울너울 선비춤을 춘다. 지난가을엔 바깥 담을 새로 둘렀다. 거기엔 검은 빛이 감도는 보령 오석을 썼다. “산성을 쌓는 방식으로 담을 쌓았어요. 담장 위에 늘어놓은 흙인형은 인연 깊은 도예가 박종식이 만들어서 구운 겁니다. 인간의 벼라별 동작이 다 담겨 있지요. 봄이 오면 바닥에 조선꽃들을 심을 겁니다. 바닥에 깔린 벽돌도 박종식의 작품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게 모두 한국 전통 문양을 벽돌 위에 복원한 겁니다.” 지면이 모자라 그의 한국문화 사랑을 일일이 기록하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글=김서령 칼럼니스트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중앙일보 기사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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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박경랑의 코리언 팝 클래식 댄스 - 배학수교수의 무용평론
    --> 박경랑과 e-춤터 다음카페 가기 [예술부산 통권 78호 2011년 12월 35쪽] 1981년 테네 가수 플라시도 도밍고는 대중 가수 존 덴버와 함께 아마도 사랑’(Perhaps Love)을 불렀다. “아마도 사랑은 폭풍우로보터 안식을 주는 쉼터와 같을 거예요.”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을 섞을 때 잘 못하면 둘의 결점만 모여 유치하면서도 지루한 작품이 되어버리는데 도밍고와 덴버는 둘의 장점을 살려 편하면서도 품위있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날 박경랑도 그랬다. 그녀는 한국의 고전무용에 대중 무용적 요소를 잘 섞어 전통미를 간직하면서도 즐거운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박경랑은 춤을 세 개 보여 주었는데 고전과 대중의 화학적 결합을 성취한 작품은 두 번째 작품 ‘교방청 춤’이었다. 이 작품은 굴신(屈伸)과 상허하실(上虛下實)이란 한국 고전 무용의 전통적 기법을 그대로 사용한다. 굴신이란 몸을 굽혔다 펴는 업-다운이며, 상허하실이란 단전호흡으로 하체를 안정시키며 상체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세이다. 교방청춤은 모든 동작을 고전적 방식으로 수행하면서, 고전무용에서는 드문 직선의 활달함과 세밀한 잔놀음, 그리고 강력한 클라이맥스를 섞어 관객에게 새로운 감흥을 주었다. 양팔을 일직선으로 죽 펴는 직선의 사위는 매우 시원한 느낌을 주며, 작은 장식적 움직임이 동작에 자주 가미되어 전체적으로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절정의 장면은 박경랑 교방청춤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작품의 종반 그녀는 지구가 태양을 돌듯이 자전하면서 공전한다. 느린 속도로 진행을 하다가 빠른 속도로 자전과 공전을 섞으면 그 동작의 박력과 순환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에 관객들은 삭이고 있던 감정을 터트리면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박경랑은 교방청 춤에서 고전무용의 중후함에 시원함과 화려함, 그리고 절정의 회전을 섞어 고전과 대중의 중간이란 새로운 스타일의 무용 세계를 확립하였다. 이날 함께 출연한 이생강과 백인영도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생강은 소금, 피리, 대금을 들고 나와 각각의 음색을 소개하였으며 목포의 눈물과 대니보이를 그 악기로 연주하였고, 백인영은 아쟁으로 베사메무초를 연주했다. 그렇게함으로써 그 두 분은 국악기로 서양음악을 연주하면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가 난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양악 연주에 시간을 너무 많이 할애하여 국악 작품을 제대로 듣고 싶은 관객은 다소 실망이었을 것이다. 파페라(popera)는 대중음악(pop)의 형식으로 연주하는 오페라이거나 오페라 형식으로 연주하는 팝이다. 박경랑의 춤은 대중 무용 형식으로 추는 고전무용이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에 대해 어느 쪽이 더 좋은지 말할 수 없듯이, 박경랑의 팝 클래식도 정통 고전무용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독자적 스타일인 것이다. (2011.11.11. 부산 국립국악원 연악당) --> 경성대학교 배학수교수 네이버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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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동래학춤 '유금선' 스토리텔링전, 12월 17일 서울 '한국문화의집'서 공연
    -->공연정보 자세히 보기 마지막 동래 기생, 손님들 1시간 놀아도 100시간…나는 마지막 동래 기생 … 팔십 평생 목 쉬어 본 적 없었데이 “장구고 뭐고 나는 선생에게 악기를 배워본 역사가 없다.”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 동래학춤 구음 예능보유자 유금선 할머니는 타고난 예인이다. 연습 도중 가요 반주 나올 타이밍이 되자 피리를 불거나 기타를 연주하는 시늉까지 냈다. 장구만 칠 줄 아는 구닥다리 할머니가 아니란다. 드럼·기타 솜씨도 수준급인 만능 엔터테이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우리 전통음악에 구음(口音)이란 분야가 있다. 입소리로 악기를 흉내 내던 것이 그 자체로 춤판의 반주음악이 된 것이다. 재즈로 치면 스캣이요, 힙합으로 치면 ‘북치기 박치기’, 보통 사람들 노래판에선 ‘쿵짜작 쿵짝’이랄까. 구음의 최고봉이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 동래학춤의 구음 보유자인 유금선(80)씨다. 그는 장구 하나 들고 앉아 목소리 하나로 아쟁·대금 가릴 것 없이 전통악기란 악기 소리를 죄다 불러낸다. 악보는 없다. 춤에 맞추어, 분위기에 맞추어 그때그때 다른 소리를 낸다. 춤이 소리를 부르기도 하지만, 소리가 춤을 부르기도 한다. ‘되놈 송장도 일어나게 한다’는 소리다. 구음은 즉흥이다. 정해진 MR(반주음악)에 맞추어 노래하는 요즘 가수들이 닿을 턱이 없는 경지다. 허나, 구음의 달인 역시 그저 동래학춤의 반주 할머니 정도로 숨어 있었다. 그가 여든 평생 처음 ‘유금선’ 이름 석 자를 앞세워 서울 무대에 선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사장 이세섭)이 서울 삼성동 한국문화의집 (KOUS· 02-3011-1720) 에서 17일 오후 4시 올리는 ‘무형문화재 스토리텔링전’의 제 1회 공연의 주인공이 바로 마지막 동래 기생 유금선과 그의 후배들이다. 지정 종목만으로 알려진 장인들의 숨겨진 재능을 보여주고, 전통 공연판 입담의 최고봉 진옥섭 감독이 예인의 인생까지 들려주는 전석 1만 원 ‘만원의 행복’ 공연이다. 유씨는 ‘구음’으로 재주를 인정받았지만, 그 하나로 그의 삶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동래는 예부터 뛰어난 기생을 배출했다. 사신을 접대하는 외교적 목적의 관기를 내었으니 교방(敎坊) 교율은 엄격했다. 교방은 관기 제도가 철폐된 1910년 ‘동래기생조합’, 1920년 일본식 ‘권번(券番)’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 시절 유금선의 집은 동래 권번에 이웃해 있었다. “가시나라꼬 소학교도 댕기다 치웠지. 담장 너머로 권번 여자들이 예쁜 옷 입고 인력거 딱 타고 가는 거 보이 그래 좋고 부러운 기라.” 그는 열다섯에 권번에 입소해 소리를 배워 3년 만에 졸업장을 받고, 화초머리(기생의 성인식)를 얹었다. 유씨는 김강남월·원옥화·김계월과 함께 날리는 4인방이었다. 인기가 좋아 1시간을 놀아도 손님들은 100시간, 200시간 놀았다고 전표를 끊어줬다. 하지만 스물둘에 난 전쟁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전쟁통에 피난민이 몰려든 부산으로 각지 예기들도 몰려들었다. 동래 권번은 ‘국악원’이란 점잖은 이름으로 바뀌었다. 온천장의 풍류는 소리가 아니라 가요판으로 변했다. 소리를 한다고 누구나 가요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전천후였다. “딱 한 번 들으면 입력이 되는 기라. 한 번 듣고 곡 외우고, 두 번 듣고 가사를 외웠데이. 인제 대가리 돌만 들었는가, 뇌가 죽어삤는 갑다.” 17일 무대에는 김명초(66)·서화자(63) 등 60년대에 날리던 동래 국악원 후배들도 함께 선다. 그들 역시 소리, 민요, 가요까지 커버해 온 집안식구를 먹여 살렸던 만능 예능인이다. 60년대 동래 예인들에게도 ‘건전 민요’가 있었으니, 바로 ‘재건가’다. 민요조지만 ‘살기 좋은 동래 온천(…)이 사업을 받들어서 제일 관광 이룩하여 천수만대 보존하세~’란 가사는 건전가요 뺨친다. ‘재건가’를 기억하는 이는 진짜 동래 기생이지만, 모르면 가짜배기란다. 진짜배기들이 함께 외출(야외놀이)이라도 나가면 돈을 갈퀴로 쓸어 담았다. “팁이 말도 몬 해요. 나중엔 돈이 얼마나 꼽히는지 돼지 입이 째질라 캐. 그때가 재미있었지.” 그렇게 긁어 모은 돈은 다 날리고 없다. 빚만 남기고 젊은 나이에 죽은 서방님 때문에 한번 망했고, 다시 뛰어 모은 돈으로 장안 최고의 요릿집을 차렸다가 복어 독에 손님이 죽는 사고로 또 한 번 망했다. 남자 속에서 살았지만 50년간 독수공방 신세다. 지금이야 예능인이 각광받는 시대라지만, 그 시절엔 기생이란 이름 말고는 여인이 재능을 펼칠 길이 없었다. 몇몇 후배는 이름을 감추고 가정을 꾸렸다. 8일 동래국악진흥협회에 모인 왕년의 멤버들은 ‘정선 아리랑’부터 ‘재건가’ ‘여자의 일생’ 등의 유행가까지 부르며 호흡을 맞췄다. 40여 년 만에 다시 뭉친 이들의 흥은 쿠바의 노익장 밴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부럽지 않았다. 무얼 잘못 먹어 지난 밤 토사곽란으로 잠을 설쳤다는 주인공은 연습 초반엔 굳은 표정이더니 나중엔 다리로 기타 치는 흉내까지 내며 놀았다. “바다에 뛰어 내릴라꼬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재미있게 살기는 살았지. 내 청춘하고 모든 것이 구음에서 다 흘러 나오는 거라. 경상도는 억양 땜에 소리꾼이 안 나와요. 그래도 내 억양은 그런대로 들어줄 만하다 카네. 목이 쉬어본 적이 없으이 그건 좀 타고났는가배. 다시 태어나면 내 대명창이 한번 되고 싶다꼬.” 부산=이경희 기자 --> 동아일보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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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비운의 천재 무용가 최승희, 감춰진 동영상 나왔다
    --> 최승희 동영상 2분 20초 보기 젊은 날, 한반도와일본열도 그리고 유럽까지 매혹시켰던 뇌쇄적인 자태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동영상 속의 그녀는 40대 나이가 무색하게 우아한 춤사위를 선보이고 있다. 비운의 천재 무용가 최승희(1911~1969)의 미공개 무용 동영상과 무용음악곡이 국내에 처음 공개됐다. 신나라레코드(회장 김기순)는 최승희 탄생 100주년(2011년 11월24일)을 맞아 그의 무용 동영상·음악 등을 담은 DVD와 CD 출간을 앞두고 미공개 자료를 본지에 공개했다. DVD에는 최승희의 장구춤 독무와 부채춤 군무를 포함해 자신이 안무를 맡은 무용 동영상 4편이, CD 3장에는 최승희가 직접 작곡한 무용음악 등이 실렸다.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최승희 관련 자료들은 주로 그가 1946년 월북하기 이전의 것이었다. 김연갑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이사는 "이번 자료는 최승희가 월북한 이후 숨지기 전까지 생애 후반기의 예술 세계와 활동상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조선일보 원문기사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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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6
  • '제19차유엔관광기구총회' 만찬장의 송소희
    --> 송소희 홈페이지 【경주=뉴시스】이승표 기자 = 국악신동 송소희양이 2011년 10월 11일 오후 경주힐튼호텔 선재미술관에서 열린 '제19차유엔관광기구총회'의 수석대표 만찬장에서 우리민요 열창하고 있다. --> 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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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6
  • ‘국악계의 김연아’ 22세 소리꾼 김나니를 아시나요?
    도포자락을 휘날리거나 곱게 쪽진 머리에 한복을 입고 구성진 소리 한마당을 풀어내는 소리꾼들의 무대, 최근에 몇 번이나 본적이 있는가. 우리 전통음악인 국악은 서양음악을 포함한 대중가요에 밀려 ‘서자’ 취급을 받은 지 오래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국악=재미없는 것’이라는 공식으로 우리음악과 목소리를 외면하기 일쑤다. 하지만 여기 눈길을 끄는 한 소리꾼이 있다. 22살, 아직 어리고 앳된 나이지만 ‘국악=재미있는 것’이라는 공식을 알리기에 충분한 재주 뿐 아니라 아이돌 가수 못지않은 미색까지 갖췄다. 그야말로 ‘국악계의 김연아’, 또는 ‘국악계의 아이돌’이라는 별칭이 제격인 소리꾼 김나니를 양재동의 한 연습실에서 만났다. ●“어르신들이 예뻐해 주시니, 그 칭찬에 판소리 가락을 뽑아냈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음악과 판소리를 전공하고 대학원 진학을 앞둔 김나니는 현재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을 접목한 퓨전장르를 선보이는 에스닉 팝그룹 ‘프로젝트 락’의 막내이자 보컬로 활동하고 있다. ▶김나니 프로필 --> 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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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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